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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문을 열면 훅, 하고 끼쳐오는 초여름의 냄새가 있다. 그 속에는 분명 라일락의 달콤한 향도 섞여 있을 터였다. 한때 음악 교사였던 정연우는 그 향기를 맡을 때마다 가슴 한구석이 아릿하게 저려왔다. 몇 해 전, 사소하지만 깊은 상처를 준 어떤 사건 이후로 그는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 극도로 힘겨워졌다. 대인기피증. 병원에서 내려준 진단명은 그의 삶을 작은 방 안에 가두는 주문과도 같았다. 그의 유일한 외출은 인적이 드문 시간을 골라 동네 공원을 잠시 걷는 것이었다. 그날도 여느 때처럼, 그는 공원 한쪽에 흐드러지게 핀 라일락 나무 근처 벤치에 무심코 시선을 던졌다. 그리고 발견했다. 매일 같은 시간, 같은 자리에 앉아 책을 읽는 한 여자를. 연보랏빛 원피스가 라일락 꽃잎과 닮아 보였다. 여자의 이름은 ..
밤의 장막이 잔별리 해변을 포근히 감싸 안을 때면, 파도 소리만이 낮게 속삭이는 그곳에 외딴 등불 하나가 외로이 깜빡였다. ‘소원 가게’. 간판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소박한 나무 조각에 투박하게 새겨진 글씨였다. 이 가게는 해가 수평선 아래로 완전히 몸을 숨긴 뒤에야 슬며시 문을 열었고, 동이 트기 무섭게 흔적도 없이 사라지곤 했다. 가게 주인은 윤슬 할머니라 불렸다. 진짜 이름인지, 아니면 반짝이는 잔물결 같은 그녀의 눈빛 때문에 붙은 별명인지는 아무도 몰랐다. 하얀 쪽머리에 해맑은 미소를 머금은 할머니는, 가게를 찾는 손님들에게 값을 매길 수 없는 신기한 물건들을 내어주었다. 그 대가는 돈이 아니었다. “다른 사람을 위한 진심 어린 소원 하나면 족합니다.” 할머니는 늘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그리 말..
낡은 가로등 불빛만이 희미하게 길을 밝히는 밤이었다. 수현은 하루의 무게를 어깨에 짊어진 채 공원 벤치에 힘없이 주저앉았다. 푸석한 얼굴 위로 허공을 응시하는 눈동자에는 깊은 고단함이 서려 있었다. 고개를 들자, 검푸른 하늘 한가운데에 은쟁반 같은 달이 휘영청 떠 있었다. 마치 그녀의 마음을 다 안다는 듯, 말없이 부드러운 빛을 쏟아내고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옆자리에 누군가 앉는 기척에 수현은 살짝 고개를 돌렸다. 중년으로 보이는 남자가 조금 떨어진 곳에 조용히 앉아, 그녀처럼 달을 바라보고 있었다. 처음 며칠은 서로의 존재가 어색하게 느껴졌다. 괜히 헛기침을 하기도 하고, 시선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몰라 달만 뚫어지게 쳐다보기도 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그 침묵은 어느새 익숙한 풍경..
낡은 버스 ‘책갈피호’는 오늘도 덜컹거리며 비포장도로를 달렸다. 운전대를 잡은 민준의 입가엔 잔잔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버스 안은 책 냄새와 오래된 나무 향이 뒤섞여 묘한 아늑함을 풍겼다. 책갈피호는 단순한 버스가 아니었다. 세상의 가장자리, 따스한 온기가 필요한 곳을 찾아가는 움직이는 도서관이자, 민준에게는 삶의 의미 그 자체였다. “자, 다 왔다! 아람골!” 민준이 힘찬 목소리로 외치자, 버스 창밖으로 옹기종기 모여 있는 작은 초가집들이 눈에 들어왔다. 첩첩산중에 자리한 아람골은 세상의 소란함이 비껴간 듯 고요했다. 처음 이곳을 찾았을 때, 아이들은 낯선 버스와 민준을 잔뜩 경계했었다. 하지만 이제는 책갈피호의 엔진 소리만 들려도 동구 밖까지 마중을 나오는 아이들이었다. “도서관 아저씨다!”“와아,..
낡은 골목길 모퉁이를 돌 때마다 서윤은 걸음을 멈추곤 했다. 회색빛 건물들 사이에 숨은 듯 자리한 작은 화원, ‘마음 정원’. 간판조차 빛바랜 그곳은 이상하게도 서윤의 발길을 끌었다. 몇 번이나 문 앞을 서성였지만, 안으로 들어갈 용기는 차마 내지 못했다. 마음속 깊은 곳, 누구에게도 꺼내 보이지 못한 상처는 여전히 그녀를 좀먹고 있었다. 마치 뿌리째 뽑힌 화초처럼, 서윤은 메마른 일상을 겨우 버티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봄날 오후였다. 평소보다 일찍 퇴근한 서윤은 홀린 듯 ‘마음 정원’의 삐걱거리는 나무 문을 밀었다. 훅, 하고 끼쳐오는 흙냄새와 싱그러운 풀 내음. 그리고 그 모든 것을 감싸는 듯한 은은한 꽃향기가 마치 다른 세상에 온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화원 안은 생각보다 넓었고, 크고 작은..
잿빛 하늘 아래, 스산한 바람만이 맴도는 땅. 한때는 푸르렀을지 모르나, 이제는 검붉은 흙먼지만 날리는 불모지였다. 사람들은 이곳을 '저주받은 땅'이라 불렀다. 공장의 폐수가 스며들고, 정체 모를 화학 약품 냄새가 코를 찔렀다. 아무도 살 엄두를 내지 못했고, 그렇게 땅은 오랜 시간 버려져 있었다. 그런 흉흉한 땅에 하나둘, 그림자 같은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더 이상 물러설 곳 없는 이들이었다. 도시의 삶에서 밀려난 노인, 일자리를 잃고 거리로 내몰린 청년, 아이에게 깨끗한 흙 한 줌 밟게 해주고픈 젊은 부부까지. 그들의 눈빛엔 절박함과 일말의 희망이 뒤섞여 있었다. "여기서… 정말 살 수 있을까요?" 앳된 얼굴의 지아가 갓난아기를 꼭 끌어안은 채 물었다. 그녀의 남편 민준은 아내의 어깨를 다독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