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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얼어붙은 말들한태성의 사랑은 언제나 소리가 없었다. 그는 말의 힘을 믿지 않았다. 말은 너무 쉽게 뱉어지고, 더 쉽게 변하며, 때로는 진심을 가리는 화려한 포장지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은수를 사랑하는 마음을 오직 행동으로만 꾹꾹 눌러 담았다. 은수의 구두 굽이 닳아 있으면 말없이 구두방에 맡겨 두었고, 그녀가 감기에 걸리면 약과 함께 따뜻한 도라지차를 끓여 머리맡에 두었다. 주말 데이트 때는 은수가 좋아하는 메뉴를 파는 식당을 며칠 전부터 예약해 두었고, 길을 걸을 때는 언제나 자신이 차도 쪽으로 섰다. 하지만 은수에게 그 모든 배려는 온도가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태성 씨는 나 사랑해?” 어느 날 저녁, 은수가 조용히 물었을 때 태성은 묵묵히 그녀의 잔에 물을 채워줄 뿐이었다. 사..
1. 투명한 벽북디자이너 서하준의 세계는 명확한 격자와 계산된 여백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는 단어와 문장 사이의 가장 완벽한 간격을 찾아냈고, 독자들이 가장 편안하게 몰입할 수 있는 글자 크기를 알았다. 하지만 정작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언어 앞에서는 언제나 길을 잃었다. 그의 마음은 두꺼운 안갯속에 잠겨, 하고 싶은 말들은 입가에서 흩어지기 일쑤였다. 그런 그의 세계에 김채원이라는 변수가 생겼다. 같은 출판사 마케팅팀의 채원은 하준과 정반대의 사람이었다. 그녀의 주변은 늘 밝은 웃음소리와 활기찬 에너지로 가득했다. 그녀는 자신의 감정을 숨기지 않았고, 그녀의 언어는 언제나 직선으로 날아와 상대의 마음에 꽂혔다. 하준은 파티션 너머로 보이는 채원을 몰래 관찰하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 그녀가 아이디어 ..
1. 이름 없는 뮤즈화가 이선우의 작업실은 수많은 얼굴들로 가득했다. 하지만 그 모든 얼굴은 결국 하나의 얼굴이었다. 어떤 그림에서는 새벽녘 안개 속에 서 있었고, 다른 그림에서는 쏟아지는 햇살 아래 책을 읽고 있었다. 또 다른 그림에서는 무심하게 창밖을 응시했다. 표정도, 배경도, 색채도 모두 달랐지만, 그를 사로잡은 고요한 눈매와 입가의 희미한 미소, 그리고 왼쪽 눈 아래의 작은 점은 언제나 그 자리에 있었다. 그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주목받는 젊은 화가였다. 평론가들은 그의 그림을 ‘존재하지 않는 그리움에 대한 탐구’라 칭했고, 컬렉터들은 그의 그림에 담긴 아련한 감성에 열광했다. 하지만 선우 자신은 거대한 사기극을 벌이는 기분이었다. “이 모델은 누구입니까? 작가님의 연인인가요?” 전시회에서 수없이..
1. 만남: 굳게 닫힌 문 미술치료사 한유월의 오후는 언제나 도화지처럼 깨끗하게 시작되었다. 하지만 그 위를 채우는 것은 대개 혼돈의 색, 어지러운 선들이었다. 아이들의 상처는 언어를 비껴가 그림으로 먼저 도착하곤 했다. 유월은 그 혼돈 속에서 길을 찾아내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요즘, 그녀는 자기 자신이 짙은 안갯속에 갇힌 기분이었다.그리고 서진이를 만났다. 열한 살 소년, 서진. 1년 전 교통사고로 부모님을 잃고, 기적처럼 살아남은 아이. 사고 이후, 아이는 말을 잃었다. 더 정확히는, 말을 하지 않았다. 아이의 모든 언어는 양 주먹 안에 갇혀버린 듯했다. 손가락은 사고의 충격 때문인지, 마음의 상처 때문인지 늘 뻣뻣하게 굳어 있었다. 연필조차 제대로 쥐지 못하는 손. 첫 상담 시간, 서진이는 유월의..
1. 회색 도시의 라이더 강민호의 세상은 아스팔트와 매연, 그리고 마감 시간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의 낡은 스쿠터는 서울의 혈관을 막힘없이 뚫고 나가는 적혈구처럼, 오늘도 쉴 틈 없이 달렸다. 서류 뭉치, 작은 소포, 잊고 온 휴대폰. 그가 나르는 것은 물건이었고, 그에게 중요한 것은 오직 ‘신속’과 ‘정확’이라는 두 단어뿐이었다. 감정은 사치였고, 배달지에 얽힌 사연 따위는 궁금해할 여유도 없었다. 그러던 어느 오후, 그의 단말기에 조금은 특별한 주문이 떴다.‘피어나, 너의 시간’이라는 작은 꽃집에서 온 다중 배송 요청. 품목은 ‘꽃다발’. “꽃배달은 전문 업체 쓰지, 왜 퀵을 부른담.” 민호는 투덜거리며 헬멧을 썼다. 꽃은 뭉개지기 쉽고, 향기는 거슬렸으며, 무엇보다 돈이 안 되는 배송이었다. 하지..
1. 잿빛의 아침박민준의 아침은 언제나 똑같았다. 6시 30분, 기계적으로 울리는 알람 소리에 몸을 일으켜 씻고, 토스트 한 조각을 억지로 삼킨다. 넥타이를 목에 두르는 순간, 그는 거대한 도시의 부품이 될 준비를 마친다. 그가 올라타는 지하철 2호선은 언제나 사람들로 가득 찬 캔버스였다. 모두가 비슷하게 지친 얼굴, 비슷하게 어두운 옷차림, 비슷하게 스마트폰 화면에 고정된 시선. 민준 역시 그 캔버스의 일부, 무채색의 점 하나에 불과했다.하지만 그의 잿빛 세상에 유일하게 색을 더하는 존재가 있었다. 매일 아침 8시 15분, 삼성역에서 타는 여자. 그녀는 언제나 같은 칸, 창가 쪽 문에 기대어 섰다. 계절에 따라 옷차림은 바뀌었지만, 손에는 늘 책 한 권이 들려 있었다. 때로는 고전 소설, 때로는 시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