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바랜 다이어리 한 권이 수아의 손에 들려 있었다. 이사 준비로 몇 년 만에 열어본 낡은 상자 속에서, 마치 숨겨둔 보물처럼 발견된 것이었다.
표지에는 유치한 글씨체로 ‘우리가 무지개를 만나는 완벽한 방법!’이라고 적혀 있었다. 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다 까르르 웃던 어린 날의 수아와 지훈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세상에서 가장 높은 산 정상에서 소리 지르기’, ‘한여름 소나기 맨몸으로 맞으며 춤추기’, ‘새벽 두 시, 아무도 없는 바닷가에서 파도 소리 듣기’… 잊고 지냈던 순수했던 약속들이 빼곡했다.
마지막 장에는 ‘가장 좋아하는 사람과 마주 보고 웃기’라는, 어쩌면 가장 어려울지도 모르는 항목이 적혀 있었다. 수아는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터져 나왔지만, 이내 가슴 한구석이 아릿해져 왔다. 언제부터였을까. 이렇게 마음껏 웃어본 게.
“어, 수아야. 웬일이야, 이 시간에?”
때마침 걸려온 전화 너머로 익숙한 지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치 짜기라도 한 것처럼. 수아는 잠시 망설이다 다이어리 이야기를 꺼냈다.
“지훈아, 혹시 이거 기억나? 우리 어릴 때 같이 썼던 거.”
수화기 너머 지훈은 잠시 말이 없더니, 이내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야, 그걸 아직도 가지고 있었냐? 대박이다! 나 그거 완전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그러게 말이다. 근데… 이거 보니까 좀 이상하다, 기분이.”
“뭐가?”
“그냥… 그때는 참 별것도 아닌 거에 엄청 신나 했구나 싶어서.”
수아의 목소리가 살짝 잠기는 것을 지훈은 놓치지 않았다.
“수아야.”
“응?”
“우리, 그거 하러 갈까?”
“뭘?”
“그거, 다이어리에 적힌 거. 무지개 만나는 방법.”
수아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 현실에 치여 하루하루를 버티듯 살아가는 자신에게, 그런 낭만적인 여행은 사치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에서는 ‘혹시나’ 하는 작은 불씨가 타오르기 시작했다.
“미쳤냐? 우리가 애들도 아니고.”
퉁명스럽게 대답했지만, 목소리는 실치않고 기대하는 분위기였다.
“왜, 애들이면 안 돼? 어른은 그런 거 하면 안 되냐? 야, 핑계 대지 말고 가자. 응? 너 요즘 통 웃지도 않고, 맨날 땅만 보고 다니잖아. 내가 다 봤거든?”
지훈의 말에는 거부할 수 없는 따뜻함이 배어 있었다. 결국 수아는 작은 한숨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두 사람의 조금은 특별한, 어쩌면 무모한 여행이 시작되었다.
첫 번째 목적지는 리스트에 적힌 ‘세상에서 가장 높은 산’은 아니었지만, 제법 가파른 산이었다. 숨이 턱까지 차오르고 다리가 후들거렸지만, 지훈은 계속해서 농담을 던지며 수아의 등을 떠밀었다. 정상에 도착했을 때, 눈앞에 펼쳐진 풍경은 그동안의 힘듦을 단번에 잊게 할 만큼 아름다웠다. 수아는 자기도 모르게 작은 탄성을 내뱉었다.
“와… 좋다.”
“그치? 내가 뭐랬냐. 소리 한번 질러볼래?”
수아는 쑥스러워 고개를 저었지만, 지훈은 먼저 “야호!” 하고 우렁차게 소리를 질렀다. 그 모습에 수아도 용기를 내 작게나마 “야호…” 하고 따라 했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해방감이었다.
다음은 ‘한여름 소나기 맨몸으로 맞으며 춤추기’. 며칠을 기다렸을까, 거짓말처럼 장대비가 쏟아지던 날, 두 사람은 우산도 없이 거리로 나섰다. 처음에는 어색하게 서로 눈치만 보던 것도 잠시, 지훈이 먼저 아이처럼 팔을 벌리고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수아야, 뭐 해! 안 뛰어들고!”
