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아이고, 허리야…”
김철수 반장은 뻐근한 허리를 두드리며 공원 벤치에 털썩 주저앉았다. 정년퇴직한 지 어언 반년. 평생 범인 쫓느라 닳아빠진 몸뚱이가 이제는 고작 동네 한 바퀴 도는 것만으로도 신호를 보내왔다. 강력계 형사 ‘독사’로 불리던 시절은 까마득한 옛날이야기였다. 무료함과 적막감.
퇴직 후 그의 일상을 채우는 건 오직 이 두 가지뿐이었다. 아내는 먼저 세상을 떠났고, 하나 있는 아들은 제 살길 찾아 멀리 가버린 지 오래였다. 동네 사람들과도 서먹했다. 평생 밤낮없이 일만 하느라 살가운 이웃 노릇 한번 제대로 못 해본 탓이었다.
그날도 김 반장은 멍하니 공원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그의 발치로 익숙한 삼색 고양이 한 마리가 다가와 다리에 머리를 부볐다. ‘삼색이’라고 김 반장이 마음속으로 이름 붙인 녀석이었다. 동네 길고양이 중에서도 유난히 사람을 경계하지 않는 녀석이었다.
“녀석, 배고프냐?”
김 반장은 주머니에서 어제 먹다 남은 빵 부스러기를 꺼내 던져주었다. 삼색이는 잽싸게 받아먹더니, 느닷없이 앞발로 벤치 옆 화단 흙을 툭툭 쳤다. 그러고는 김 반장을 올려다보며 ‘야옹’ 하고 짧게 울었다. 마치 뭔가 할 말이 있다는 듯이.
“왜? 거기 뭐 있냐?”
김 반장은 무심코 화단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별다른 건 없어 보였다. 그저 마른 흙과 잡초뿐. 그런데 삼색이는 끈질기게 그 자리를 맴돌며 김 반장을 쳐다봤다. 그때, 김 반장의 눈에 화단 구석에 반쯤 파묻힌 채 반짝이는 무언가가 들어왔다. 은색의 작은 귀걸이였다.
‘어? 저건…’
어렴풋이 기억이 났다. 며칠 전, 벤치에 앉아 있던 젊은 여자가 통화하며 귀걸이를 만지작거리던 모습. 아마 그때 떨어뜨린 모양이었다. 김 반장은 허리를 숙여 귀걸이를 주워 들었다. 그리고 삼색이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어 주었다.
“네 덕에 좋은 일 한번 하겠네, 요 녀석.”
잃어버린 귀걸이를 찾아 파출소에 가져다주었을 때, 김 반장은 아주 오랜만에 가슴 한구석이 따뜻해지는 것을 느꼈다. 잊고 있던 형사의 감이랄까, 아니면 그저 작은 선행이 주는 뿌듯함이랄까. 그 시작은 아주 미미했지만, 그의 텅 빈 일상에 작은 파문을 일으키기엔 충분했다.
#2.
그 일이 있고 난 후, 김 반장은 동네 길고양이들을 조금 더 유심히 관찰하게 되었다. 예전엔 그저 귀찮거나 무관심한 대상이었지만, 이제는 뭔가 다른 의미로 다가왔다. 특히 녀석들의 이상 행동에 자꾸만 눈길이 갔다.
어느 날 오후, 김 반장은 평소처럼 공원을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그런데 유독 한 고양이, 온몸이 새까만 ‘깜냥이’가 빌라 담벼락 밑에서 떠나질 않고 계속 울어대는 것이었다. 그냥 우는 게 아니라, 뭔가 불안하고 초조한 듯한 울음소리였다.
“저 녀석은 또 왜 저러나.”
김 반장은 담벼락 쪽으로 다가갔다. 가까이 가 보니, 깜냥이는 담벼락 아래 쌓인 낙엽 더미를 앞발로 헤집으려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김 반장은 직감적으로 뭔가 있음을 느꼈다. 형사의 본능이랄까, 아니면 그저 고양이에 대한 호기심이랄까. 그는 조심스럽게 낙엽을 치워보았다. 그러자 그 안에서 작고 하얀 강아지 한 마리가 웅크린 채 벌벌 떨고 있는 것이 아닌가.
