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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닥을 긁는 운동화 소리와 거친 숨소리만이 낡은 연습실을 채웠다. 밤 11시가 넘은 시간, 건물 전체에 불이 꺼지고 오직 혜림이 있는 3층 연습실에만 희미한 조명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거울 속의 자신은 땀으로 번들거렸고,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또 오디션에서 떨어졌다. 심사위원의 무심한 표정, ‘감정이 부족하다’는 평가는 날카로운 칼날이 되어 혜림의 심장을 후벼 팠다. "감정... 감정이라니. 내 모든 걸 쏟아붓고 있는데."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그녀는 다시 음악을 틀었다. 피아노 선율이 공간을 가득 메우자, 혜림은 몸을 움직였다. 하지만 몸은 천근만근 무거웠고, 동작은 자꾸만 삐걱거렸다. 바로 그때였다. 거울 속 자신의 등 뒤로, 아주 희미한 그림자 하나가 어른거리는 ..
도시의 잿빛 소음은 민준의 영혼을 갉아먹고 있었다. 몇 번의 낙방 끝에 겨우 들어간 회사는 그에게 성취감 대신 무력감만을 안겨주었고, 텅 빈 자취방에 홀로 돌아오면 세상에 오직 자기 혼자만 남겨진 듯한 고독이 습기처럼 스며들었다. 그는 도망치듯 휴가를 내고 고향으로 내려왔다. 특별한 계획은 없었다. 그저 어린 시절의 공기가 그리웠을 뿐이다. 오랜만에 찾은 강가는 여전했다. 나른한 오후의 햇살이 윤슬이 되어 강물 위에서 부서지고, 갈대숲은 바람의 결을 따라 부드럽게 몸을 눕혔다. 민준은 의미 없이 강변을 따라 걸었다. 그러다 문득, 발치에 놓인 유난히 희고 매끄러운 조약돌 하나에 시선이 멎었다. 손에 쥐자 기분 좋은 무게감과 함께 서늘한 감촉이 전해졌다. 그런데 돌의 표면에는 무언가 새겨져 있었다. 먹물..
마케팅 2팀의 공기는 늘 건조했다. 타자 소리와 서류 넘기는 소리, 그리고 가끔 들리는 업무 관련 용건이 전부였다. 우리는 서로의 실력은 인정했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회색 파티션처럼 우리 사이에도 보이지 않는 벽이 있었다. 그 벽의 한가운데쯤, 나 이대리가 있었다. 나는 조용히 내 할 일을 했고, 누구도 나를 주목하지 않았다. 투명인간이 된 것 같은 기분, 그게 나의 일상이었다. 그 건조한 사막에 돌멩이 하나가 날아든 것은 새로운 강 팀장님이 부임하면서부터였다. 활기 넘치는 그녀는 회의 첫날, 우리 모두를 어리둥절하게 만드는 프로젝트를 발표했다. 이름하여 ‘칭찬 샤워’ 프로젝트. “매주 금요일마다 한 명씩 돌아가며 주인공이 될 겁니다. 나머지 팀원들은 그 주인공에게 일주일간 관찰한 장점이나 고마웠던 ..
박 씨는 주말 아침마다 창밖으로 그들을 보는 게 영 마뜩잖았다. 알록달록한 운동복을 입은 사람들이 조깅을 하는 건 좋은데, 왜 허리를 숙여가며 남이 버린 쓰레기를 줍는단 말인가. 한 손엔 비닐봉지를, 다른 한 손엔 집게를 들고 땀 흘리는 모습은 어딘지 유별나 보였다. ‘참, 별난 사람들도 다 있어. 자기 집 앞이나 잘 쓸 것이지.’ 그는 혀를 차며 블라인드를 내렸다. 그 ‘별난 사람들’의 중심에는 늘 밝게 웃는 젊은 여자가 있었다. 나중에 동네 반상회에서 얼굴을 익히고 보니, 아랫집에 사는 김수진 씨였다. 그녀는 박 씨에게도 싹싹하게 인사하며 주말 아침 ‘줍깅 클럽’에 한번 나와보시라고 권했다. “에이, 나는 무릎이 안 좋아서 뛰지도 못해.” 박 씨는 손사래를 쳤다. 혼자 사는 그에게 주말 아침은 늦잠..
그 사람은 늘 흐린 날에만 나타났다. 장마가 시작되면 어김없이 우리 동네 작은 도서관 창가 자리에 나타났고, 가을 안개가 자욱한 날이면 공원 벤치에 앉아있었다. 우리는 그렇게 만났다. 비 오는 날 함께 우산을 쓰고 걷거나, 잿빛 하늘 아래에서 말없이 커피를 마셨다. 그와 함께하는 시간은 고요하고, 편안했으며, 어딘지 모르게 애틋했다. "햇살 좋은 날은 뭐해요?" 언젠가 내가 넌지시 물었을 때, 그는 희미하게 웃으며 찻잔만 내려다볼 뿐이었다. "그냥… 할 일이 좀 있어서." 그의 세상엔 햇빛이 없는 것 같았다. 밝고 화창한 날이면 그는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연락처도, 사는 곳도 모르는 나는 그저 다음 흐린 날을 기다리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사람들은 그를 '흐린 날의 신사'라고 불렀지만, ..
그를 처음 만난 건, 계절의 경계가 희미해지던 어느 늦가을, 잔뜩 찌푸린 하늘 아래에서였습니다. 우산을 깜빡한 내 머리 위로 커다란 검은 우산을 기울여준 사람. 지후 씨. 우리는 그렇게 흐린 날에만 만나는 이상한 연인이 되었습니다. 그는 비가 오거나, 구름이 해를 전부 가려 세상이 온통 무채색으로 변한 날에만 나에게 연락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나란히 걸었습니다. 젖은 흙냄새와 도시의 소음이 멀게만 느껴지는 우리만의 시간 속에서, 그의 낮은 목소리를 듣는 것이 좋았습니다. 그는 세상의 모든 재미있는 이야기를 아는 사람처럼 막힘없이 즐거운 이야기들을 풀어놓았지만, 정작 자기 자신에 대한 이야기는 철저히 숨겼습니다. “지후 씨는 왜 흐린 날만 좋아해요?” 언젠가 툭, 하고 던진 내 질문에 그의 얼굴에 스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