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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디를 세 번 틀린 남자, 손자의 얼굴을 보다목차파지 리어카 옆에 세워둔 낡은 휴대폰 키보드 앞에서 굳어버린 손 복지관 문을 두드린 이유 다섯 개의 낱말이면 충분해요 화요일 저녁 7시, 3번 자리 화면이 까매지던 밤 이 이야기 속 마음 읽기파지 리어카 옆에 세워둔 낡은 휴대폰박정만은 예순셋이다. 30년 동안 프레스 기계 앞에 서서 철판을 눌렀다. 퇴직하고 두 해가 지났고, 요즘은 새벽마다 동네를 돌며 폐지를 줍는다. 리어카 손잡이에는 딸이 사준 스마트폰이 노끈으로 묶여 늘 걸려 있다.그 휴대폰으로 그가 할 줄 아는 건 딱 하나, 전화 받기다. 문자메시지가 오면 딸에게 전화를 걸어 읽어달라고 한다. 화면 속 자잘한 글씨와 아이콘들은 그에게 늘 낯선 외국어처럼 보인다.손자 이준이는 3년 전 부모를 따라 캐..
냄비 앞에서 운 남자, 딸의 젓가락이 멈췄다목차탄내가 난 세 번의 시도 시장 골목, 순자 할머니 손으로 적은 레시피 노트 네 번째 냄비, 그리고 한 통의 전화 생일상 위에서 멈춘 젓가락 자주 묻는 질문냄비 뚜껑을 열자 탄내가 훅 끼쳤다. 준영은 가스불도 끄지 못한 채 그대로 서 있었다. 오늘로 벌써 세 번째 실패였다. 딸의 생일은 사흘 뒤였다.탄내가 난 세 번의 시도아내가 떠난 지 일 년하고도 두 달이 지났다. 그 후로 준영의 부엌은 거의 닫혀 있었다. 열일곱 살 하은과는 요즘 말을 섞는 일도 드물었다. 그나마 좋아하던 음식이엄마가 끓여주던 된장찌개였다는 걸, 준영은 최근에야 냉장고에 붙은 메모지에서 알았다.문제는 레시피가 없다는 거였다. 아내는 계량 없이, 손짐작으로만 요리하던 사람이었다. 준영이 아는..
말 한마디 없이, 오 년을 쌓아온 마음이 세상에는 말보다 확실한 약속이 있다.매일 같은 시간, 같은 자리에 서 있어 주는 것.그것만으로도 충분한 사이가, 세상에는 있다.6시 40분, 유리 너머의 인사카페 '온기'의 창가 자리에는, 저녁 6시 40분이 되면 어김없이 벌어지는 작은 의식이 있었다. 오은채는 그 시간이 다가오면 하던 일을 멈추고 창가 테이블을 정리했다.딱히 정리할 게 없어도 행주로 테이블을 한 번 더 닦았다.을지로 뒷골목, 세 평 남짓한 이 작은 카페의 통유리창 너머로 사람들이 하루에도 수백 명씩 지나갔지만, 은채가 정말로 기다리는 사람은 단 한 명이었다. 정확히 6시 40분이면, 회색 코트를 입은 한 남자가 골목 끝에서 나타났다.회사원인 듯 늘 단정한 셔츠에 넥타이를 반쯤 풀어헤친 차림이었다..
아무도 모르게 가꾼 마음이, 서로에게 닿기까지그 정원의 존재를 아는 사람은, 이 건물 전체에서 딱 한 명뿐이었다.그런데 8월의 어느 밤, 그 숫자가 둘로 늘어났다.잠들지 못하는 밤이수아는 요즘 잠을 자지 않는 게 아니라, 잠들지 못했다.성북동 언덕길, 5층짜리 낡은 상가주택 '미래빌'의 3평짜리 옥탑 원룸.다니던 디자인 스튜디오를 그만두고 다음 자리를 찾는 동안만 머물기로 한 곳이었다.원래 살던 오피스텔보다 월세가 절반이었고, 무엇보다 아무도 수아를 몰랐다. 그게 지금은 제일 필요한 조건이었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지 여섯 달이 지났다.초등학생 때부터 방학마다 할머니 집 옥상 화단에서 봉숭아 물을 들이고 상추를 땄던 기억이, 장례식장에서는 이상하게 하나도 떠오르지 않았다.사람들은 수아를 보며 "씩씩하다"고..
신발을 벗어야만, 비로소 보이는 것들그날 밤 서연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구두를 손에 들고 걸었다.발바닥에 닿는 아스팔트는 아직 낮의 열기를 다 내려놓지 못한 채 미지근했다.장마가 막 끝난 밤이었고, 길은 젖어 있었다.그 축축하고 미지근한 감촉이, 이상하게도 서연을 조금씩 제정신으로 돌려놓고 있었다.구두를 벗어 던진 밤세 시간 전, 서연은 회의실 한가운데 서 있었다. "이번 캠페인 실패는, 결국 서연 대리 책임이라고 봐야죠." 본부장의 말이었다.사실이 아니었다.시안을 뒤집은 건 클라이언트였고, 일정이 꼬인 건 위에서 컨펌을 두 번이나 미룬 탓이었다.하지만 그 자리에서 서연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대신 늘 그래왔듯, 입꼬리를 정확히 15도쯤 끌어올리며 말했다. "제가 더 꼼꼼히 챙겼어야 했는데, 죄송합니다..
속도가 다른 두 사람이, 같은 결승선에서 만난 이야기다은은 이번에도 꼴찌였다.정확히는 꼴찌에서 세 번째였다.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날은 조금도 억울하지 않았다.억울하지 않았던 이유를, 이 글을 읽는 당신에게 처음부터 천천히 들려주고 싶다.언제나, 대열의 맨 끝새벽 다섯 시 반, 탄천은 아직 어두웠다.대학 러닝 동아리 '달리다'의 아침 훈련은 언제나 이 시간에 시작됐고, 언제나 같은 순서로 끝났다.제일 먼저 들어오는 건 지호였고, 제일 늦게 들어오는 건 다은이었다. "하다은, 오늘도 꼴찌네." 동기 세아가 웃으며 던진 말에 악의는 없었다.그냥 사실이었으니까. 다은은 숨을 몰아쉬며 억지로 입꼬리를 올렸다.이 년째 이러고 있었다.남들은 페이스를 이야기하고 기록을 이야기할 때, 다은은 그저 완주를, 그러니까 멈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