“아니, 이게 누구네 강아지야?”
김 반장은 조심스럽게 강아지를 안아 들었다. 목줄에는 ‘해피’라는 이름과 함께 연락처가 적힌 인식표가 달려 있었다. 김 반장은 즉시 적힌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받은 할머니는 거의 울먹이는 목소리로 해피를 애타게 찾고 있었다고 했다.
얼마 후, 할머니가 한달음에 달려왔다. 해피를 품에 안고 눈물을 글썽이는 할머니는 김 반장에게 연신 고맙다고 인사했다.
“아이고, 반장님! 정말 감사합니다! 우리 해피, 이 녀석이 겁이 많아서 집 나가면 길도 못 찾는데… 정말 큰일 날 뻔했어요.”
“별말씀을요. 저기 저 고양이 덕입니다. 저 녀석이 아니었으면 저도 몰랐을 겁니다.”
김 반장은 담벼락 위에 앉아 태연하게 그루밍을 하고 있는 깜냥이를 가리켰다. 할머니는 깜냥이에게도 고맙다며 눈인사를 건넸다.
이 사건은 동네에 작은 화제가 되었다. ‘은퇴한 김 반장님이 길고양이 덕분에 잃어버린 강아지를 찾았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사람들은 김 반장을 조금 다른 시선으로 보기 시작했다. 무뚝뚝하고 말수 적은 전직 형사가 아니라, 어딘가 따뜻한 구석이 있는 이웃으로 말이다.
며칠 뒤, 이번에는 앞집 아주머니가 다급하게 김 반장을 찾아왔다.
“반장님, 혹시 저희 집 빨랫줄에 널어놨던 제 남편 와이셔츠 못 보셨어요? 아끼는 건데 감쪽같이 없어졌지 뭐예요.”
김 반장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러고 보니 어제 오후, 옆 빌라 옥상에서 웬 얼룩 고양이가 하얀 천 조각 같은 것을 물고 장난치는 것을 본 기억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혹시… 얼룩 고양이 한 마리가 자주 드나들지 않나요?”
“어머! 맞아요! 그 녀석이 가끔 저희 집 옥상에 와서 낮잠 자고 가곤 해요.”
김 반장은 곧장 옆 빌라 옥상으로 향했다. 아니나 다를까, 옥상 구석에 고양이가 물어다 놓은 듯한 와이셔츠가 구겨진 채 놓여 있었다. 다행히 크게 훼손되지는 않은 상태였다.
“여기 있네요. 아무래도 그 녀석이 물고 와서 장난친 모양입니다.”
와이셔츠를 돌려받은 아주머니는 얼굴 가득 미소를 지으며 김 반장에게 고마움을 표했다.
“어머나! 반장님, 정말 대단하세요! 어떻게 아셨어요? 꼭 탐정 같다니까요!”
탐정. 그 말이 김 반장의 귓가에 묘하게 울렸다. 그는 쑥스러운 듯 헛기침을 했지만, 싫지 않은 기분이었다. 고양이들의 예상치 못한 ‘제보’ 덕분에 그는 잊고 있던 수사의 감각을 조금씩 되찾고 있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이웃들과의 벽이 조금씩 허물어지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3.
김 반장과 길고양이들의 활약은 계속되었다. 누군가 정성껏 가꾼 화분을 훔쳐 간 범인(?)이 알고 보니 영역 다툼에서 밀려난 숫고양이가 화풀이로 밀어뜨린 것이었고, 밤마다 이상한 소리가 난다는 민원의 원인이 지붕 밑에 새끼를 낳은 어미 고양이임이 밝혀지기도 했다.
김 반장은 고양이들의 행동 패턴을 파악하고, 그들의 시선이 머무는 곳, 그들이 유독 경계하거나 관심을 보이는 대상을 단서 삼아 크고 작은 문제들을 해결해 나갔다.
물론 모든 것이 고양이 덕분만은 아니었다. 수십 년간 현장을 누빈 김 반장의 날카로운 관찰력과 추리력이 바탕이 되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고양이들은 결정적인 ‘계기’와 ‘실마리’를 제공해주었고, 무엇보다 김 반장에게 다시 ‘움직일 이유’를 만들어 주었다.
