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728x90
유학 설명회서 재회한 옛 연인, 지갑 속 낡은 명함 한 장번역가 하준, 다시 찾아온 유학 기회새벽 두 시, 번역 원고 파일을 닫으려던 하준의 모니터에 메일 알림이 똑 울렸다. 베를린의 한 공공정책대학원에서 박사과정 최종 합격을 알리는 그 메일을, 그는 세 번이나 다시 읽었다. 화면 아래 찍힌 날짜를 보다가 그는 피식 쓴웃음을 흘렸다.십 년 전 이맘때, 똑같은 합격 통지서를 받고도 결국 가방을 풀었던 기억이 함께 떠올랐기 때문이다.서른넷, 하준은 영어와 독일어 번역으로 밥벌이를 해온 지 벌써 팔 년째였다. 남들은 그를 성실한 프리랜서라 불렀지만, 정작 그 자신은 책상 앞에 앉아 남의 문장을 옮기며 늘 반쪽짜리 마음으로 살아왔다는 걸 알고 있었다. 아버지가 쓰러졌던 그해, 유학 가방을 풀어버린 뒤로 그는 한..
시골살이 시작, 무너진 가마 앞에서 만난 스승의 제자흙을 놓았던 손"가마가 무너져 있었다." 수아는 마당 한가운데 선 채 잡초 사이로 머리를 내민 벽돌 더미를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지붕 한쪽이 폭삭 꺼져 내려앉은 가마는 늙은 짐승이 모로 쓰러진 모양을 하고 있었고, 10년 전 도예가 한평산 선생님 밑에서 하루에도 몇 번씩 물레를 돌리던 그 시절과는 너무 다른 풍경이라 발걸음이 떼어지지 않았다. 흙을 밟고 손끝에서 둥글게 말려 올라가던 그 감촉을, 수아는 이혼과 번아웃을 겪는 사이 까맣게 잊고 지냈는데, 석 달 전 선생님의 부고를 듣고서야 비로소 그 손이 다시 흙 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었다."선생님이 돌아가시기 전에 꼭 전해달라고 하셨어요. 정수아 씨한테요."전화를 끊고 며칠 뒤 도착한 유품 상자 안..
합격 발표 기다리던 밤, 말 없던 동료가 건넨 파일계약 마지막 석 달, 합격 발표를 기다리는 밤서지원은 한빛물산 마케팅팀에서 2년째 계약직으로 일하는 스물아홉 살이었다. 계약 만료를 석 달 앞둔 이번 달, 회사는 사상 처음으로 계약직 가운데 몇 명을 정규직으로 전환하는 심사를 열었고, 그 결과는 오늘 밤 열한 시에 사내 인사시스템에 올라올 예정이었다. 전환이 되지 않으면 석 달 뒤엔 책상을 비워야 한다는 사실이, 지원의 가슴을 묵직하게 눌렀다.전셋집 보증금으로 받은 대출 이자가 매달 빠져나갔고, 허리 수술을 받은 아버지의 통원 치료비도 한 달에 사십만 원 가까이 들었다. 전환만 되면 그 숫자들을 조금은 가볍게 내려놓을 수 있을 것 같아서,합격 발표를 기다리는 밤이 이렇게까지 길게 느껴질 줄은 지원도 미처..
집 헐리던 전날, 라디오 속에서 나온 편지 한 장교정지에 커피를 쏟던 날, 걸려온 전화전화벨이 울린 건 하은이 빨간 펜으로 교정지를 넘기다가 머그잔을 쓰러뜨린, 하필 그 순간이었다. 뜨거운 커피가 원고 위로 철퍼덕 쏟아지는 걸 보며 "어머!" 소리를 지르던 그녀는, 휴지로 허둥지둥 책상을 닦으면서도 핸드폰 화면에 뜬 "아빠"라는 두 글자를 놓치지 않고 받았다."그 집, 다음 주에 넘긴다."수화기 너머 아버지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더 무뚝뚝했고, 하은은 손에 쥔 휴지를 그대로 떨어뜨린 채 한참 말을 잇지 못했다. 그 집이라면, 할아버지가 평생을 살았던 그 낡은 주택을 말하는 거였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겨우 여섯 달, 아버지는 벌써 집을 내놓았다는 얘기였다."벌써요? 아직 정리도 다 못 했잖아요.""정리..
이직 면접 전날 밤, 말기 환자가 건넨 낡은 수첩번아웃 7년차 간호사, 이직 면접 날짜를 받던 밤콜벨이 세 번째로 울리던 밤, 윤서연은 복도 끝 간호사실에서 핸드폰 화면을 몰래 들여다보았다. 액정 위에는 '2차 면접: 10월 22일 오전 10시, ○○제약 영업2팀'이라는 문자가 떠 있었고, 그 순간 심장이 쿵 하고 한 번 내려앉았다. 입사 7년차, 소화기내과 병동에서 밤낮을 갈아 넣은 끝에 겨우 잡은 기회였다.요즘 서연은 퇴근길 지하철에서 서서 졸다가 한 정거장을 지나치기를 반복했고, 아침마다 다리가 퉁퉁 부어 신발이 꽉 조였다. 주 3회 나이트, 끝없는 콜벨과 보호자들의 날 선 말들, 그 사이에서자신이 점점 닳아가는 걸 느꼈던 그녀는 이번엔 정말 떠나기로 마음을 굳혔다."선생님, 다음 주 나이트 저랑 ..
폐업 신고서 쓰던 밤, 친구가 숨긴 장부 한 권활자 냄새 가득한 공방, 폐업 신고서를 쓰던 밤밤 열한 시, 지안은 혼자 남아 활자 서랍을 하나씩 열어보고 있었다. 오래된 잉크 냄새와 종이 먹은 나무 냄새가 뒤섞여 공방 안을 가득 채웠고, 책상 위에는 아직 다 채우지 못한 폐업 신고서 한 장이 놓여 있었다. 창밖으로는 재건축 공사 가림막이 둘러싼 옆 건물의 불빛이 희미하게 깜빡였다.서랍 맨 아래쪽에서 손끝에 닿은 건 아버지가 남긴놋쇠 활자 '복' 자였다. 지안의 아버지가 이 공방을 처음 열었던 서른 해 전부터 손님들의 결혼 청첩장이며 돌잔치 초대장마다 꼭 한 번씩 찍어주던 글자였고, 지안은 그 활자를 손바닥에 올려놓고 한참을 들여다보았다. 차갑고 단단한 금속 덩어리가 그날은 유난히 무겁게 느껴졌다.공방 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