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낡은 가로등 불빛만이 희미하게 길을 밝히는 밤이었다. 수현은 하루의 무게를 어깨에 짊어진 채 공원 벤치에 힘없이 주저앉았다. 푸석한 얼굴 위로 허공을 응시하는 눈동자에는 깊은 고단함이 서려 있었다. 고개를 들자, 검푸른 하늘 한가운데에 은쟁반 같은 달이 휘영청 떠 있었다. 마치 그녀의 마음을 다 안다는 듯, 말없이 부드러운 빛을 쏟아내고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옆자리에 누군가 앉는 기척에 수현은 살짝 고개를 돌렸다. 중년으로 보이는 남자가 조금 떨어진 곳에 조용히 앉아, 그녀처럼 달을 바라보고 있었다. 처음 며칠은 서로의 존재가 어색하게 느껴졌다. 괜히 헛기침을 하기도 하고, 시선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몰라 달만 뚫어지게 쳐다보기도 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그 침묵은 어느새 익숙한 풍경..
낡은 골목길 모퉁이를 돌 때마다 서윤은 걸음을 멈추곤 했다. 회색빛 건물들 사이에 숨은 듯 자리한 작은 화원, ‘마음 정원’. 간판조차 빛바랜 그곳은 이상하게도 서윤의 발길을 끌었다. 몇 번이나 문 앞을 서성였지만, 안으로 들어갈 용기는 차마 내지 못했다. 마음속 깊은 곳, 누구에게도 꺼내 보이지 못한 상처는 여전히 그녀를 좀먹고 있었다. 마치 뿌리째 뽑힌 화초처럼, 서윤은 메마른 일상을 겨우 버티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봄날 오후였다. 평소보다 일찍 퇴근한 서윤은 홀린 듯 ‘마음 정원’의 삐걱거리는 나무 문을 밀었다. 훅, 하고 끼쳐오는 흙냄새와 싱그러운 풀 내음. 그리고 그 모든 것을 감싸는 듯한 은은한 꽃향기가 마치 다른 세상에 온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화원 안은 생각보다 넓었고, 크고 작은..
창밖으로 나른한 햇살이 길게 늘어지던 오후 네 시. 우리 집 작은 거실에는 언제나처럼 은은한 홍차 향기가 감돌았다. 지수는 창가 흔들의자에 앉아 뜨개질을 하고 있었고, 나는 맞은편 소파에 기대앉아 오래된 소설책 페이지를 넘기고 있었다. 특별할 것 없는 일상이었지만, 그 어떤 화려한 순간보다 충만하고 평화로운 시간이었다. "현우 씨, 이 부분 문장이 참 좋네요. '우리는 모두 시간 여행자다. 매일 과거와 미래 사이를 오가며, 현재라는 아주 작은 점 위에 서 있을 뿐이라고.'" 지수가 뜨개질을 잠시 멈추고 나를 보며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오후 햇살처럼 따스했다. "음, 그러게. 마치 우리 이야기 같지 않아? 매일 오후 네 시, 이 시간만큼은 세상 모든 시름을 잊고 딱 이 순간에만 머무는 것 같잖아." 나..
차가운 바람이 옷깃을 파고드는 늦가을, 하영은 세상의 모든 온기가 자신만 비껴가는 것 같다고 느꼈다. 낡은 원룸 창밖으로 보이는 회색 도시 풍경처럼, 그녀의 삶도 빛바랜 흑백 사진 같았다. 몇 년 전 불의의 사고로 부모님을 잃고 홀로 짊어진 삶의 무게는 스물넷의 어깨에는 너무 버거웠다. 대학은 휴학한 지 오래였고, 닥치는 대로 아르바이트를 하며 하루하루를 버텨냈다. 웃음은 사치가 되었고, 눈물은 일상이 되었다. 그날도 편의점 야간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새벽 찬 공기를 가르며 집으로 향하던 길이었다. 골목길 모퉁이를 돌아서는데, 어디선가 잔잔한 기타 소리가 들려왔다. 소리를 따라 몇 걸음 옮기자, 가로등 불빛 아래 낡은 벤치에 앉아 기타를 치는 남자가 보였다. 그는 마치 바람처럼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은 ..
까만 밤하늘을 도화지 삼아 별들이 콕콕 박혀 있던 여름밤이었다. 열 살 남짓한 여자아이가 강가 풀밭에 쪼그리고 앉아 두 손을 꼭 모으고 있었다. 앳된 얼굴엔 간절함이 가득했다. "제발… 제발 우리 수호, 안 아프게 해주세요." 수현이었다. 얼마 전부터 시름시름 앓기 시작한 남동생 걱정에 어린 마음은 까맣게 타들어 가고 있었다. 오늘 밤 유성우가 쏟아진다는 라디오 방송을 듣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엄마 몰래 집을 빠져나온 참이었다. 별똥별에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다는 말을 철석같이 믿었던 게다. 그때, 하늘을 가로지르며 긴 꼬리를 그리는 별똥별 하나가 나타났다. "앗!" 수현은 저도 모르게 탄성을 내지르며 눈을 질끈 감았다. ‘우리 수호, 제발….’ 수현이 소원에 온 정신을 집중하는 동안, 조금 떨어진 나무..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는 시간, 복잡한 도심 속 낡은 골목길 어귀엔 작은 불빛 하나가 사람들을 기다린다. 간판이라곤 닳고 닳은 나무판에 서툰 글씨로 쓰인 ‘온기 한 조각’이 전부인 빵집. 주인 민준 씨는 오늘도 어김없이 앞치마를 두르고 갓 구운 빵 냄새를 골목 안에 가득 채운다. 이곳은 빵 맛도 일품이지만, 그보다는 민준 씨의 말없는 위로를 찾아오는 이들이 더 많았다. 그는 화려한 언변을 가진 사람은 아니었다. 그저 찾아오는 손님들의 지친 어깨를, 굳게 다문 입술을, 때로는 붉어진 눈시울을 가만히 바라봐 줄 뿐이었다. 그리고는 말없이, 그날따라 유독 손님의 마음 같아 보이는 빵 한 조각을 내밀곤 했다. "어서 와요, 지연 씨. 오늘 유독 발걸음이 무거워 보이네." 단골손님인 지연 씨가 핼쑥한 얼굴로 들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