어느덧 동네 사람들은 무슨 일이 생기면 경찰서보다 김 반장을 먼저 찾게 되었다.
“반장님, 저희 집 자전거가 없어졌는데…”
“김 반장님, 요즘 밤에 누가 자꾸 저희 집 담벼락에 낙서를 하는 것 같아요.”
김 반장은 귀찮은 내색 하나 없이 묵묵히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나름의 ‘수사’를 펼쳤다. 물론 진짜 범죄 사건은 경찰에 신고하도록 안내했지만, 대부분은 오해나 사소한 갈등에서 비롯된 문제들이었다. 그는 사건 해결뿐만 아니라, 이웃 간의 오해를 풀어주고 관계를 회복시키는 역할까지 하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동네에 조금 심각한 일이 발생했다. 홀로 사는 노인의 집에서 얼마 안 되는 현금이 사라진 것이다. 액수가 크지는 않았지만, 노인에게는 한 달 생활비나 다름없는 돈이었다. 경찰이 다녀갔지만, 외부 침입 흔적이 없어 단순 분실로 종결될 분위기였다. 하지만 김 반장은 뭔가 석연치 않음을 느꼈다.
그는 평소처럼 공원 벤치에 앉아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그때, 그의 무릎 위로 삼색이가 폴짝 뛰어올랐다. 김 반장은 무심결에 삼색이의 등을 쓰다듬었다. 그런데 삼색이는 유독 김 반장의 점퍼 주머니 냄새를 킁킁거리며 관심을 보였다. 주머니 속에는 오늘 아침, 노인의 집에 잠시 들렀을 때 노인이 고맙다며 쥐여 준 박하사탕 몇 개가 들어 있었다.
‘박하사탕?’
순간 김 반장의 뇌리에 스치는 것이 있었다. 노인의 집을 둘러볼 때, 평소 그 집에 드나들지 않던 옆집 청년이 유독 노인의 옷장 근처를 서성거리며 불안한 눈빛을 보이던 모습. 그리고 그 청년의 입에서 희미하게 풍기던 박하사탕 냄새. 결정적으로, 노인의 집 앞을 지나칠 때마다 담벼락 너머로 그 청년을 향해 유독 날카롭게 하악질을 하던 동네 터줏대감 치즈 고양이의 모습이 떠올랐다. 마치 ‘저 녀석 수상하다’고 말하는 것처럼.
김 반장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오랜만에 심장이 뛰는 것을 느꼈다. 이것은 단순한 분실 사건이 아닐 수도 있었다.
#4.
김 반장은 곧장 청년의 집으로 향했다. 처음에는 완강히 부인하던 청년은 김 반장의 집요한 추궁과 정황 증거 앞에서 결국 모든 것을 실토했다. 순간적인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노인의 돈에 손을 댔다는 것이었다.
청년은 깊이 반성하며 노인에게 용서를 구했고, 노인 역시 젊은 날의 실수라며 그를 너그러이 용서해주었다. 김 반장은 청년에게 다시는 이런 일을 저지르지 않겠다는 다짐을 단단히 받고, 그가 훔친 돈을 스스로 갚을 수 있도록 일자리를 알아보는 데 도움을 주었다.
이 일이 해결되자 동네는 다시 평화를 되찾았다. 사람들은 김 반장의 지혜와 따뜻한 마음에 다시 한번 감탄했다. 그는 더 이상 외롭고 무기력한 은퇴 노인이 아니었다. 동네의 든든한 해결사이자, 길고양이들과 함께하는 괴짜 탐정이었다.
어느덧 해 질 녘, 김 반장은 공원 벤치에 앉아 고양이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삼색이, 깜냥이, 치즈 녀석까지. 이제 그들은 김 반장의 곁을 스스럼없이 지켰다. 김 반장은 주머니에서 고양이용 간식을 꺼내 골고루 나눠주었다.
“자, 오늘은 너희들 덕분에 큰일 하나 해결했다. 특식이다, 특식.”
