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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케팅 2팀의 공기는 늘 건조했다. 타자 소리와 서류 넘기는 소리, 그리고 가끔 들리는 업무 관련 용건이 전부였다. 우리는 서로의 실력은 인정했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회색 파티션처럼 우리 사이에도 보이지 않는 벽이 있었다. 그 벽의 한가운데쯤, 나 이대리가 있었다. 나는 조용히 내 할 일을 했고, 누구도 나를 주목하지 않았다. 투명인간이 된 것 같은 기분, 그게 나의 일상이었다. 그 건조한 사막에 돌멩이 하나가 날아든 것은 새로운 강 팀장님이 부임하면서부터였다. 활기 넘치는 그녀는 회의 첫날, 우리 모두를 어리둥절하게 만드는 프로젝트를 발표했다. 이름하여 ‘칭찬 샤워’ 프로젝트. “매주 금요일마다 한 명씩 돌아가며 주인공이 될 겁니다. 나머지 팀원들은 그 주인공에게 일주일간 관찰한 장점이나 고마웠던 ..
박 씨는 주말 아침마다 창밖으로 그들을 보는 게 영 마뜩잖았다. 알록달록한 운동복을 입은 사람들이 조깅을 하는 건 좋은데, 왜 허리를 숙여가며 남이 버린 쓰레기를 줍는단 말인가. 한 손엔 비닐봉지를, 다른 한 손엔 집게를 들고 땀 흘리는 모습은 어딘지 유별나 보였다. ‘참, 별난 사람들도 다 있어. 자기 집 앞이나 잘 쓸 것이지.’ 그는 혀를 차며 블라인드를 내렸다. 그 ‘별난 사람들’의 중심에는 늘 밝게 웃는 젊은 여자가 있었다. 나중에 동네 반상회에서 얼굴을 익히고 보니, 아랫집에 사는 김수진 씨였다. 그녀는 박 씨에게도 싹싹하게 인사하며 주말 아침 ‘줍깅 클럽’에 한번 나와보시라고 권했다. “에이, 나는 무릎이 안 좋아서 뛰지도 못해.” 박 씨는 손사래를 쳤다. 혼자 사는 그에게 주말 아침은 늦잠..
그 사람은 늘 흐린 날에만 나타났다. 장마가 시작되면 어김없이 우리 동네 작은 도서관 창가 자리에 나타났고, 가을 안개가 자욱한 날이면 공원 벤치에 앉아있었다. 우리는 그렇게 만났다. 비 오는 날 함께 우산을 쓰고 걷거나, 잿빛 하늘 아래에서 말없이 커피를 마셨다. 그와 함께하는 시간은 고요하고, 편안했으며, 어딘지 모르게 애틋했다. "햇살 좋은 날은 뭐해요?" 언젠가 내가 넌지시 물었을 때, 그는 희미하게 웃으며 찻잔만 내려다볼 뿐이었다. "그냥… 할 일이 좀 있어서." 그의 세상엔 햇빛이 없는 것 같았다. 밝고 화창한 날이면 그는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연락처도, 사는 곳도 모르는 나는 그저 다음 흐린 날을 기다리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사람들은 그를 '흐린 날의 신사'라고 불렀지만, ..
그를 처음 만난 건, 계절의 경계가 희미해지던 어느 늦가을, 잔뜩 찌푸린 하늘 아래에서였습니다. 우산을 깜빡한 내 머리 위로 커다란 검은 우산을 기울여준 사람. 지후 씨. 우리는 그렇게 흐린 날에만 만나는 이상한 연인이 되었습니다. 그는 비가 오거나, 구름이 해를 전부 가려 세상이 온통 무채색으로 변한 날에만 나에게 연락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나란히 걸었습니다. 젖은 흙냄새와 도시의 소음이 멀게만 느껴지는 우리만의 시간 속에서, 그의 낮은 목소리를 듣는 것이 좋았습니다. 그는 세상의 모든 재미있는 이야기를 아는 사람처럼 막힘없이 즐거운 이야기들을 풀어놓았지만, 정작 자기 자신에 대한 이야기는 철저히 숨겼습니다. “지후 씨는 왜 흐린 날만 좋아해요?” 언젠가 툭, 하고 던진 내 질문에 그의 얼굴에 스치..
쨍쨍 내리쬐는 여름 햇살 아래, '초록빛 여름 캠프' 현수막이 풋풋한 설렘처럼 나부끼고 있었다. 스무 살, 처음으로 자원봉사에 나선 민재는 아이들 틈에서 어색하게 웃으며 땀을 삐질삐질 흘렸다. 그때, 누군가 그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저기요, 조끼 똑바로 입으셔야죠. 그리고 이름표도 삐뚤어졌거든요?" 까칠한 목소리의 주인공은 단정하게 묶은 머리에 야무진 눈매를 가진 다인이었다. 그녀 역시 자원봉사자 조끼를 입고 있었지만, 민재와는 달리 모든 것이 각 잡힌 모습이었다. "아, 네. 죄송합니다." 민재는 멋쩍게 웃으며 옷매무새를 바로잡았다. "죄송할 것까진 없고요. 아이들 보기 전에 기본은 지켜야죠." 다인의 말은 칼같이 정확했지만, 어딘지 모르게 날이 서 있었다. 그렇게 민재와 다인의 첫 만남은 싱그러..
"어이쿠, 사장님. 오늘도 요 창가 자리는 여전히 비어 있네?" 단골 김 씨 아저씨가 계산을 하며 넌지시 물었다. 벌써 5년째, 수현의 작은 한식당 ‘엄마 손맛’의 창가 자리는 늘 그렇게 비어 있었다. 예약석 팻말이 놓여 있는 것도 아닌데, 신기하게도 아무도 선뜻 그 자리에 앉으려 하지 않았다. 마치 보이지 않는 누군가가 이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처럼. 수현은 희미하게 웃으며 늘 같은 대답을 반복했다. "네, 아저씨. 기다리는 사람이 있어서요." 김 씨 아저씨는 더 이상 묻지 않고 고개를 끄덕이며 가게를 나섰다. 기다리는 사람. 그 사람은 바로 5년 전, 빗길 교통사고로 허망하게 세상을 떠난 남편, 민준이었다. 민준은 유독 그 창가 자리를 좋아했다. 햇살이 따스하게 들어오는 오후, 그 자리에 앉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