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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살 마을은 이름과는 달리, 어딘가 모르게 그늘진 구석이 있는 곳이었다. 옆집에 누가 사는지도 가물가물하고, 길에서 마주쳐도 멋쩍은 헛기침이나 하며 지나치기 일쑤였다. 사람 사는 동네가 다 그렇다지만, 유독 이곳의 공기는 서먹함으로 조금 더 무거웠다. 모든 것의 시작은 은수 할머니였다. 평생을 햇살 마을에서 살아온 할머니는 예전의 정겹던 마을 풍경을 그리워했다. 어느 날, 손녀가 알려준 인터넷 ‘챌린지’라는 것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할머니는 며칠 밤낮을 고민하다 꼬깃꼬깃한 종이 한 장을 들고 마을 회관으로 향했다. 게시판 가장 잘 보이는 곳에 할머니는 서툰 글씨로 쓴 공고문을 붙였다. 매일 딱 한 가지씩만, 아주 작은 친절이라도 이웃에게 베풀어봅시다.인사하기, 문 잡아주기, 칭찬 한마디… 뭐든 좋습니다!..
박민준 씨는 오늘도 어김없이 지하철 유실물 센터의 문을 열었다. 퀴퀴한 먼지 냄새와 형광등의 희미한 불빛 아래, 세상의 온갖 사연을 품은 물건들이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를 그저 성실하고 조금은 과묵한 직원 정도로 알았다. 하지만 민준에게는 남들이 모르는 비밀이 하나 있었다. 물건에 손을 대면, 그것을 잃어버린 주인의 강한 감정이나 기억의 편린들이 파도처럼 밀려 들어오는 능력. 축복인지 저주인지 모를 이 능력 때문에 그는 평범하게 살기 어려웠다. "아저씨, 이거요. 어제 2호선에서 주웠는데..." 젊은 여성이 내민 것은 반짝이는 새것 같은 스마트폰이었다. 민준은 장갑 낀 손으로 조심스럽게 받아들었다. 순간, 짜릿한 불안감과 초조함이 온몸을 휘감았다. 중요한 면접 결과 발표를 기다리는 취업 ..
볕이 잘 드는 낡은 골목길 모퉁이, ‘마음 세탁소’라는 정겨운 간판이 세월의 때를 입고 걸려 있었다. 세탁소 주인 김 씨는 희끗한 머리에 늘 깨끗하게 다려진 와이셔츠를 입고 손님을 맞았다. 그는 말이 많은 편은 아니었지만, 그의 눈빛에는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보는 듯한 깊이가 있었다. 동네 사람들은 그저 옷을 맡기러 왔다가도, 김 씨 앞에서는 속마음을 털어놓곤 했다. 김 씨에게는 남다른 능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옷에 묻은 얼룩뿐 아니라, 그 옷 주인이 지닌 마음의 얼룩, 즉 지우고 싶은 고민이나 아픈 상처 같은 것들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어느 늦은 오후, 앳된 얼굴의 청년이 잔뜩 구겨진 셔츠 한 장을 들고 세탁소 문을 열었다. 셔츠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검은 얼룩과 함께, 잔뜩 풀 죽은 기운이..
밤의 추격자들 "야, 용전사! 힐 좀 똑바로 넣어 봐! 나 죽겠다!""아, 시끄러! 마나 딸린다고! 강철 방패, 너 어그로 제대로 끌어!" 밤 11시, 김민준은 헤드셋 너머로 들려오는 익숙한 고함 소리에 피식 웃으며 키보드를 두드렸다. 온라인 게임 '아르테미스 연대기' 속 그의 캐릭터 '용전사'는 오늘도 어김없이 길드 '밤의 추격자들'의 레이드를 지휘하고 있었다. 민준은 현실에선 평범한 중소기업 대리지만, 게임 속에서는 카리스마 넘치는 길드 마스터였다. "어휴, 오빠들 또 싸운다. 내가 다 보고 있다!" 힐러 '치유의 손길', 현실에서는 야간 근무 중 잠시 짬을 낸 간호사 박수현의 차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수현아, 저 둘 좀 말려봐. 시끄러워서 집중이 안 돼." 탱커 '강철 방패', 낮에는 건설 현장..
#1 스물여덟 민지에게 할머니는 언제나 부엌 한가운데 환하게 웃고 있는 모습으로 기억되었다. 특히 마을 잔치나 명절이면 어김없이 등장하던 할머니표 된장찌개는 그 자체로 축복이었다. 구수하면서도 깊은 맛, 뭔가 특별한 비법이 숨어 있는 듯한 그 찌개는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로 누구도 완벽하게 재현해내지 못하는 전설 같은 음식이 되어버렸다. 엄마도, 이모도, 심지어 동네에서 손맛 좋기로 소문난 반찬가게 아주머니조차 “아이고, 네 할머니 손맛은 못 따라가지. 그 양반은 손끝에 뭐가 달렸나벼.” 하고 혀를 내두를 뿐이었다. 올해도 어김없이 할머니의 기일이 다가오자, 민지는 문득 사무치는 그리움과 함께 그 된장찌개 맛이 간절해졌다. ‘마지막으로 할머니 찌개를 먹은 게 언제였더라…’ 기억조차 희미해진 맛을 떠올리려..
숨 막히는 열기가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는 붉은 모래의 바다. 끝없이 펼쳐진 사막 한가운데, 마치 신기루처럼 낡은 카라반 한 대가 덩그러니 서 있었다. 뜨거운 태양 아래 빛바랜 페인트는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보여주었지만, 그 옆에 세워진 작은 나무 팻말에는 정성스럽게 새겨진 글씨가 눈에 띄었다. ‘별 헤는 도서관’. 이 기묘한 도서관의 주인은 자이드라는 이름의 노인이었다. 햇볕에 그을린 얼굴에는 깊은 주름이 자리 잡았지만, 그의 눈빛만큼은 밤하늘의 별처럼 총명하게 빛났다. 자이드는 수십 년 전,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이 길을 지나다 모래폭풍 속에서 그녀를 잃었다. 아내는 생전에 책과 이야기를 세상 무엇보다 사랑했다. 그녀가 마지막 숨을 거두며 남긴 말은, 메마른 사막에도 이야기꽃을 피워달라는 부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