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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햇살마저 비껴가는 듯한 낡은 골목길 끝, ‘최소망 부동산’ 간판 옆으로 먼지 쌓인 유리창 너머 텅 빈 공간이 보였다. 몇 년째 비어 있다는 그 집은 회색빛 구도심의 풍경처럼 스산했다. 민준은 캔버스 대신 스마트폰 액정만 들여다보는 날이 늘었다. 미대 졸업 후 야심 차게 시작한 작업실은 월세를 감당 못 해 접은 지 오래. "야, 박민준. 너 또 땅 꺼져라 한숨이냐?" 동기였던 지훈의 톡 메시지가 울렸다. 천재 소리 듣던 코딩 능력으로 번듯한 회사에 들어갔지만, ‘부품’ 같은 삶에 염증을 느끼고 뛰쳐나온 참이었다. "답이 안 보여서 그런다, 왜." 민준의 답장엔 맥이 빠져 있었다. 그때, 지훈에게서 링크 하나가 날아왔다. '구도심 빈집, 청년들의 실험 공간으로! 참여자 모집'. 시큰둥하게 링크..
오래된 골목길 끝, 먼지 쌓인 폐가 담벼락 아래는 동네 꼬마들의 비밀 아지트였다. 이름하여 ‘꿈꾸는 다락방’. 실제 다락방은 아니었지만, 낡은 평상 하나와 비뚤어진 나무 상자 몇 개가 전부인 그곳에서 아이들은 세상을 다 가진 듯했다.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는 수현이, 콧노래를 흥얼거리길 좋아하는 민준이, 공상 소설 쓰기를 좋아하는 지우, 그리고 조금 느리지만 누구보다 반짝이는 눈을 가진 하늘이까지. 네 명의 아이들은 매일 해 질 녘이면 어김없이 그곳에 모였다. “어른들은 맨날 안 된대.” 민준이가 입을 삐죽 내밀며 투덜거렸다. 손에는 구겨진 악보가 들려 있었다. 동네 노래자랑 예선에서 또 떨어졌다는 이야기였다. 심사위원 아저씨는 ‘아직 어리다’는 말만 반복했다고 했다. “우리 엄마도 그래. 그림 그려서 ..
스마트폰 액정의 푸른빛만이 어둠을 밝히는 늦은 밤, 민준은 또다시 잠 못 이루고 있었다. 반복되는 일상, 의미를 찾기 힘든 회사 생활. 스물일곱의 그는 거대한 도시 속 외로운 섬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부터인가, 그의 고요한 세상에 미세한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낡은 한복 차림으로 길을 잃은 듯 두리번거리는 노인, 빅토리아 시대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드레스를 입고 당황한 표정의 여성, 미래적인 디자인의 옷을 입고 불안하게 주변을 살피는 청년… 처음에는 코스프레려니, 혹은 촬영 중이려니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이상한’ 사람들이 점점 더 자주 눈에 띄었고, 그들의 눈빛 속에는 연기가 아닌 진짜 당혹감과 절박함이 서려 있었다. 호기심 반, 알 수 없는 이끌림 반으로 그들의 뒤를 밟던 민준은 마침내 그들의..
햇살 좋은 골목길 모퉁이, ‘이야기가 머무는 집’이라는 작은 간판을 내건 서점이 있었다. 주인 강선우는 서점 이름처럼 늘 따뜻한 이야기와 웃음을 품고 사는 사람이었다. 그는 단순히 책을 파는 것을 넘어, 동네 사람들의 크고 작은 고민을 들어주고, 도움이 필요한 이웃에게는 망설임 없이 손을 내미는, 그런 사람이었다. "선우 씨, 우리 손주 녀석 읽을 만한 동화책 좀 골라줘요. 요즘 통 말을 안 들어서…." "아이고, 할머니 오셨어요? 그럼요, 요즘 딱 그 나이대 애들이 좋아할 만한 걸로 찾아놨죠! 잠깐만요." "선우 형, 저 이번에 면접 보는데… 혹시 정장 빌릴 만한 데 알아요?" "어이구, 우리 민수 취직하는구나! 걱정 마, 형 사이즈랑 비슷하니까, 내 거 빌려줄게. 세탁도 싹 해놨어." 선우의 서점은 ..
도시의 밤이 깊어갈수록 오히려 희미한 불빛을 밝히는 곳이 있었다. 간판도 눈에 띄지 않는 골목길 모퉁이, ‘달빛 머무는 곳’이라는 작은 나무 팻말이 전부인 카페였다. 이곳은 낮에는 굳게 문을 닫고 있다가, 해가 지고 가로등 불빛이 하나둘 켜질 무렵이면 어김없이 문을 열었다. 주인장 민준은 낮에는 평범한 회사원으로 살다가, 밤이 되면 이 작은 공간의 주인이 되었다. 그가 왜 이런 이중생활 같은 밤 카페를 운영하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아니, 굳이 묻지 않았다. 카페 안은 세상의 소음이 닿지 않는 듯 고요했다. 오래된 나무 테이블 몇 개와 푹신해 보이는 소파 하나, 그리고 벽면을 가득 채운 책장이 전부였지만, 공간을 감싸는 은은한 조명과 낮은 볼륨으로 흐르는 재즈 음악, 그리고 민준이 직접 내리는 커피 향이..
햇살 한 줌 제대로 들지 않는 낡은 골목길. 회색빛 시멘트 담벼락 아래 웅크린 집들이 꼭 닮은 표정으로 겨울 추위를 견뎌내고 있었다. 한때는 아이들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는 '햇살 마을'은 언제부턴가 그 이름이 무색할 정도로 그늘져 있었다. 젊은이들은 더 나은 일자리를 찾아 도시로 떠났고, 남은 이들은 대부분 고단한 삶의 무게에 지친 노인들이거나, 빠듯한 살림에 하루하루가 버거운 젊은 부부들이었다. 서로의 사정을 뻔히 알기에 위로조차 사치가 되어버린 지 오래였다. 그러던 어느 늦가을 새벽, 마을 회관 앞에 이상한 상자 하나가 놓여 있었다. 누가 봐도 급하게 포장한 듯 투박한 종이 상자. 그 흔한 리본 하나 달려있지 않았다. 맨 처음 발견한 건 새벽 청소를 나온 영희 할머니였다. "아이고, 이게 뭐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