고양이들은 맛있게 간식을 먹으며 만족스러운 듯 가르랑거렸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김 반장의 얼굴에는 잔잔한 미소가 번졌다. 평생 범죄와 싸우며 딱딱하게 굳어 있던 그의 마음이 길고양이들과의 교감, 그리고 이웃들과의 관계 속에서 봄눈 녹듯 스르르 녹아내리고 있었다.
“네놈들 아니었으면 나 같은 늙은이가 다시 사람 구실 하고 살 수 있었겠냐. 고맙다, 짜식들아.”
김 반장은 나지막이 중얼거리며 삼색이의 등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저녁노을이 길게 드리운 공원에는 사람과 고양이가 함께 만들어가는 따뜻하고 평화로운 온기가 가득했다. 그의 은퇴 생활은 더 이상 무료하거나 외롭지 않았다.
오히려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그의 인생 후반전은 더욱 풍요롭고 의미 있게 채워지고 있었다. 동네를 지키는 은퇴 경찰과 그의 특별한 파트너, 길고양이 탐정단의 이야기는 이제 막 시작되고 있었다.
소설에 대한 심리학적 분석
- 역할 상실과 정체성 재정립 (Role Loss and Identity Reformation): 은퇴 후 김 반장이 겪는 무료함과 적막감은 직업적 역할 상실로 인한 정체성 혼란 상태를 보여줍니다. 평생 '형사'라는 역할에 몰두했던 그가 은퇴 후 사회적 지위와 일상의 목표를 잃고 무력감을 느끼는 것은 자연스러운 과정입니다. 하지만 길고양이들과의 우연한 만남을 계기로 동네의 작은 문제들을 해결하면서 '탐정' 또는 '해결사'라는 새로운 역할을 수행하게 되고, 이는 잃어버렸던 유능감과 자아 존중감을 회복하며 새로운 정체성을 구축해나가는 긍정적인 적응 과정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 인간-동물 유대 (Human-Animal Bond): 김 반장과 길고양이들의 관계는 인간-동물 유대의 긍정적인 효과를 잘 보여줍니다. 처음에는 무관심했던 길고양이들에게 이름을 붙여주고 교감하며 정서적 지지를 얻습니다. 특히, 고양이들의 행동을 '단서'로 해석하고 함께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은 단순한 애완동물과의 관계를 넘어, 협력적인 파트너십으로 발전합니다. 이는 외로움과 사회적 고립감을 완화하고, 정서적 안정감을 증진하며, 삶의 활력을 되찾는 데 중요한 기여를 합니다. 김 반장이 고양이들에게 "네 덕분에 사람 사는 것 같다"고 말하는 장면은 이러한 유대의 깊이를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 친사회적 행동과 공동체 의식 회복 (Prosocial Behavior and Community Reintegration): 김 반장이 이웃들의 문제를 해결해주며 도움을 주는 행동은 대표적인 친사회적 행동입니다. 처음에는 고양이가 제공한 단서에 대한 호기심이나 형사로서의 본능에서 시작되었을지 모르나, 점차 이웃에 대한 관심과 도움을 통해 공동체에 기여하고자 하는 동기가 강화됩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이웃들과의 소통을 늘리고 긍정적인 관계를 형성하며, 과거의 서먹했던 관계를 극복하고 공동체의 일원으로 다시 통합됩니다. 이는 은퇴 후 겪을 수 있는 사회적 단절을 극복하고 소속감과 삶의 의미를 되찾는 중요한 과정입니다.
- 관찰 학습과 문제 해결 능력의 전이 (Observational Learning and Transfer of Problem-Solving Skills): 김 반장은 길고양이들의 특정 행동 패턴(예: 특정 장소 응시, 특정 물건 주변 맴돌기, 특정 인물 경계)을 유심히 관찰하고, 그 행동이 특정 상황(예: 잃어버린 물건, 숨겨진 강아지, 수상한 인물)과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학습합니다. 이는 사회인지 이론에서 말하는 관찰 학습의 한 예입니다. 더 나아가, 과거 형사 시절에 길렀던 관찰력, 추리력, 상황 판단 능력 등 문제 해결 기술을 새로운 상황(동네의 소소한 사건)에 성공적으로 적용(전이)함으로써, 은퇴 후에도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고 효능감을 느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