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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고된 밤, 택시 안에서 되살아난 아버지의 목소리해체 통보 받은 밤극장 로비의 불이 반쯤 꺼진 채 깜빡이고 있었고, 성우는 대표의 말이 끝났는데도 한참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월급 통장도, 다음 작품 큐시트도, 모든 게 오늘 자정을 기점으로 사라질 참이었다.그는 팔년째 작은 극단 초록무대의 사운드 디렉터였다. 가난한 극단이었지만 음향 큐 하나에도 밤을 새우며 매달렸고, 가방 안엔 늘 손바닥만 한 배터리 스피커를 넣고 다녔다. 클라이언트 앞에서 급히 소리를 들려줘야 할 때를 위해서였는데, 오늘 밤엔 그게 다른 용도로 쓰일 줄은 몰랐다.그에게는 소박한 꿈이 하나 있었다. 언제고 자기 이름을 건 작은 스튜디오를 열어서, 라디오 성우였던 아버지가 남긴 릴 테이프를 가장 좋은 스피커로 다시 틀어주는 것. 하지만..
10년 만에 찾아간 요양병원, 할머니가 날 못 알아봤다오디션 전날 밤, 걸려온 전화서울 변두리, 열 평도 채 안 되는 지하 연습실에서 정진은 밤 열한 시가 넘도록 첼로를 내려놓지 못했다. 내일 오후면 시립교향악단 수석 오디션이었고, 삼 년을 기다려온 자리였기에 활을 쥔 손끝이 자꾸만 땀으로 축축하게 젖어왔다. 좁은 방 안에는 악보 뭉치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고, 창문 하나 없는 벽을 타고 울리는 첼로 소리만이 자정을 향해 가는 시간을 대신 알려주고 있었다. 어릴 때 그를 키운 건 부모가 아니라 시골 할머니였고, 할머니는 밤마다 머리를 쓰다듬으며 낮은 목소리로 자장가를 불러주곤 했다.그 노래를 들으며 새근새근 잠들던 밤들이 분명 있었는데, 지금은 할머니와 10년째 제대로 말 한 번 섞어본 적이 없다는 생각..
가게 인수 마감 열흘 전, 외상 장부 속 이름 하나7년째 야간 알바, 별빛마트 인수를 꿈꾸다밤 열한 시, 윤지원은 삼각김밥 진열대를 정리하다 핸드폰 메모장을 흘깃 봤다. '인수 서류 마감 D-10.' 손끝이 가늘게 떨렸다. 7년째 야간 알바로 지켜온 이 작은 가게, 별빛마트를 이제 정말 자기 손으로 가질 수 있을지, 가슴이 쿵쿵 뛰었다.스물아홉, 지원은 대학을 졸업하고도 취업 문턱에서 번번이 미끄러졌다. 그 사이 생계를 이은 건 이 편의점 야간 근무였고, 어느새 '내 가게 하나 갖고 싶다'는 바람은 농담이 아니라 진짜 꿈이 되어 있었다. 손님들 얼굴도, 재고 순서도, 한밤중 손님이 끊기는 시각까지 다 외워버린 가게였다.가게 주인 조영달 사장은 예순둘, 몇 해 전 심장 수술을 받고부터 몸이 예전 같지 않았..
항암 끝낸 그녀, 새벽 빵집 앞에서 멈춰 섰다꽃집 셔터를 내린 여자, 손끝의 저림유방암 2기 수술을 받고 여덟 번의 항암 주사까지 끝낸 지 벌써 여덟 달째였지만, 서윤아는 여전히 꽃집 셔터를 반도 올리지 못한 채 하루를 시작했다. 손끝은 하루에도 몇 번씩 저릿저릿했고, 찬물에 꽃대를 다듬다 보면 작은 가위조차 철퍼덕 바닥으로 떨어뜨리는 일이 잦았다. 한때는 새벽마다 동네 빵집 앞을 지나며 갓 구운 빵 냄새에 배를 채우고 출근하던, 그 흔한 아침이 이제는 먼 옛날의 풍경처럼 느껴졌다.거울 앞에 서는 것조차 버거워, 윤아는 하루 종일 커튼을 쳐두고 모자와 스카프로 머리를 가린 채 지냈다. 수술 자국이 당길 때마다 숨이 턱 막혔고, 사람들 눈을 마주치는 일이 두려워 장도 늘 인터넷으로만 봤다. 열다섯 살 딸 ..
이사 가던 날, 고양이가 사라진 그 밤다섯 해를 함께한 두부, 새 보금자리로 이사하던 날연주는 다섯 해 동안 한 몸처럼 붙어 지낸 고양이 두부와 함께, 드디어 넓은 집으로 이사하는 날 아침을 맞았다. 프리랜서 일러스트레이터로 살아온 지난 몇 년, 반려동물을 받아주는 전셋집을 구하는 일이 얼마나 까마득한지는 발품을 팔아 본 사람만 안다며, 연주는 몇 달을 돌고 돌아 겨우 이 집을 찾아낸 참이었다. 두부는 유난히 좁고 어두운 틈을 좋아해서 책장 뒤나 서랍 사이처럼 몸 하나 겨우 들어갈 공간에 쏙 들어가 몇 시간이나 나오지 않는 버릇이 있었는데, 짐을 싸다가 두부가 가장 좋아하는 낡은 방석을 발견했을 때는 버릴까 말까 한참을 고민하다가 결국 이삿짐 상자 맨 위에 슬쩍 올려 두었다. 모서리가 다 닳고 색도 바랜..
27년 만에 만난 군대 동기, 내 졸업식을 지켜주다경비실 야간 순찰, 7년 미뤄온 졸업식쿵, 철문이 닫히는 소리에 강태윤은 흠칫 어깨를 움츠렸다. 새벽 세 시, 열한 해째 지키고 있는 아파트 경비실에서 나와 야간 순찰을 돌던 그의 손전등 불빛이 주차장 바닥을 천천히 훑고 지나갔다. 올해로 쉰셋, 틈틈이 다닌 사이버대학 사회복지학과도 어느새 7년 만에 졸업을 앞두고 있었는데, 졸업식 날짜가 적힌 문자 한 통이 휴대폰 화면에 떠 있었지만 그는 선뜻 그것을 열어보지 못하고 한참을 들여다보기만 했다. 가을바람이 목덜미를 스칠 때마다 괜히 가슴 한쪽이 서늘해지는 밤이었다.상업고등학교 2학년 봄, 공사장에서 아버지가 쓰러졌다는 전화를 받은 뒤로 태윤은 그대로 책가방을 내려놓고 생활비를 벌러 나섰다. 그날의 선택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