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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한마디 없이, 오 년을 쌓아온 마음이 세상에는 말보다 확실한 약속이 있다.매일 같은 시간, 같은 자리에 서 있어 주는 것.그것만으로도 충분한 사이가, 세상에는 있다.6시 40분, 유리 너머의 인사카페 '온기'의 창가 자리에는, 저녁 6시 40분이 되면 어김없이 벌어지는 작은 의식이 있었다. 오은채는 그 시간이 다가오면 하던 일을 멈추고 창가 테이블을 정리했다.딱히 정리할 게 없어도 행주로 테이블을 한 번 더 닦았다.을지로 뒷골목, 세 평 남짓한 이 작은 카페의 통유리창 너머로 사람들이 하루에도 수백 명씩 지나갔지만, 은채가 정말로 기다리는 사람은 단 한 명이었다. 정확히 6시 40분이면, 회색 코트를 입은 한 남자가 골목 끝에서 나타났다.회사원인 듯 늘 단정한 셔츠에 넥타이를 반쯤 풀어헤친 차림이었다..
아무도 모르게 가꾼 마음이, 서로에게 닿기까지그 정원의 존재를 아는 사람은, 이 건물 전체에서 딱 한 명뿐이었다.그런데 8월의 어느 밤, 그 숫자가 둘로 늘어났다.잠들지 못하는 밤이수아는 요즘 잠을 자지 않는 게 아니라, 잠들지 못했다.성북동 언덕길, 5층짜리 낡은 상가주택 '미래빌'의 3평짜리 옥탑 원룸.다니던 디자인 스튜디오를 그만두고 다음 자리를 찾는 동안만 머물기로 한 곳이었다.원래 살던 오피스텔보다 월세가 절반이었고, 무엇보다 아무도 수아를 몰랐다. 그게 지금은 제일 필요한 조건이었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지 여섯 달이 지났다.초등학생 때부터 방학마다 할머니 집 옥상 화단에서 봉숭아 물을 들이고 상추를 땄던 기억이, 장례식장에서는 이상하게 하나도 떠오르지 않았다.사람들은 수아를 보며 "씩씩하다"고..
신발을 벗어야만, 비로소 보이는 것들그날 밤 서연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구두를 손에 들고 걸었다.발바닥에 닿는 아스팔트는 아직 낮의 열기를 다 내려놓지 못한 채 미지근했다.장마가 막 끝난 밤이었고, 길은 젖어 있었다.그 축축하고 미지근한 감촉이, 이상하게도 서연을 조금씩 제정신으로 돌려놓고 있었다.구두를 벗어 던진 밤세 시간 전, 서연은 회의실 한가운데 서 있었다. "이번 캠페인 실패는, 결국 서연 대리 책임이라고 봐야죠." 본부장의 말이었다.사실이 아니었다.시안을 뒤집은 건 클라이언트였고, 일정이 꼬인 건 위에서 컨펌을 두 번이나 미룬 탓이었다.하지만 그 자리에서 서연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대신 늘 그래왔듯, 입꼬리를 정확히 15도쯤 끌어올리며 말했다. "제가 더 꼼꼼히 챙겼어야 했는데, 죄송합니다..
속도가 다른 두 사람이, 같은 결승선에서 만난 이야기다은은 이번에도 꼴찌였다.정확히는 꼴찌에서 세 번째였다.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날은 조금도 억울하지 않았다.억울하지 않았던 이유를, 이 글을 읽는 당신에게 처음부터 천천히 들려주고 싶다.언제나, 대열의 맨 끝새벽 다섯 시 반, 탄천은 아직 어두웠다.대학 러닝 동아리 '달리다'의 아침 훈련은 언제나 이 시간에 시작됐고, 언제나 같은 순서로 끝났다.제일 먼저 들어오는 건 지호였고, 제일 늦게 들어오는 건 다은이었다. "하다은, 오늘도 꼴찌네." 동기 세아가 웃으며 던진 말에 악의는 없었다.그냥 사실이었으니까. 다은은 숨을 몰아쉬며 억지로 입꼬리를 올렸다.이 년째 이러고 있었다.남들은 페이스를 이야기하고 기록을 이야기할 때, 다은은 그저 완주를, 그러니까 멈추지..
부제: 우리는 같은 계절을 세 번 지나고서야, 비로소 서로를 알아보았다. 1부. 첫 번째 계절 — 봄, 우리가 친구였을 때스무 살의 봄은 벚꽃보다 먼저 도윤의 웃음소리로 기억됐다. 하은은 그날을 정확히 기억한다.대학교 중앙도서관 앞, 만개한 벚나무 아래서 우산도 없이 벚꽃비를 맞고 있던 자신에게 누군가 반으로 접은 신문지를 내밀었다. "이거라도 쓰세요. 꽃잎은 낭만적인데, 감기는 안 낭만적이라서요."도윤이었다.같은 과, 다른 반. 그날 이후 두 사람은 어쩐지 자연스럽게 붙어 다니는 사이가 되었다. 친구라는 이름은 참 편리했다.손을 잡지 않아도 나란히 걸을 수 있었고, 마음을 숨기지 않아도 매일 만날 수 있었다. 도윤은 하은이 좋아하는 커피가 뭔지 알았고, 하은은 도윤이 시험 전날마다 불안해하며 손톱을 물..
1부. 피아노가 있는 방하람의 세계는 언제나 소리로 채워져 있었다.아침에는 냉장고 모터가 낮게 웅웅거리는 소리로 눈을 떴고, 등굣길에는 골목 어귀 붕어빵 틀이 지글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걸었다. 그리고 저녁이면, 낡은 업라이트 피아노 앞에 앉아 손끝으로 하루를 정리했다.하람에게 피아노는 취미가 아니라 언어였다.말로 다 못 한 감정은 언제나 건반 위에서 완성됐다. 스물여섯. 동네 작은 음악학원에서 아이들에게 피아노를 가르치며, 밤에는 혼자 작은 곡을 만드는 게 하람의 낙이었다.특별할 것 없는 삶이었지만, 그 평범함 안에는 늘 소리가 있었고, 소리가 있는 한 하람은 외롭지 않았다. 그날도 여느 날과 다르지 않았다.학원 수업을 마치고 자전거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던 저녁, 신호를 무시하고 달려온 트럭이 하람의 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