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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사, 아니… 강 원장. 여기 좀 봐줘유. 우리 순심이가 며칠째 밥도 잘 안 먹고, 영 시원찮네.” 햇살이 따사롭게 부서지는 어느 바닷가 마을, 허름하지만 정갈한 ‘강태웅 동물병원’의 문을 밀치며 들어선 이는 자그마한 체구의 춘자 할머니였다. 그녀의 품에는 축 늘어진 늙은 개 한 마리가 안겨 있었다. 한때 ‘독사’라 불리며 뒷골목을 주름잡던 강태웅은 이제 백발이 성성한 할머니의 걱정 어린 부름에 익숙하게 고개를 드는, 평범한 시골 수의사 강 원장이었다. “어디 봅시다, 할머니. 순심이, 괜찮아. 아저씨가 한번 볼게.” 태웅의 거칠어 보이는 손이 순심이의 등을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그의 눈빛은 예전처럼 날카롭지 않았지만, 여전히 깊은 곳에는 쉽게 가늠할 수 없는 무언가가 담겨 있었다. 과거를 청산하고 ..
먼지 쌓인 할아버지의 라디오 수리점은 마치 시간이 멈춘 섬 같았다. 스무 평 남짓한 공간에는 온갖 종류의 낡은 라디오와 부품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민준은 코를 킁킁거리며 오래된 나무와 먼지, 그리고 희미하게 남은 납땜 냄새를 맡았다. 이 가게를 정리하는 것은 생각보다 훨씬 고된 일이었다. 그가 어릴 적, 할아버지는 늘 이 작은 공간에서 라디오와 씨름하며 세월을 보냈었다. 한쪽 구석, 빛바랜 천에 덮인 채 잊혀진 듯 놓여 있는 라디오 하나가 민준의 눈길을 끌었다. 투박한 나무 상자에 커다란 다이얼 두 개, 그리고 정체를 알 수 없는 작은 스위치들이 달린, 그야말로 골동품이었다. “이건 또 뭐람.” 민준은 호기심에 천을 걷어내고 전원 코드를 찾아 꽂았다. 지지직거리는 소음과 함께 희미하게 불이 들..
갯내음보다 먼저 한숨이 마중 나오는 작은 바닷가 마을 ‘물마루’. 한때는 검은 바다를 누비는 해녀들의 숨비소리로 새벽을 열던 곳이었지만, 이제는 텅 빈 테왁만이 늙은 해녀들의 주름진 손처럼 처량하게 나뒹굴었다. 마지막 남은 해녀들마저 물질을 접는다는 소식에 마을은 묵직한 슬픔에 잠겼다. 그 중심엔 평생을 바다에 바친 강순옥 할머니가 있었다. 꼬장꼬장한 성품 뒤에 누구보다 깊은 바다 사랑을 품은 그녀였다. “이대로 우리 대에서 해녀 맥이 끊기게 내버려 둘 수는 없어.” 어느 날, 순옥 할머니의 낮은 목소리가 마을 회관에 모인 몇 안 되는 늙은 해녀들 사이에 울려 퍼졌다. “해녀 학교를 열어야겠어. 우리 숨비소리, 우리 삶의 지혜, 젊은 것들한테 넘겨주고 가야지 않겠나.” 처음엔 반신반의하던 동료 해녀..
밤의 장막이 잔별리 해변을 포근히 감싸 안을 때면, 파도 소리만이 낮게 속삭이는 그곳에 외딴 등불 하나가 외로이 깜빡였다. ‘소원 가게’. 간판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소박한 나무 조각에 투박하게 새겨진 글씨였다. 이 가게는 해가 수평선 아래로 완전히 몸을 숨긴 뒤에야 슬며시 문을 열었고, 동이 트기 무섭게 흔적도 없이 사라지곤 했다. 가게 주인은 윤슬 할머니라 불렸다. 진짜 이름인지, 아니면 반짝이는 잔물결 같은 그녀의 눈빛 때문에 붙은 별명인지는 아무도 몰랐다. 하얀 쪽머리에 해맑은 미소를 머금은 할머니는, 가게를 찾는 손님들에게 값을 매길 수 없는 신기한 물건들을 내어주었다. 그 대가는 돈이 아니었다. “다른 사람을 위한 진심 어린 소원 하나면 족합니다.” 할머니는 늘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그리 말..
낡은 버스 ‘책갈피호’는 오늘도 덜컹거리며 비포장도로를 달렸다. 운전대를 잡은 민준의 입가엔 잔잔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버스 안은 책 냄새와 오래된 나무 향이 뒤섞여 묘한 아늑함을 풍겼다. 책갈피호는 단순한 버스가 아니었다. 세상의 가장자리, 따스한 온기가 필요한 곳을 찾아가는 움직이는 도서관이자, 민준에게는 삶의 의미 그 자체였다. “자, 다 왔다! 아람골!” 민준이 힘찬 목소리로 외치자, 버스 창밖으로 옹기종기 모여 있는 작은 초가집들이 눈에 들어왔다. 첩첩산중에 자리한 아람골은 세상의 소란함이 비껴간 듯 고요했다. 처음 이곳을 찾았을 때, 아이들은 낯선 버스와 민준을 잔뜩 경계했었다. 하지만 이제는 책갈피호의 엔진 소리만 들려도 동구 밖까지 마중을 나오는 아이들이었다. “도서관 아저씨다!”“와아,..
잿빛 하늘 아래, 스산한 바람만이 맴도는 땅. 한때는 푸르렀을지 모르나, 이제는 검붉은 흙먼지만 날리는 불모지였다. 사람들은 이곳을 '저주받은 땅'이라 불렀다. 공장의 폐수가 스며들고, 정체 모를 화학 약품 냄새가 코를 찔렀다. 아무도 살 엄두를 내지 못했고, 그렇게 땅은 오랜 시간 버려져 있었다. 그런 흉흉한 땅에 하나둘, 그림자 같은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더 이상 물러설 곳 없는 이들이었다. 도시의 삶에서 밀려난 노인, 일자리를 잃고 거리로 내몰린 청년, 아이에게 깨끗한 흙 한 줌 밟게 해주고픈 젊은 부부까지. 그들의 눈빛엔 절박함과 일말의 희망이 뒤섞여 있었다. "여기서… 정말 살 수 있을까요?" 앳된 얼굴의 지아가 갓난아기를 꼭 끌어안은 채 물었다. 그녀의 남편 민준은 아내의 어깨를 다독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