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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모든 소리가 빨려 들어간 진공관 속에 사는 것 같았다. 사고로 목소리를 잃은 후, 내 세상은 그렇게 변했다. 웃음소리, 울음소리, 심지어 나지막한 한숨 소리마저도 과거의 유물이 되어버렸다. 나는 낡고 먼지 쌓인 책들이 주인을 기다리는 작은 헌책방, ‘시간의 책장’에서 일했다. 손님과의 소통은 계산대 위에 놓인 작은 화이트보드와 펜이 전부였다. ‘안녕하세요’, ‘7,000원입니다’, ‘안녕히 가세요’. 내 언어는 그게 다였다. 그 남자가 처음 책방에 들어온 건, 쌀쌀한 바람이 옷깃을 여미게 하던 늦가을이었다. 그는 책방의 분위기처럼 말이 없었다. 훤칠한 키에 단단해 보이는 손, 무심한 듯 보이지만 무언가를 깊이 관찰하는 듯한 눈빛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는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책장 사이를 묵묵히..
낡은 트럭 한 대가 먼지를 풀풀 날리며 비포장도로를 힘겹게 나아갔다. 이름 모를 풀들만이 간간이 고개를 내미는 황량한 땅, 최근까지도 포성이 간간이 들려왔다는 국경 마을로 향하는 '희망'이라 불리는 이동 진료소였다. 운전대를 잡은 베테랑 의사 한지우의 옆얼굴엔 고단함과 함께 익숙한 긴장감이 서려 있었다. 뒷좌석에서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던 신입 간호사 사라는 마른침을 삼켰다. 이번이 그녀의 첫 파견이었다. "너무 긴장하지 마, 사라. 우린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러 가는 거야.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야." 지우의 낮은 목소리가 차 안의 무거운 공기를 가르며 사라에게 가닿았다. 사라는 애써 미소를 지어 보였지만, 떨리는 눈빛까지 감추진 못했다. 그녀의 푸른 눈동자에는 두려움과 함께 알 수 없는 사..
달빛마을은 언제부터인가 조금 특별한 곳이 되었다. 여느 시골 마을처럼 평화롭고 조용했지만, 어쩐지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전보다 더 자주, 더 크게 울려 퍼졌다. 시작은 정말 사소했다. 어느 추운 겨울 아침, 마을에서 제일 연세가 많으신 최 할아버지 댁 문 앞이었다. 늘 아침 일찍 산책을 나서는 할아버지는 현관 앞에 놓인 작은 보따리를 보고는 눈을 비볐다. 보따리 안에는 포근한 손뜨개 무릎담요와 함께 삐뚤빼뚤한 글씨로 쓰인 메모가 들어있었다. "할아버지, 감기 조심하세요!" 할아버지는 헛웃음을 짓다가 이내 눈시울이 붉어졌다. 누가 이런 걸 놓고 갔을까? 며칠 뒤, 육아에 지쳐 늘 피곤해 보이던 젊은 엄마 이 아주머니 집 앞에는 갓 구운 듯 따끈한 쿠키 한 봉지와 "육아 힘내세요! 엄마는 위대해요"라는 메..
김서연은 창밖으로 떨어지는 빗방울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오늘은 그녀의 서른두 번째 생일이었다. 아침부터 휴대폰을 몇 번이나 확인했지만, 축하 메시지는 단 하나도 오지 않았다. 가족들도, 친구들도, 직장 동료들도 모두 잊어버린 것 같았다. '그래, 다들 바쁘겠지.' 서연은 스스로를 위로하며 일어났다. 혼자 사는 원룸 아파트는 유독 쓸쓸해 보였다. 냉장고를 열어보니 어제 사 놓은 편의점 김밥 하나가 전부였다. 생일날 아침을 이렇게 시작하게 될 줄은 몰랐다. 회사에 도착해서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평소와 다름없이 인사를 나누고, 업무에 몰두했다. 점심시간이 되자 동료들은 삼삼오오 모여 나갔지만, 아무도 서연을 부르지 않았다. 그녀는 회사 구내식당에서 혼자 밥을 먹었다. 오후가 되자 하늘은 더욱 어두워졌다. ..
따뜻한 이웃의 정이 만든 아름다운 추억🌸 고장난 자전거와의 만남봄바람이 살랑이던 어느 오후, 나는 대학 도서관에서 돌아오는 길에 멈춰 서야 했다. 아침부터 이상하던 자전거가 마침내 항복선언을 한 것이다. 체인이 빠져나와 바퀴에 엉켜있고, 페달은 헛돌기만 했다."아, 정말..." 한숨을 내쉬며 자전거를 끌고 가려던 그때였다."혹시 도움이 필요하세요?"뒤돌아보니 같은 동네에 사는 듯한 청년이 다가오고 있었다. 키가 크고 인상이 온화한 그는 내 자전거를 보더니 자연스럽게 무릎을 꿇고 앉았다."체인이 빠졌네요. 금방 고칠 수 있어요."그의 손은 놀랍도록 능숙했다. 몇 분 만에 엉켜있던 체인을 제자리에 끼우고, 기름까지 발라주었다. 손에 묻은 기름을 휴지로 닦으며 그가 말했다."이제 괜찮을 거예요. 그런데 브레..
빛바랜 다이어리 한 권이 수아의 손에 들려 있었다. 이사 준비로 몇 년 만에 열어본 낡은 상자 속에서, 마치 숨겨둔 보물처럼 발견된 것이었다. 표지에는 유치한 글씨체로 ‘우리가 무지개를 만나는 완벽한 방법!’이라고 적혀 있었다. 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다 까르르 웃던 어린 날의 수아와 지훈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세상에서 가장 높은 산 정상에서 소리 지르기’, ‘한여름 소나기 맨몸으로 맞으며 춤추기’, ‘새벽 두 시, 아무도 없는 바닷가에서 파도 소리 듣기’… 잊고 지냈던 순수했던 약속들이 빼곡했다. 마지막 장에는 ‘가장 좋아하는 사람과 마주 보고 웃기’라는, 어쩌면 가장 어려울지도 모르는 항목이 적혀 있었다. 수아는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터져 나왔지만, 이내 가슴 한구석이 아릿해져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