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728x90
택시기사 아버지와 재회한 밤, 첫 딸이 태어나다자정에 터진 양수자정 열두 시 사십 분, 서연이 정훈의 팔을 붙잡았다.손끝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이불 위로 번진 물기가 달빛에 어슴푸레 비쳤다."자기야, 나 물 터진 것 같아."그 말에 정훈은 쥐고 있던 태블릿 펜을 떨어뜨렸다.화면엔 마감 사흘 남은 웹툰 47화 배경이 그대로 떠 있었다.펜 끝이 침대 밑으로 굴러 들어가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결혼 삼 년 차, 첫 아이였다.예정일은 나흘 뒤, 다음 주 월요일이었는데 아이는 그 계획을 기다려주지 않았다.산부인과에서 받아온 출산 체크리스트는 서랍 안에서 아직 반도 지워지지 않은 채였다.정훈은 침대 옆에 쪼그려 앉아 서연의 눈을 봤다.얼굴이 평소보다 창백했고, 이마엔 식은땀이 한 줄 흘러내려 있었다."병원 ..
3년째 간병, 복지관 선생님이 건넨 일주일새벽 세 시, 가스불 냄새새벽 세 시, 민재는 매캐한 가스 냄새에 눈을 떴다.코끝이 쓰렸다.몸을 일으키기도 전에 머릿속에서 경보음이 울렸다.부엌에 가보니 가스불은 파랗게 켜져 있고 냄비는 텅 비어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할머니는 그 앞 식탁 의자에 멀뚱히 앉아 손을 무릎 위에 올려놓고 있었다."할머니, 뭐 끓이려고 하셨어요?"순자는 대답 없이 그를 가만히 쳐다봤다.처음 보는 사람을 살피듯, 경계와 호기심이 섞인 눈빛이었다."누구세요?"민재는 불을 끄고 타버린 냄비를 개수대에 내려놓았다.손잡이가 벌써 거뭇하게 그을려 있었다.이런 새벽이 벌써 몇 번째인지, 그는 더 이상 세지 않았다.삼 년 전 할머니가 길을 잃고 동네 파출소에서 발견된 날, 민재는 다니던 회사에 휴직..
실직 두 달, 편의점 사장님이 건넨 명함 한 장첫차 시간, 문자 한 통오후 세 시 사십 분, 진우의 휴대폰이 짧게 울렸다.팀장이 보낸 문자였다."잠깐 커피 한잔 할까요."그 한 줄을 읽는 순간 진우는 이미 알았다.5년 다닌 회사, 이번 구조조정 명단에 자기 이름이 있다는 걸.회의실 대신 엘리베이터 옆 자판기 앞에서 팀장이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커피 두 잔은 식어가고 있었다."미안해요, 진우씨.위에서 결정된 거라...나도 어쩔 수가 없었어요."진우는 종이를 받아들고 고개만 끄덕였다.물류팀 사무실로 돌아가 책상 서랍을 정리하는 데 십오 분이 걸렸다.다섯 시, 회사 정문을 나섰다.아직 해가 훤한데 이 시간에 퇴근하는 게 낯설게 느껴졌다.퇴직금 통장을 열어보다집에 들어가기 전, 진우는 아파트 상가 편의점 파라..
정든빵집 아저씨, 십오 년 만에 다시 만난 새벽도장 찍은 손, 돌아온 골목가정법원 3층, 조정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유난히 컸다.서류 마지막 장에 도장을 찍는 순간, 하은은 그 소리를 들었다.도장이 종이에 눌리는 짧은 순간, 열두 해의 결혼 생활이 서류 한 장으로 접혔다.인주 자국이 손끝에 붉게 남았다.지우려 손등으로 두어 번 문질렀지만 오히려 더 번졌다.법원 앞 화단 옆에서 하은은 잠깐 서서 손을 내려다보았다.캐리어 손잡이를 고쳐 잡고 지하철역으로 걸었다.4호선을 타고 열한 정거장, 십오 년 만에 세어보는 익숙한 숫자였다.창밖 풍경이 바뀔 때마다 낯선 간판들이 스쳐 지나갔다.역을 나오자 열여덟 해를 떠나 있던 골목이 눈앞에 나타났다.초등학교 다닐 때 매일 걷던 길이었다.발이 먼저 방향을 기억하고 있었다..
가게 인수 조건, 도장 아니라 개였다마흔을 앞두고 연 문 앞에서한도경은 서른셋에 회사를 그만뒀다.퇴사 통보를 하던 날 팀장이 물었다.나가서 뭐 할 거냐고.도경은 웃기만 했다.모아둔 돈은 크지 않았다.프랜차이즈는 엄두도 안 났다.부동산 앱을 뒤지다 골목 안 작은 가게 하나를 발견했다.간판은 낡았고 유리문엔 손때가 묻어 있었다.'형제 열쇠'라는 이름의 도장·열쇠 가게였다.주인은 최병수, 일흔여섯이었다.이 자리에서만 삼십팔 년째 앉아 있다고 부동산 아저씨가 말했다."젊은 사람이 이런 가게를 왜 하려고?"처음 만난 날 최 씨 할아버지가 물었다.도경은 대답 대신 가게 안을 둘러봤다.구석 바닥에 낡은 담요 위로 늙은 개 한 마리가 엎드려 있었다."쟤는 방울이.신경 안 써도 돼."할아버지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도경..
군대 동기와 다시 걸은 길 — 심장이 멈췄던 남자의 재활 이야기새벽 세 시, 심장이 멈췄다모니터 불빛만 남은 방이었다.새벽 세 시, 태호는 키보드 위에 손을 얹은 채 굳었다.가슴 한가운데가 무겁게 눌렸다.통증이 아니라 무게였다.누군가 벽돌을 한 장씩 얹는 것 같았다.숨을 쉴 때마다 벽돌이 하나 더 쌓였다.그는 핸드폰을 찾으려 손을 뻗다가 의자째로 넘어졌다.바닥이 차가웠다.눈앞이 하얗게 지워졌다.다음 기억은 사이렌 소리였다.들것에 실려 가는 천장 조명이 하나씩 지나갔다.누군가 그의 가슴을 세게 누르고 있었다."환자분, 눈 떠보세요.이름이 뭐예요?"응급구조사가 어깨를 흔들며 물었다.태호는 입을 벙긋거렸지만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삼십 분만 늦었어도…힘들었을 겁니다."시술을 마친 의사가 마스크를 내리며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