🎵 우리가 함께 듣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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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LP 가게에서, 운명처럼

서울 종로의 한 골목.
시간이 멈춘 듯한 LP 가게가 있다.
한때 유행처럼 번졌던 LP 열풍이 지나간 뒤에도, 이 가게만큼은 조용히, 묵묵히 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나무 문을 열면 고요한 먼지 냄새와 함께 음악이 흐른다. 바흐에서 비틀즈까지, 시대를 가로지르는 멜로디.

그날도 윤서는 아무런 기대 없이 가게 문을 열었다.

 

서늘한 가을바람이 따라 들어오고, 낡은 스피커에서 흐르던 노래가 그녀의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

“Fly me to the moon~
Let me play among the stars~”

 

"이 노래..."

 

윤서의 눈이 조금 커졌다.
이 노래는, 오래전 누군가와 함께 듣던 바로 그 곡이었다.
누군가의 웃음과 눈빛, 따뜻한 손길이 떠오르던 순간. 그 시절의 공기까지 되살아나는 듯했다.

그리고 그 순간, 턴테이블 앞에 서 있던 한 남자도 몸을 돌렸다.
지훈이었다.

 

시간은 많이 흘렀지만, 윤서는 단번에 그를 알아봤다.
지훈 역시 마찬가지였다.
서로를 향한 미소. 그리고 짧은 침묵.
그 침묵 속엔 10년이라는 시간이 담겨 있었다.


사랑을 다시 배우는 계절

“여기서 이렇게 다시 만날 줄은 몰랐어요.”

 

지훈이 말하며 LP 한 장을 꺼내든다.
그 앨범은 그들이 대학 시절, 함께 들었던 첫 재즈 앨범이었다.
누구보다 음악을 좋아했던 두 사람. 하지만 현실이라는 벽 앞에서 다른 길을 선택해야 했던 두 사람.

그날 이후, 두 사람은 매주 같은 시간에 그 가게에서 마주치게 된다.

 

어느 날은 엘라 피츠제럴드의 목소리를 들으며 커피를 마시고,
어느 날은 레코드에 얽힌 추억을 이야기하며 웃기도 했다.
시간은 조용히, 그러나 확실히 두 사람을 다시 가까이 데려다 놓았다.


노래가 연결한 인연

사랑은 때로 말보다 더 깊은 언어로 다가온다.
LP 가게에 울려 퍼지는 한 곡 한 곡이 두 사람의 감정을 살며시 감싸 안는다.
그리고 결국, 두 사람은 깨닫는다.

잊었다고 생각했던 감정은 사라진 게 아니라,
마음의 깊은 곳에서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던 것임을.


그 시절, 우리가 함께 듣던 가을

대학 시절의 가을은 이상하게도 유난히 깊고 투명했다.
윤서와 지훈은 같은 음악 동아리에서 처음 만났다.
처음엔 그저 LP를 좋아한다는 공통점 하나로, 자연스럽게 가까워졌다.
하지만 하루하루 함께 음악을 듣다 보니, 어느 순간 서로의 음악이 곧 ‘마음’이 되었다.

 

“이 노래 알아요?”

 

지훈이 재생한 건, 빌리 조엘의 ‘Just the Way You Are’였다.
윤서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이 노래… 나, 어릴 때 아빠가 LP로 자주 틀어줬어요.
그래서인지, 왠지 모르게 편안해져요.”

 

지훈은 그 순간을 잊지 못했다.
눈을 감고 음악에 몰입하던 윤서의 옆모습.
햇살이 유리창 너머로 부드럽게 그녀의 머릿결을 감싸던 그 날.

하지만 그들의 사랑은 오래가지 못했다.
지훈은 유학을 떠나야 했고, 윤서는 가족을 돌봐야 했다.
시간과 거리, 그리고 현실은 음악보다 더 강한 벽이 되어 둘을 갈라놓았다.

 

“우리 다시 들을 수 있을까?”

 

그때 윤서가 마지막으로 했던 말.

그 말은 지훈의 가슴 속에, 노래처럼 반복되며 남았다.


다시 흐르는 멜로디, 다시 시작된 사랑

지금, 그 LP 가게에서 다시 만난 두 사람은 예전보다 더 조심스럽다.
마음이 급하지 않다.
음악처럼, 자연스럽게 흐르길 바랄 뿐이다.

 

“그때, 너랑 헤어진 거… 후회했어.”

 

지훈이 조심스레 말했다.

 

“어떻게 지냈는지, 어떤 노래를 들었는지, 항상 궁금했어.”

 

윤서는 웃었다.
그리고 LP 한 장을 꺼내 턴테이블에 올렸다.
‘The Look of Love’ – 더스티 스프링필드의 목소리가 잔잔하게 흐르기 시작했다.

 

“나도 그랬어.

이 노래 들을 때마다,
왠지 모르게… 네가 떠올랐거든.”

 

음악은 말하지 않아도 마음을 전했다.
두 사람은 아무 말 없이 그 노래를 끝까지 들었다.
그 시간이 곧 고백이었고, 그 침묵이 곧 대답이었다.

 


사랑은 다시 흐른다

몇 주 후, LP 가게 안 작은 공간에서 작은 음악회가 열렸다.
지훈과 윤서가 함께 준비한 재즈 LP 세션.
함께 고른 음악들, 함께 나눈 시간들.

윤서는 말했다.

 

“사랑은 마치 LP 같아.
돌고 돌아도, 결국 원래의 자리를 찾아오니까.”

 

지훈이 웃으며 대답했다.

 

“그리고 그 음악은, 지금도 우리를 춤추게 하잖아.”

 

그날, 두 사람은 다시 사랑을 시작했다.
한 곡의 노래가 만든 기적.
한 장의 레코드가 이어준 인연.
그리고 그들은, 평생 함께 듣고 싶은 노래를
서로의 마음에 다시 올려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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