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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살 좋은 골목길 모퉁이, ‘이야기가 머무는 집’이라는 작은 간판을 내건 서점이 있었다. 주인 강선우는 서점 이름처럼 늘 따뜻한 이야기와 웃음을 품고 사는 사람이었다. 그는 단순히 책을 파는 것을 넘어, 동네 사람들의 크고 작은 고민을 들어주고, 도움이 필요한 이웃에게는 망설임 없이 손을 내미는, 그런 사람이었다. "선우 씨, 우리 손주 녀석 읽을 만한 동화책 좀 골라줘요. 요즘 통 말을 안 들어서…." "아이고, 할머니 오셨어요? 그럼요, 요즘 딱 그 나이대 애들이 좋아할 만한 걸로 찾아놨죠! 잠깐만요." "선우 형, 저 이번에 면접 보는데… 혹시 정장 빌릴 만한 데 알아요?" "어이구, 우리 민수 취직하는구나! 걱정 마, 형 사이즈랑 비슷하니까, 내 거 빌려줄게. 세탁도 싹 해놨어." 선우의 서점은 ..
도시의 밤이 깊어갈수록 오히려 희미한 불빛을 밝히는 곳이 있었다. 간판도 눈에 띄지 않는 골목길 모퉁이, ‘달빛 머무는 곳’이라는 작은 나무 팻말이 전부인 카페였다. 이곳은 낮에는 굳게 문을 닫고 있다가, 해가 지고 가로등 불빛이 하나둘 켜질 무렵이면 어김없이 문을 열었다. 주인장 민준은 낮에는 평범한 회사원으로 살다가, 밤이 되면 이 작은 공간의 주인이 되었다. 그가 왜 이런 이중생활 같은 밤 카페를 운영하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아니, 굳이 묻지 않았다. 카페 안은 세상의 소음이 닿지 않는 듯 고요했다. 오래된 나무 테이블 몇 개와 푹신해 보이는 소파 하나, 그리고 벽면을 가득 채운 책장이 전부였지만, 공간을 감싸는 은은한 조명과 낮은 볼륨으로 흐르는 재즈 음악, 그리고 민준이 직접 내리는 커피 향이..
햇살 한 줌 제대로 들지 않는 낡은 골목길. 회색빛 시멘트 담벼락 아래 웅크린 집들이 꼭 닮은 표정으로 겨울 추위를 견뎌내고 있었다. 한때는 아이들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는 '햇살 마을'은 언제부턴가 그 이름이 무색할 정도로 그늘져 있었다. 젊은이들은 더 나은 일자리를 찾아 도시로 떠났고, 남은 이들은 대부분 고단한 삶의 무게에 지친 노인들이거나, 빠듯한 살림에 하루하루가 버거운 젊은 부부들이었다. 서로의 사정을 뻔히 알기에 위로조차 사치가 되어버린 지 오래였다. 그러던 어느 늦가을 새벽, 마을 회관 앞에 이상한 상자 하나가 놓여 있었다. 누가 봐도 급하게 포장한 듯 투박한 종이 상자. 그 흔한 리본 하나 달려있지 않았다. 맨 처음 발견한 건 새벽 청소를 나온 영희 할머니였다. "아이고, 이게 뭐시..
회색 빌딩 숲 사이를 빠져나가는 퇴근길은 언제나처럼 무미건조했다. 이어폰 너머로 흘러나오는 아이돌 음악도, 스마트폰 화면 속 시끌벅적한 세상사도 수현의 마음을 달래주지 못했다. 스물아홉, 딱히 불행할 것도 없지만 그렇다고 행복하다고 말하기도 애매한, 그런 날들의 연속이었다. 오늘도 어김없이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던 그때였다. 어디선가, 아주 낡고 깊은 소리가 흘러나왔다. 익숙한 전자음이 아닌, 나무 울림통을 타고 번지는 진짜 피아노 소리였다. 소리는 번화가 한쪽 구석, 낡은 상점들 앞에 놓인 낡은 업라이트 피아노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허리를 조금 구부린 채 건반 위에 마른 손가락을 올리고 있었다. 주변의 소음과 어울리지 않는, 너무나도 서정적이고 아름다운 멜로디. 하지만 그 안에는..
먼지 쌓인 굴뚝들이 하늘을 향해 앙상한 손가락처럼 뻗어 있는 곳, 사람들은 그곳을 ‘잿빛 골짜기’라고 불렀다. 한때는 철강 산업으로 번성했지만, 쇠락의 바람은 매섭게 불어닥쳤다. 공장은 문을 닫았고, 거리는 실직자들의 깊은 한숨으로 채워졌다. 웃음소리가 사라진 자리에는 무거운 침묵과 희뿌연 먼지만이 내려앉았다. 건물도, 사람들의 표정도, 심지어 하늘마저도 온통 잿빛이었다. 희망이라는 단어는 낡은 사전에나 존재하는 듯했다. 그런 도시에 한 남자가 흘러 들어왔다. 그의 이름은 루민, 어깨에는 닳고 닳은 기타 케이스 하나가 전부였다. 그는 정처 없이 떠도는 음악가였다. 왜 하필이면 이 생기 없는 도시를 찾았는지, 아무도 묻지 않았고 그 역시 설명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도시의 심장부였지만 이제는 폐허가 된 ..
서른을 갓 넘긴 지우에게 밤하늘은 그저 까만 도화지일 뿐이었다. 빼곡한 빌딩 숲 사이로 간신히 얼굴을 내민 달과, 그마저도 희미한 몇 개의 별. 어린 시절, 온 세상을 담은 듯 반짝이던 밤하늘은 더 이상 그녀의 것이 아니었다. 회색빛 도시의 소음과 고단한 하루의 무게만이 어깨를 짓누르는 밤이 반복될 뿐이었다. 가끔, 아주 가끔 지우는 생각했다. 풀벌레 소리 자지러지던 시골집 앞마당에서, 돗자리를 펴고 나란히 누워 밤하늘을 올려다보던 그 아이를. 민준이. 세상의 모든 별을 다 셀 기세로 손가락을 꼽던 아이. 천문학자가 되어 우주의 비밀을 밝혀내겠다며 눈을 빛내던 소년. 그리고 그 옆에서, 밤하늘처럼 까맣고 깊은 민준의 눈동자를 더 열심히 바라보던 자신을. “지우야, 저기 봐! 북두칠성! 오늘은 유난히 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