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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의 추격자들 "야, 용전사! 힐 좀 똑바로 넣어 봐! 나 죽겠다!""아, 시끄러! 마나 딸린다고! 강철 방패, 너 어그로 제대로 끌어!" 밤 11시, 김민준은 헤드셋 너머로 들려오는 익숙한 고함 소리에 피식 웃으며 키보드를 두드렸다. 온라인 게임 '아르테미스 연대기' 속 그의 캐릭터 '용전사'는 오늘도 어김없이 길드 '밤의 추격자들'의 레이드를 지휘하고 있었다. 민준은 현실에선 평범한 중소기업 대리지만, 게임 속에서는 카리스마 넘치는 길드 마스터였다. "어휴, 오빠들 또 싸운다. 내가 다 보고 있다!" 힐러 '치유의 손길', 현실에서는 야간 근무 중 잠시 짬을 낸 간호사 박수현의 차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수현아, 저 둘 좀 말려봐. 시끄러워서 집중이 안 돼." 탱커 '강철 방패', 낮에는 건설 현장..
#1 스물여덟 민지에게 할머니는 언제나 부엌 한가운데 환하게 웃고 있는 모습으로 기억되었다. 특히 마을 잔치나 명절이면 어김없이 등장하던 할머니표 된장찌개는 그 자체로 축복이었다. 구수하면서도 깊은 맛, 뭔가 특별한 비법이 숨어 있는 듯한 그 찌개는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로 누구도 완벽하게 재현해내지 못하는 전설 같은 음식이 되어버렸다. 엄마도, 이모도, 심지어 동네에서 손맛 좋기로 소문난 반찬가게 아주머니조차 “아이고, 네 할머니 손맛은 못 따라가지. 그 양반은 손끝에 뭐가 달렸나벼.” 하고 혀를 내두를 뿐이었다. 올해도 어김없이 할머니의 기일이 다가오자, 민지는 문득 사무치는 그리움과 함께 그 된장찌개 맛이 간절해졌다. ‘마지막으로 할머니 찌개를 먹은 게 언제였더라…’ 기억조차 희미해진 맛을 떠올리려..
서른 중반의 민준에게 세상은 온통 회색이었다. 한때는 세상의 모든 색을 캔버스에 담겠다며 밤새 붓을 놓지 않던 시절도 있었지만, 이제는 디자인 회사에서 마우스 클릭 몇 번으로 규격화된 이미지를 뽑아내는 게 일상의 전부였다. 월급은 통장을 스쳐 갈 뿐이었고, 어릴 적 꿈은 빛바랜 사진처럼 기억 저편으로 희미해져 갔다. 주말이면 텅 빈 캔버스 앞에 앉아보기도 했지만, 붓을 쥔 손은 허공에서 길을 잃기 일쑤였다. 뭘 그려야 할지, 아니, 뭘 그리고 싶었는지조차 가물가물했다. 그러던 어느 토요일 오후였다. 답답한 마음에 집 앞 공원 벤치에 멍하니 앉아 있는데, 저만치에서 꼬마 아이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예닐곱 살쯤 되었을까. 다리가 조금 불편한지 절뚝거리면서도, 낡은 스케치북에 코를 박고 무언가를 열심히 그..
숨 막히는 열기가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는 붉은 모래의 바다. 끝없이 펼쳐진 사막 한가운데, 마치 신기루처럼 낡은 카라반 한 대가 덩그러니 서 있었다. 뜨거운 태양 아래 빛바랜 페인트는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보여주었지만, 그 옆에 세워진 작은 나무 팻말에는 정성스럽게 새겨진 글씨가 눈에 띄었다. ‘별 헤는 도서관’. 이 기묘한 도서관의 주인은 자이드라는 이름의 노인이었다. 햇볕에 그을린 얼굴에는 깊은 주름이 자리 잡았지만, 그의 눈빛만큼은 밤하늘의 별처럼 총명하게 빛났다. 자이드는 수십 년 전,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이 길을 지나다 모래폭풍 속에서 그녀를 잃었다. 아내는 생전에 책과 이야기를 세상 무엇보다 사랑했다. 그녀가 마지막 숨을 거두며 남긴 말은, 메마른 사막에도 이야기꽃을 피워달라는 부탁이었다..
새벽 공기가 차갑게 코끝을 스치는 시간.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도시 한 귀퉁이, 낡고 빛바랜 초록색 지붕을 인 버스 정류장에는 어김없이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매일 같은 시간, 같은 버스를 기다리는 익숙한 얼굴들. 하지만 그들은 서로에게 투명 인간이나 다름없었다. 각자의 시름과 상념에 잠겨 묵묵히 버스만을 기다릴 뿐, 따스한 눈인사조차 나누지 않는 삭막한 풍경이 몇 해째 이어지고 있었다. 그 중심에는 박 씨 할머니가 있었다. 허리가 살짝 굽었지만, 새벽 시장에 나가는 발걸음만큼은 언제나 꼿꼿했다. 매일 첫차를 타고 나가 좌판이라도 벌어야 겨우 손주들 간식거리라도 사줄 수 있다며, 할머니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정류장을 지켰다. 곁에는 늘 김민준이라는 청년이 서 있었다. 말끔하게 다려 입은 정장 ..
#1. “아이고, 허리야…” 김철수 반장은 뻐근한 허리를 두드리며 공원 벤치에 털썩 주저앉았다. 정년퇴직한 지 어언 반년. 평생 범인 쫓느라 닳아빠진 몸뚱이가 이제는 고작 동네 한 바퀴 도는 것만으로도 신호를 보내왔다. 강력계 형사 ‘독사’로 불리던 시절은 까마득한 옛날이야기였다. 무료함과 적막감. 퇴직 후 그의 일상을 채우는 건 오직 이 두 가지뿐이었다. 아내는 먼저 세상을 떠났고, 하나 있는 아들은 제 살길 찾아 멀리 가버린 지 오래였다. 동네 사람들과도 서먹했다. 평생 밤낮없이 일만 하느라 살가운 이웃 노릇 한번 제대로 못 해본 탓이었다. 그날도 김 반장은 멍하니 공원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그의 발치로 익숙한 삼색 고양이 한 마리가 다가와 다리에 머리를 부볐다. ‘삼색이’라고 김 반장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