빗줄기 사이로 지훈의 환한 웃음이 부서졌다. 그 모습에 수아도 홀린 듯 빗속으로 뛰어들었다. 차가운 빗방울이 온몸을 적셨지만, 이상하게도 상쾌했다. 잊고 지냈던 어린 시절의 기억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갔다. 까르르 웃으며 함께 비를 맞던, 아무 걱정 없던
그 시절. 수아는 정말 오랜만에 어린아이처럼 웃었다. 눈가에 맺힌 것이 빗물인지 눈물인지 알 수 없었다.
여행은 계속되었다. 새벽녘 안개가 자욱한 바닷가를 말없이 걷기도 하고, 낡은 필름 카메라로 서로의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담기도 했다.
함께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수아는 조금씩 마음의 문을 열기 시작했다. 지훈 앞에서는 굳이 괜찮은 척, 강한 척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지훈아.”
어느 날 밤, 모닥불 앞에 나란히 앉아 밤하늘의 별을 보고 있을 때였다.
“나 사실… 많이 힘들었어.”
수아의 목소리는 타닥거리는 불꽃 소리에 섞여 낮게 흘러나왔다.
“네가 보기엔 아무렇지 않아 보였겠지만, 사실 매일매일이 버거웠어. 웃는 법도 잊어버린 것 같았고, 내가 뭘 좋아하는지, 뭘 하고 싶은지도 모르겠더라.”
지훈은 말없이 수아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그의 손길에서 따뜻한 온기가 전해져 왔다.
“알아. 다 알아, 수아야.”
그 한마디에 수아는 그동안 애써 눌러왔던 감정들이 한꺼번에 터져 나오는 것을 느꼈다. 어깨에 얼굴을 묻고 한참을 울었다. 지훈은 아무 말 없이, 그저 묵묵히 그녀의 슬픔을 함께했다.
여행의 막바지, 리스트의 마지막 항목인 ‘가장 좋아하는 사람과 마주 보고 웃기’만을 남겨두고 있었다. 왠지 모를 긴장감이 두 사람 사이에 흘렀다. 그날따라 하늘은 잔뜩 흐려 있었고,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듯했다.
“우리… 이거 성공할 수 있을까?”
수아가 불안한 목소리로 물었다.
“왜 못해? 당연히 할 수 있지.”
지훈은 애써 밝게 대답했지만, 그의 눈빛도 살짝 흔들리고 있었다.
그때였다. 갑자기 세찬 바람과 함께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근처에는 비를 피할 만한 곳도 마땅치 않았다. 순식간에 두 사람은 흠뻑 젖어버렸다. 당황한 수아와 달리, 지훈은 젖은 머리를 아무렇게나 쓸어 넘기며 허탈하게 웃었다.
“이거… 완전 망했는데?”
그 모습에 수아도 그만 웃음이 터져 나왔다. 엉망진창이 된 서로의 모습을 보며, 그들은 한참을 그렇게 서서 웃었다. 마치 세상에 둘만 남은 것처럼.
빗줄기가 조금씩 잦아들 무렵, 거짓말처럼 먹구름 사이로 햇살 한 줄기가 비치더니, 저 멀리 하늘에 희미한 무지개가 떠올랐다. 선명하지는 않았지만, 분명 무지개였다.
“와… 지훈아, 저것 봐!”
수아가 아이처럼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지훈은 무지개보다 수아의 환한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젖은 머리카락이 뺨에 달라붙어 있었지만, 그 어느 때보다 아름다워 보였다.
“수아야.”
지훈이 조심스럽게 수아의 이름을 불렀다. 수아는 무지개에서 시선을 돌려 지훈을 바라보았다.
“우리, 마지막 항목 성공한 거지?”
지훈의 눈에는 따뜻한 미소가 가득했다. 수아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 순간, 비로소 깨달았다.
