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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성의 사랑은 언제나 소리 대신 형태로 존재했다. 삐걱거리던 지은의 현관문을 밤새 기름칠해 고쳐놓는 것으로, 그녀가 스치듯 예쁘다고 말했던 잡지 속 원목 책장을 똑같이 만들어주는 것으로, 말없이 그녀의 회사 앞에 찾아가 지친 퇴근길을 함께하는 것으로 그의 사랑은 완성되었다. 지은은 그런 태성의 언어를 처음엔 신기해했고, 다음엔 고마워했으며, 마침내는 조금씩 지쳐갔다. "오빠, 이거… 정말 예쁘다. 오빠가 만들어준 거니까 세상에 하나뿐인 거네." 삼 주년 기념일, 태성이 건넨 것은 그가 손수 깎아 만든 자작나무 보석함이었다. 매끄러운 나무의 결, 이음새 하나 보이지 않는 완벽한 마감. 그의 정성과 시간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하지만 지은이 정말로 바랐던 것은 서툰 글씨로 눌러쓴 카드 한 장이었다. "고마워..
새로 이사 온 낡은 빌라는 방음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곳이었다. 프리랜서 일러스트레이터인 민아에게 재택근무 공간은 세상에서 가장 조용해야 할 성역이었지만, 202호의 현실은 달랐다. 옆집 203호에서는 거의 매일 오후, 서툰 피아노 소리가 벽을 타고 넘어왔다. 같은 소절을 수십 번씩 반복하다가 엉뚱한 건반을 누르고, 그러다가는 갑자기 연주를 멈춰버리는 식이었다. "아, 진짜…!" 마감에 쫓기던 민아는 몇 번이고 옆집으로 달려가 멱살이라도 잡고 싶은 충동을 꾹꾹 눌러 참았다. 한 달이 넘도록 '엘리제를 위하여' 도입부만 반복하는 저 인내심 없는 연주자는 대체 누구일까. 그러던 어느 비 오는 날 오후였다. 그날따라 피아노 소리는 유독 절박하게 들렸다. 몇 번이고 엇나가는 음계에, 급기야 '쾅!' 하고 건반..
첫 번째 여름은 매미 소리와 짠 내 섞인 바람, 그리고 헌책방의 쿰쿰한 종이 냄새로 기억된다. 서울에서 잠시 도망치듯 내려온 서연은 작은 바닷가 마을의 낡은 서점 '시간의 책장'에서 지훈을 만났다. 무더위를 피해 들어간 그곳에서, 지훈은 낡은 시집의 먼지를 털며 서연에게 웃어 보였다. 그 웃음 하나에, 서연의 길고 지루할 것 같던 여름은 통째로 빛나기 시작했다. 둘은 자석처럼 서로에게 끌렸다. 함께 낡은 자전거를 타고 해안도로를 달렸고, 눅눅한 과자를 나눠 먹으며 밤바다의 파도 소리를 들었다. 지훈은 서연에게 자신이 가장 아끼는 초판본 시집을 보여주었고, 서연은 지훈에게 복잡한 도시의 삶과 자신의 작은 꿈들에 대해 이야기했다. 사랑은 예고 없이, 그러나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두 사람의 여름에 스며들었다..
바닥을 긁는 운동화 소리와 거친 숨소리만이 낡은 연습실을 채웠다. 밤 11시가 넘은 시간, 건물 전체에 불이 꺼지고 오직 혜림이 있는 3층 연습실에만 희미한 조명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거울 속의 자신은 땀으로 번들거렸고,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또 오디션에서 떨어졌다. 심사위원의 무심한 표정, ‘감정이 부족하다’는 평가는 날카로운 칼날이 되어 혜림의 심장을 후벼 팠다. "감정... 감정이라니. 내 모든 걸 쏟아붓고 있는데."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그녀는 다시 음악을 틀었다. 피아노 선율이 공간을 가득 메우자, 혜림은 몸을 움직였다. 하지만 몸은 천근만근 무거웠고, 동작은 자꾸만 삐걱거렸다. 바로 그때였다. 거울 속 자신의 등 뒤로, 아주 희미한 그림자 하나가 어른거리는 ..
도시의 잿빛 소음은 민준의 영혼을 갉아먹고 있었다. 몇 번의 낙방 끝에 겨우 들어간 회사는 그에게 성취감 대신 무력감만을 안겨주었고, 텅 빈 자취방에 홀로 돌아오면 세상에 오직 자기 혼자만 남겨진 듯한 고독이 습기처럼 스며들었다. 그는 도망치듯 휴가를 내고 고향으로 내려왔다. 특별한 계획은 없었다. 그저 어린 시절의 공기가 그리웠을 뿐이다. 오랜만에 찾은 강가는 여전했다. 나른한 오후의 햇살이 윤슬이 되어 강물 위에서 부서지고, 갈대숲은 바람의 결을 따라 부드럽게 몸을 눕혔다. 민준은 의미 없이 강변을 따라 걸었다. 그러다 문득, 발치에 놓인 유난히 희고 매끄러운 조약돌 하나에 시선이 멎었다. 손에 쥐자 기분 좋은 무게감과 함께 서늘한 감촉이 전해졌다. 그런데 돌의 표면에는 무언가 새겨져 있었다. 먹물..
그 사람은 늘 흐린 날에만 나타났다. 장마가 시작되면 어김없이 우리 동네 작은 도서관 창가 자리에 나타났고, 가을 안개가 자욱한 날이면 공원 벤치에 앉아있었다. 우리는 그렇게 만났다. 비 오는 날 함께 우산을 쓰고 걷거나, 잿빛 하늘 아래에서 말없이 커피를 마셨다. 그와 함께하는 시간은 고요하고, 편안했으며, 어딘지 모르게 애틋했다. "햇살 좋은 날은 뭐해요?" 언젠가 내가 넌지시 물었을 때, 그는 희미하게 웃으며 찻잔만 내려다볼 뿐이었다. "그냥… 할 일이 좀 있어서." 그의 세상엔 햇빛이 없는 것 같았다. 밝고 화창한 날이면 그는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연락처도, 사는 곳도 모르는 나는 그저 다음 흐린 날을 기다리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사람들은 그를 '흐린 날의 신사'라고 불렀지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