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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는 늘 그 자리에 있었다. 망망대해 한가운데 외로이 떠 있는 ‘외로운 등불 섬’. 그리고 그 섬의 심장처럼 밤새도록 깜빡이는 등대. 김 노인과 그의 어린 손녀 수현은 그 등대와 함께 섬을 지켰다. 세상의 속도와는 다른, 느리고 고요한 시간 속에서 할아버지와 손녀는 서로의 그림자이자 온기였다. 김 노인은 뭍에서의 기억을 좀처럼 입에 올리지 않았고, 수현에게 세상은 섬과 바다, 그리고 할아버지가 전부였다. 가끔 드나드는 보급선 외에는 인기척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곳. 그들의 삶은 잔잔했지만, 어딘가 모르게 사무치는 외로움이 공기처럼 떠다녔다. “할아버지, 오늘 파도가 좀 심상치 않아요.” 수현이 등대 아래 작은 창밖을 내다보며 말했다. 먹구름이 섬 전체를 삼킬 듯 낮게 드리워져 있었고, 바람 소리는 이..
#1:햇살마저 비껴가는 듯한 낡은 골목길 끝, ‘최소망 부동산’ 간판 옆으로 먼지 쌓인 유리창 너머 텅 빈 공간이 보였다. 몇 년째 비어 있다는 그 집은 회색빛 구도심의 풍경처럼 스산했다. 민준은 캔버스 대신 스마트폰 액정만 들여다보는 날이 늘었다. 미대 졸업 후 야심 차게 시작한 작업실은 월세를 감당 못 해 접은 지 오래. "야, 박민준. 너 또 땅 꺼져라 한숨이냐?" 동기였던 지훈의 톡 메시지가 울렸다. 천재 소리 듣던 코딩 능력으로 번듯한 회사에 들어갔지만, ‘부품’ 같은 삶에 염증을 느끼고 뛰쳐나온 참이었다. "답이 안 보여서 그런다, 왜." 민준의 답장엔 맥이 빠져 있었다. 그때, 지훈에게서 링크 하나가 날아왔다. '구도심 빈집, 청년들의 실험 공간으로! 참여자 모집'. 시큰둥하게 링크..
스마트폰 액정의 푸른빛만이 어둠을 밝히는 늦은 밤, 민준은 또다시 잠 못 이루고 있었다. 반복되는 일상, 의미를 찾기 힘든 회사 생활. 스물일곱의 그는 거대한 도시 속 외로운 섬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부터인가, 그의 고요한 세상에 미세한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낡은 한복 차림으로 길을 잃은 듯 두리번거리는 노인, 빅토리아 시대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드레스를 입고 당황한 표정의 여성, 미래적인 디자인의 옷을 입고 불안하게 주변을 살피는 청년… 처음에는 코스프레려니, 혹은 촬영 중이려니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이상한’ 사람들이 점점 더 자주 눈에 띄었고, 그들의 눈빛 속에는 연기가 아닌 진짜 당혹감과 절박함이 서려 있었다. 호기심 반, 알 수 없는 이끌림 반으로 그들의 뒤를 밟던 민준은 마침내 그들의..
햇살 한 줌 제대로 들지 않는 낡은 골목길. 회색빛 시멘트 담벼락 아래 웅크린 집들이 꼭 닮은 표정으로 겨울 추위를 견뎌내고 있었다. 한때는 아이들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는 '햇살 마을'은 언제부턴가 그 이름이 무색할 정도로 그늘져 있었다. 젊은이들은 더 나은 일자리를 찾아 도시로 떠났고, 남은 이들은 대부분 고단한 삶의 무게에 지친 노인들이거나, 빠듯한 살림에 하루하루가 버거운 젊은 부부들이었다. 서로의 사정을 뻔히 알기에 위로조차 사치가 되어버린 지 오래였다. 그러던 어느 늦가을 새벽, 마을 회관 앞에 이상한 상자 하나가 놓여 있었다. 누가 봐도 급하게 포장한 듯 투박한 종이 상자. 그 흔한 리본 하나 달려있지 않았다. 맨 처음 발견한 건 새벽 청소를 나온 영희 할머니였다. "아이고, 이게 뭐시..
먼지 쌓인 굴뚝들이 하늘을 향해 앙상한 손가락처럼 뻗어 있는 곳, 사람들은 그곳을 ‘잿빛 골짜기’라고 불렀다. 한때는 철강 산업으로 번성했지만, 쇠락의 바람은 매섭게 불어닥쳤다. 공장은 문을 닫았고, 거리는 실직자들의 깊은 한숨으로 채워졌다. 웃음소리가 사라진 자리에는 무거운 침묵과 희뿌연 먼지만이 내려앉았다. 건물도, 사람들의 표정도, 심지어 하늘마저도 온통 잿빛이었다. 희망이라는 단어는 낡은 사전에나 존재하는 듯했다. 그런 도시에 한 남자가 흘러 들어왔다. 그의 이름은 루민, 어깨에는 닳고 닳은 기타 케이스 하나가 전부였다. 그는 정처 없이 떠도는 음악가였다. 왜 하필이면 이 생기 없는 도시를 찾았는지, 아무도 묻지 않았고 그 역시 설명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도시의 심장부였지만 이제는 폐허가 된 ..
햇살 좋은 오후, 먼지 쌓인 창문 너머로 나른한 공기가 스며드는 ‘햇살 동네 도서관’. 이곳의 주인은 서른 중반의 사서 민지였다. 그녀는 책 냄새와 오래된 나무 책장 냄새가 뒤섞인 이곳을 세상 그 무엇보다 사랑했다. 조금은 엉뚱하고, 가끔 책 정리를 하다 말고 창밖을 보며 멍하니 있기도 했지만, 도서관을 찾는 이들의 이름을 다정히 불러주고 그들이 찾는 책을 귀신같이 찾아내 주는, 마음 따뜻한 사람이었다. 도서관은 작고 낡았지만, 동네 사람들에게는 없어서는 안 될 아늑한 쉼터였다. 매일 오후 창가 자리에 앉아 뜨개질을 하는 정희 씨, 퇴근 후 들러 조용히 코딩 책을 보는 젊은 개발자 현우, 스페인어 원서를 빌려 가는 대학생 수현, 그리고 말수는 적지만 늘 묵묵히 신간 코너를 둘러보는 박 선생님까지. 그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