어쩌면 무지개를 만나는 가장 완벽한 방법은, 가장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어떤 순간이든 진심으로 웃을 수 있는 용기를 내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집으로 돌아오는 길, 두 사람 사이에는 편안한 침묵이 흘렀다. 수아의 마음은 어느 때보다 가볍고 따뜻했다. 잃어버렸던 감정들을 되찾았고, 그 옆에는 언제나처럼 든든한 지훈이 있었다.
진짜 무지개를 보았든 아니든, 그것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그들의 마음속에는 이미 일곱 빛깔 무지개가 선명하게 떠올라 있었으니까. 수아는 창밖을 바라보며 자신도 모르게 살며시 미소 지었다. 앞으로 펼쳐질 날들이, 왠지 모르게 기대되기 시작했다.
소설에 대한 심리학적 분석
- 행동 활성화 (Behavioral Activation): 지훈이 수아에게 여행을 제안하고 리스트의 활동들을 함께 수행하도록 이끈 것은 수아의 우울하고 무기력한 상태를 개선하기 위한 행동 활성화 기법으로 볼 수 있습니다. 수아는 처음에는 주저하고 "미쳤냐?"고 반문하지만, 지훈의 적극적인 권유와 함께 활동에 참여함으로써 점차 긍정적인 경험을 하고 활력을 되찾습니다. 이는 우울감을 느끼는 개인이 활동을 통해 보상적인 경험을 얻고 삶에 대한 참여를 늘려가는 과정을 잘 보여줍니다.
- 인지 재구성 (Cognitive Reframing): 수아는 처음 다이어리를 발견했을 때 과거의 순수함과 현재의 힘듦을 대비시키며 부정적인 감정을 느꼈습니다. 하지만 여행을 통해 지훈과 함께 어린 시절의 약속을 재해석하고, 비록 유치했던 계획들이었지만 그 과정에서 진정한 의미와 행복을 찾아가면서 삶과 관계에 대한 인지적 틀을 긍정적으로 재구성하게 됩니다. 특히 폭우 속에서 엉망이 된 상황을 함께 웃어넘기는 장면은 부정적인 사건을 긍정적인 경험으로 바꾸는 인지적 유연성을 보여줍니다.
- 사회적 지지 (Social Support)의 역할: 지훈은 수아가 힘든 시기를 겪을 때 중요한 사회적 지지망 역할을 합니다. 그는 단순히 수아의 말을 들어주는 것을 넘어, 직접적으로 여행을 제안하고 행동을 독려하며, 수아가 감정을 터뜨릴 때 묵묵히 곁을 지켜주는 등 다양한 형태로 지지를 제공합니다. 이러한 지훈의 존재는 수아가 고립감에서 벗어나 정서적인 안정감을 찾고, 자신의 문제를 극복할 수 있는 힘을 얻는 데 결정적인 요소로 작용합니다.
- 마음챙김 (Mindfulness)과 현재 중심의 삶: '새벽 두 시, 아무도 없는 바닷가에서 파도 소리 듣기', '한여름 소나기 맨몸으로 맞으며 춤추기'와 같은 활동들은 수아가 현재 순간에 온전히 집중하고 감각을 일깨우는 마음챙김 경험과 유사합니다. 과거의 아픔이나 미래의 불안에 갇혀 있던 수아는 이러한 활동들을 통해 현재의 경험에 몰입하며, 불필요한 생각들에서 벗어나 진정한 평온함과 즐거움을 느끼게 됩니다. 이는 현대인의 스트레스와 우울감을 줄이는 데 효과적인 방법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 자아 효능감 (Self-Efficacy)의 증진: 여행을 통해 수아는 점차 산을 오르고, 빗속에서 춤을 추는 등 이전에 상상하지 못했던 행동들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게 됩니다. 이러한 경험들은 "왜 못해? 당연히 할 수 있지"라고 격려하는 지훈의 말과 더불어 수아 스스로 무언가를 해낼 수 있다는 '자아 효능감'을 증진시킵니다. 높아진 자아 효능감은 그녀가 삶의 어려움에 직면했을 때 더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태도로 대처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 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