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728x90
먼지 쌓인 할아버지의 라디오 수리점은 마치 시간이 멈춘 섬 같았다. 스무 평 남짓한 공간에는 온갖 종류의 낡은 라디오와 부품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민준은 코를 킁킁거리며 오래된 나무와 먼지, 그리고 희미하게 남은 납땜 냄새를 맡았다. 이 가게를 정리하는 것은 생각보다 훨씬 고된 일이었다. 그가 어릴 적, 할아버지는 늘 이 작은 공간에서 라디오와 씨름하며 세월을 보냈었다. 한쪽 구석, 빛바랜 천에 덮인 채 잊혀진 듯 놓여 있는 라디오 하나가 민준의 눈길을 끌었다. 투박한 나무 상자에 커다란 다이얼 두 개, 그리고 정체를 알 수 없는 작은 스위치들이 달린, 그야말로 골동품이었다. “이건 또 뭐람.” 민준은 호기심에 천을 걷어내고 전원 코드를 찾아 꽂았다. 지지직거리는 소음과 함께 희미하게 불이 들..
갯내음보다 먼저 한숨이 마중 나오는 작은 바닷가 마을 ‘물마루’. 한때는 검은 바다를 누비는 해녀들의 숨비소리로 새벽을 열던 곳이었지만, 이제는 텅 빈 테왁만이 늙은 해녀들의 주름진 손처럼 처량하게 나뒹굴었다. 마지막 남은 해녀들마저 물질을 접는다는 소식에 마을은 묵직한 슬픔에 잠겼다. 그 중심엔 평생을 바다에 바친 강순옥 할머니가 있었다. 꼬장꼬장한 성품 뒤에 누구보다 깊은 바다 사랑을 품은 그녀였다. “이대로 우리 대에서 해녀 맥이 끊기게 내버려 둘 수는 없어.” 어느 날, 순옥 할머니의 낮은 목소리가 마을 회관에 모인 몇 안 되는 늙은 해녀들 사이에 울려 퍼졌다. “해녀 학교를 열어야겠어. 우리 숨비소리, 우리 삶의 지혜, 젊은 것들한테 넘겨주고 가야지 않겠나.” 처음엔 반신반의하던 동료 해녀..
창문을 열면 훅, 하고 끼쳐오는 초여름의 냄새가 있다. 그 속에는 분명 라일락의 달콤한 향도 섞여 있을 터였다. 한때 음악 교사였던 정연우는 그 향기를 맡을 때마다 가슴 한구석이 아릿하게 저려왔다. 몇 해 전, 사소하지만 깊은 상처를 준 어떤 사건 이후로 그는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 극도로 힘겨워졌다. 대인기피증. 병원에서 내려준 진단명은 그의 삶을 작은 방 안에 가두는 주문과도 같았다. 그의 유일한 외출은 인적이 드문 시간을 골라 동네 공원을 잠시 걷는 것이었다. 그날도 여느 때처럼, 그는 공원 한쪽에 흐드러지게 핀 라일락 나무 근처 벤치에 무심코 시선을 던졌다. 그리고 발견했다. 매일 같은 시간, 같은 자리에 앉아 책을 읽는 한 여자를. 연보랏빛 원피스가 라일락 꽃잎과 닮아 보였다. 여자의 이름은 ..
밤의 장막이 잔별리 해변을 포근히 감싸 안을 때면, 파도 소리만이 낮게 속삭이는 그곳에 외딴 등불 하나가 외로이 깜빡였다. ‘소원 가게’. 간판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소박한 나무 조각에 투박하게 새겨진 글씨였다. 이 가게는 해가 수평선 아래로 완전히 몸을 숨긴 뒤에야 슬며시 문을 열었고, 동이 트기 무섭게 흔적도 없이 사라지곤 했다. 가게 주인은 윤슬 할머니라 불렸다. 진짜 이름인지, 아니면 반짝이는 잔물결 같은 그녀의 눈빛 때문에 붙은 별명인지는 아무도 몰랐다. 하얀 쪽머리에 해맑은 미소를 머금은 할머니는, 가게를 찾는 손님들에게 값을 매길 수 없는 신기한 물건들을 내어주었다. 그 대가는 돈이 아니었다. “다른 사람을 위한 진심 어린 소원 하나면 족합니다.” 할머니는 늘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그리 말..
낡은 가로등 불빛만이 희미하게 길을 밝히는 밤이었다. 수현은 하루의 무게를 어깨에 짊어진 채 공원 벤치에 힘없이 주저앉았다. 푸석한 얼굴 위로 허공을 응시하는 눈동자에는 깊은 고단함이 서려 있었다. 고개를 들자, 검푸른 하늘 한가운데에 은쟁반 같은 달이 휘영청 떠 있었다. 마치 그녀의 마음을 다 안다는 듯, 말없이 부드러운 빛을 쏟아내고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옆자리에 누군가 앉는 기척에 수현은 살짝 고개를 돌렸다. 중년으로 보이는 남자가 조금 떨어진 곳에 조용히 앉아, 그녀처럼 달을 바라보고 있었다. 처음 며칠은 서로의 존재가 어색하게 느껴졌다. 괜히 헛기침을 하기도 하고, 시선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몰라 달만 뚫어지게 쳐다보기도 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그 침묵은 어느새 익숙한 풍경..
낡은 버스 ‘책갈피호’는 오늘도 덜컹거리며 비포장도로를 달렸다. 운전대를 잡은 민준의 입가엔 잔잔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버스 안은 책 냄새와 오래된 나무 향이 뒤섞여 묘한 아늑함을 풍겼다. 책갈피호는 단순한 버스가 아니었다. 세상의 가장자리, 따스한 온기가 필요한 곳을 찾아가는 움직이는 도서관이자, 민준에게는 삶의 의미 그 자체였다. “자, 다 왔다! 아람골!” 민준이 힘찬 목소리로 외치자, 버스 창밖으로 옹기종기 모여 있는 작은 초가집들이 눈에 들어왔다. 첩첩산중에 자리한 아람골은 세상의 소란함이 비껴간 듯 고요했다. 처음 이곳을 찾았을 때, 아이들은 낯선 버스와 민준을 잔뜩 경계했었다. 하지만 이제는 책갈피호의 엔진 소리만 들려도 동구 밖까지 마중을 나오는 아이들이었다. “도서관 아저씨다!”“와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