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쨍쨍 내리쬐는 여름 햇살 아래, '초록빛 여름 캠프' 현수막이 풋풋한 설렘처럼 나부끼고 있었다. 스무 살, 처음으로 자원봉사에 나선 민재는 아이들 틈에서 어색하게 웃으며 땀을 삐질삐질 흘렸다. 그때, 누군가 그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저기요, 조끼 똑바로 입으셔야죠. 그리고 이름표도 삐뚤어졌거든요?" 까칠한 목소리의 주인공은 단정하게 묶은 머리에 야무진 눈매를 가진 다인이었다. 그녀 역시 자원봉사자 조끼를 입고 있었지만, 민재와는 달리 모든 것이 각 잡힌 모습이었다. "아, 네. 죄송합니다." 민재는 멋쩍게 웃으며 옷매무새를 바로잡았다. "죄송할 것까진 없고요. 아이들 보기 전에 기본은 지켜야죠." 다인의 말은 칼같이 정확했지만, 어딘지 모르게 날이 서 있었다. 그렇게 민재와 다인의 첫 만남은 싱그러..
"어이쿠, 사장님. 오늘도 요 창가 자리는 여전히 비어 있네?" 단골 김 씨 아저씨가 계산을 하며 넌지시 물었다. 벌써 5년째, 수현의 작은 한식당 ‘엄마 손맛’의 창가 자리는 늘 그렇게 비어 있었다. 예약석 팻말이 놓여 있는 것도 아닌데, 신기하게도 아무도 선뜻 그 자리에 앉으려 하지 않았다. 마치 보이지 않는 누군가가 이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처럼. 수현은 희미하게 웃으며 늘 같은 대답을 반복했다. "네, 아저씨. 기다리는 사람이 있어서요." 김 씨 아저씨는 더 이상 묻지 않고 고개를 끄덕이며 가게를 나섰다. 기다리는 사람. 그 사람은 바로 5년 전, 빗길 교통사고로 허망하게 세상을 떠난 남편, 민준이었다. 민준은 유독 그 창가 자리를 좋아했다. 햇살이 따스하게 들어오는 오후, 그 자리에 앉아 ..
지유의 세상은 언제나 타인의 감정이라는 옅은 안개로 뒤덮여 있었다. 그녀의 귀는 다른 사람의 한숨 소리에 유난히 밝았고, 그녀의 눈은 미간에 잡히는 미세한 주름을 기가 막히게 포착했다. 그래서 ‘괜찮아’는 지유의 오랜 습관이자, 거의 반사적으로 튀어나오는 말버릇이었다. 괜찮지 않을 때조차도. “지유 씨, 미안한데 주말에 이 클라이언트 건 좀 맡아줄 수 있을까? 내가 급한 집안일이 생겨서.” 금요일 오후, 퇴근을 삼십 분 앞두고 팀장이 난처한 얼굴로 다가왔다. 지유의 머릿속에서는 주말 내내 보기로 약속했던 영화와, 새로 산 책과, 모처럼의 늦잠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갔다. 입술이 떨어지기 전, 수만 가지 생각이 오갔다. ‘팀장님도 오죽하면 나한테 부탁하시겠어. 집안에 무슨 일 있으신가 보네. 내가 조금..
세상의 모든 소리가 빨려 들어간 진공관 속에 사는 것 같았다. 사고로 목소리를 잃은 후, 내 세상은 그렇게 변했다. 웃음소리, 울음소리, 심지어 나지막한 한숨 소리마저도 과거의 유물이 되어버렸다. 나는 낡고 먼지 쌓인 책들이 주인을 기다리는 작은 헌책방, ‘시간의 책장’에서 일했다. 손님과의 소통은 계산대 위에 놓인 작은 화이트보드와 펜이 전부였다. ‘안녕하세요’, ‘7,000원입니다’, ‘안녕히 가세요’. 내 언어는 그게 다였다. 그 남자가 처음 책방에 들어온 건, 쌀쌀한 바람이 옷깃을 여미게 하던 늦가을이었다. 그는 책방의 분위기처럼 말이 없었다. 훤칠한 키에 단단해 보이는 손, 무심한 듯 보이지만 무언가를 깊이 관찰하는 듯한 눈빛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는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책장 사이를 묵묵히..
낡은 트럭 한 대가 먼지를 풀풀 날리며 비포장도로를 힘겹게 나아갔다. 이름 모를 풀들만이 간간이 고개를 내미는 황량한 땅, 최근까지도 포성이 간간이 들려왔다는 국경 마을로 향하는 '희망'이라 불리는 이동 진료소였다. 운전대를 잡은 베테랑 의사 한지우의 옆얼굴엔 고단함과 함께 익숙한 긴장감이 서려 있었다. 뒷좌석에서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던 신입 간호사 사라는 마른침을 삼켰다. 이번이 그녀의 첫 파견이었다. "너무 긴장하지 마, 사라. 우린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러 가는 거야.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야." 지우의 낮은 목소리가 차 안의 무거운 공기를 가르며 사라에게 가닿았다. 사라는 애써 미소를 지어 보였지만, 떨리는 눈빛까지 감추진 못했다. 그녀의 푸른 눈동자에는 두려움과 함께 알 수 없는 사..
달빛마을은 언제부터인가 조금 특별한 곳이 되었다. 여느 시골 마을처럼 평화롭고 조용했지만, 어쩐지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전보다 더 자주, 더 크게 울려 퍼졌다. 시작은 정말 사소했다. 어느 추운 겨울 아침, 마을에서 제일 연세가 많으신 최 할아버지 댁 문 앞이었다. 늘 아침 일찍 산책을 나서는 할아버지는 현관 앞에 놓인 작은 보따리를 보고는 눈을 비볐다. 보따리 안에는 포근한 손뜨개 무릎담요와 함께 삐뚤빼뚤한 글씨로 쓰인 메모가 들어있었다. "할아버지, 감기 조심하세요!" 할아버지는 헛웃음을 짓다가 이내 눈시울이 붉어졌다. 누가 이런 걸 놓고 갔을까? 며칠 뒤, 육아에 지쳐 늘 피곤해 보이던 젊은 엄마 이 아주머니 집 앞에는 갓 구운 듯 따끈한 쿠키 한 봉지와 "육아 힘내세요! 엄마는 위대해요"라는 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