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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연인이 살던 그 집으로, 하필 내가 이사를 갔다상자 마흔두 개상자에 마흔두 번째 번호를 적다가 손을 멈췄다.유성펜 뚜껑을 닫는 소리가 텅 빈 방에 유난히 크게 울렸다.오 년을 살았던 반지하였다.곰팡이 자국을 가리려고 붙였던 벽지 무늬가 눈에 익었는데, 이제 그 벽지도 남의 것이 된다.재건축 통보를 받은 건 두 달 전이었다.집주인은 미안한 기색도 없이 문자 한 통으로 다음 달 말까지 비워달라고 통보했다.수아는 서른네 살이었다.프리랜서 일러스트레이터로 육 년째 마감과 씨름하며 이 동네를 벗어난 적이 거의 없었다.이 동네에서 태오와 만나고 헤어졌다는 사실은, 그날 아침까지는 까맣게 잊고 있었다."이사는 잘 돼가?"친구 은지의 전화였다.수아는 상자 테이프를 뜯다 말고 휴대폰을 어깨에 끼웠다."그냥 그렇지 뭐..
옛 스승의 마지막 제자, 졸업식 무대를 완성한 여덟 마디카페 유니폼 속에 접어둔 토슈즈스팀노즐에서 김이 뿜어져 나올 때마다 은수는 왼쪽 손목 안쪽의 흉터를 무의식적으로 문지른다.서른셋, 이 카페에서 일한 지 3년째다.손님에게 카드를 건네받으며 응대하는 순간에도 발끝은 저도 모르게 살짝 세워진다.하루 이백 잔 가까운 커피를 내리는 동안, 몸은 여전히 옛 습관으로 돌아가곤 한다.8년 전까지 은수는 혜윤발레학원의 수석 강사였다.수강생만 마흔 명이 넘었고, 매년 발표회 안무의 절반은 그녀 손에서 나왔다.스승 조명자 선생님은 그런 그녀를 두고 후배들 앞에서 종종 '내 발이 될 아이'라고 소개하곤 했다.마지막 무대에서 발목이 꺾이던 순간이 아직도 오른발 통증으로 남아 있다.착지 각도가 2도만 틀어졌어도 괜찮았을 거..
유학길 동료, 마감 사흘 전 그녀가 건넨 서류 한 장목차마감을 사흘 앞두고 자기소개서 첫 줄에서 멈추다 야근하던 밤, 서지혜 과장을 만나다 서지혜가 건넨 낡은 종이 한 장 오늘 밤 안에 보내라는 말 포기하려던 순간, 걸려온 전화 파견 확정 통보 이 이야기 속 마음 읽기마감을 사흘 앞두고한지원은 모니터 오른쪽 위 숫자를 노려봤다. 마감까지 남은 시간은 일흔두 시간 스물일곱 분이었다. 커서는 자기소개서 첫 줄에서 벌써 열두 번째로 깜빡이고 있었다.입사 8년 차, 서른네 살. 물류회사 해외영업팀에서 프랑크푸르트 파견 연수 공고를 본 순간 심장이 뛰었던 게 삼 주 전이었다.삼십 대 마지막 기회였다. 이 프로그램은 만 서른다섯이 넘으면 지원 자격이 사라졌다.원래는 입사 동기 최민재와 함께 지원하기로 했었다. 서류..
시골살이 시작, 얼어붙은 펌프 앞에서 만난 이웃목차이사 온 첫날, 낯선 정적 손펌프가 얼어붙은 아침 옆집 여자가 문을 두드리다 지은이 내민 종이 한 장 마을회관, 떨리는 첫 인사 첫 겨울을 넘기고 나서 이 이야기 속 마음 읽기이사 온 첫날, 낯선 정적트럭 짐칸에서 마지막 상자를 내리던 순간, 수연은 마당 한가운데 서서 그대로 얼어붙었다. 대문도 없는 집, 무릎 높이까지 자란 잡초, 처마 밑엔 회색 덩어리가 위태롭게 매달려 있었다. 서울에서 보던 어떤 풍경과도 달랐다."엄마, 여기 진짜 우리 집이야?" 하은이 손을 잡아끌며 물었다.수연은 대답 대신 웃었다. 웃는 것 말고는 딱히 할 수 있는 게 없었다.서울에서 칠 년을 다닌 회사를 그만둔 지 넉 달째였다. 이혼 서류에 도장을 찍은 지는 여덟 달째였고, 통장..
응급실 간호사가 건넨 커피 한 잔, 합격 발표가 오던 밤목차발표를 열두 시간 앞두고 전화벨이 울린 밤 응급실 구석에서 만난 사람 간호사가 건넨 말 한마디 도윤이 움직이기 시작하다 새벽 세 시, 위기의 순간 아침이 오고, 발표가 열리다 이 이야기 속 마음 읽기발표를 열두 시간 앞두고도윤은 휴대폰 화면을 열두 번째로 켰다. 시계는 밤 열한 시 사 분을 가리켰다. 정규직 전환 합격자 발표는 내일 아침 여섯 시, 정확히 열아홉 시간 뒤였다. 그는 화면 밝기를 최소로 낮췄지만 눈은 자꾸 그 숫자를 따라갔다.사회복지사 계약직으로 일한 지 삼 년째였다. 서류 심사와 실무 평가, 면접까지 세 단계를 거치는 이번 전환 심사가 그에게는 마지막 기회였다. 정원은 단 두 자리, 지원자는 열한 명이었다.떨어지면 다시 일 년짜리..
정하에게, 서른 해 만에 닿은 편지 한 통목차다락에서 나온 낡은 상자 혼자 찾아보다 부딪힌 벽 우체국 자리에 남은 카페, 박씨를 만나다 박씨가 건넨 세 가지 방법 다시 나선 발걸음 같은 이름, 다른 사람 - 흔들린 순간 서른 해 만의 재회 이 이야기 속 마음 읽기다락에서 나온 낡은 상자은수는 마흔다섯이다. 어머니가 요양원으로 거처를 옮기며 오래된 집을 정리하던 어느 토요일, 다락 구석에서 먼지 쌓인 종이상자를 발견했다. 상자 뚜껑을 열자 종이 냄새가 훅 끼쳐왔다. 손을 넣어 뒤적이던 중, 손끝에 걸리는 봉투 하나가 있었다.봉투 겉면에는 자신의 글씨체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정하에게'. 열일곱 살, 삐뚤빼뚤하던 그 시절 필체가 낯설면서도 익숙했다. 봉투는 한 번도 뜯긴 적이 없었다.봉투 뒷면에는 붉은 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