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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 막히는 열기가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는 붉은 모래의 바다. 끝없이 펼쳐진 사막 한가운데, 마치 신기루처럼 낡은 카라반 한 대가 덩그러니 서 있었다. 뜨거운 태양 아래 빛바랜 페인트는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보여주었지만, 그 옆에 세워진 작은 나무 팻말에는 정성스럽게 새겨진 글씨가 눈에 띄었다. ‘별 헤는 도서관’. 이 기묘한 도서관의 주인은 자이드라는 이름의 노인이었다. 햇볕에 그을린 얼굴에는 깊은 주름이 자리 잡았지만, 그의 눈빛만큼은 밤하늘의 별처럼 총명하게 빛났다. 자이드는 수십 년 전,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이 길을 지나다 모래폭풍 속에서 그녀를 잃었다. 아내는 생전에 책과 이야기를 세상 무엇보다 사랑했다. 그녀가 마지막 숨을 거두며 남긴 말은, 메마른 사막에도 이야기꽃을 피워달라는 부탁이었다..
새벽 공기가 차갑게 코끝을 스치는 시간.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도시 한 귀퉁이, 낡고 빛바랜 초록색 지붕을 인 버스 정류장에는 어김없이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매일 같은 시간, 같은 버스를 기다리는 익숙한 얼굴들. 하지만 그들은 서로에게 투명 인간이나 다름없었다. 각자의 시름과 상념에 잠겨 묵묵히 버스만을 기다릴 뿐, 따스한 눈인사조차 나누지 않는 삭막한 풍경이 몇 해째 이어지고 있었다. 그 중심에는 박 씨 할머니가 있었다. 허리가 살짝 굽었지만, 새벽 시장에 나가는 발걸음만큼은 언제나 꼿꼿했다. 매일 첫차를 타고 나가 좌판이라도 벌어야 겨우 손주들 간식거리라도 사줄 수 있다며, 할머니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정류장을 지켰다. 곁에는 늘 김민준이라는 청년이 서 있었다. 말끔하게 다려 입은 정장 ..
#1. “아이고, 허리야…” 김철수 반장은 뻐근한 허리를 두드리며 공원 벤치에 털썩 주저앉았다. 정년퇴직한 지 어언 반년. 평생 범인 쫓느라 닳아빠진 몸뚱이가 이제는 고작 동네 한 바퀴 도는 것만으로도 신호를 보내왔다. 강력계 형사 ‘독사’로 불리던 시절은 까마득한 옛날이야기였다. 무료함과 적막감. 퇴직 후 그의 일상을 채우는 건 오직 이 두 가지뿐이었다. 아내는 먼저 세상을 떠났고, 하나 있는 아들은 제 살길 찾아 멀리 가버린 지 오래였다. 동네 사람들과도 서먹했다. 평생 밤낮없이 일만 하느라 살가운 이웃 노릇 한번 제대로 못 해본 탓이었다. 그날도 김 반장은 멍하니 공원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그의 발치로 익숙한 삼색 고양이 한 마리가 다가와 다리에 머리를 부볐다. ‘삼색이’라고 김 반장이..
#1. 1998년 여름, 볕 좋은 오후였다. 낡은 빌라들이 어깨를 맞댄 골목길은 매미 소리로 자글자글 끓었다. 민준과 수현은 그 골목길의 왕과 여왕이었다. 딱지치기, 술래잡기, 땅따먹기… 해가 질 때까지 둘은 그림자처럼 붙어 다녔다. 민준의 아버지가 지방으로 발령 나기 전까지는. “진짜 가는 거야? 아주?” 수현의 까만 눈동자가 금방이라도 넘칠 듯 그렁거렸다. 민준은 애써 씩씩한 척 고개를 끄덕였다. 목이 메어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야, 울지 마. 내가 편지할게. 맨날 할게.”“거짓말. 멀리 가면 다 잊어버릴 거면서.”“아니야! 나중에 어른 되면, 내가 꼭 너 찾으러 올게! 약속!” 민준은 며칠 전 강가에서 주운, 유난히 반짝이던 조약돌을 수현의 작은 손에 쥐여주었다. 수현은 울음을 꾹 참으며 민..
바다는 늘 그 자리에 있었다. 망망대해 한가운데 외로이 떠 있는 ‘외로운 등불 섬’. 그리고 그 섬의 심장처럼 밤새도록 깜빡이는 등대. 김 노인과 그의 어린 손녀 수현은 그 등대와 함께 섬을 지켰다. 세상의 속도와는 다른, 느리고 고요한 시간 속에서 할아버지와 손녀는 서로의 그림자이자 온기였다. 김 노인은 뭍에서의 기억을 좀처럼 입에 올리지 않았고, 수현에게 세상은 섬과 바다, 그리고 할아버지가 전부였다. 가끔 드나드는 보급선 외에는 인기척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곳. 그들의 삶은 잔잔했지만, 어딘가 모르게 사무치는 외로움이 공기처럼 떠다녔다. “할아버지, 오늘 파도가 좀 심상치 않아요.” 수현이 등대 아래 작은 창밖을 내다보며 말했다. 먹구름이 섬 전체를 삼킬 듯 낮게 드리워져 있었고, 바람 소리는 이..
세상은 선우에게 늘 잿빛이었다. 창밖으로 보이는 세상은 늘 소란스럽고 번잡했으며, 그 소란함의 파편이라도 자신에게 튈까 그는 늘 커튼 뒤에 숨어 지냈다. 사람들과 눈을 마주치는 것, 의미 없는 대화를 나누는 것, 그 모든 것이 버거웠다. 꼭 필요한 외출이 아니면 집 밖을 나서는 일은 드물었고, 어쩌다 마주치는 이웃에게는 목례조차 생략하기 일쑤였다. 배달 음식을 시켜 먹고, 필요한 물건은 전부 인터넷으로 주문하는 생활. 그의 세상은 모니터 화면과 창문 너머의 풍경, 그게 전부였다. 무엇이 그를 이렇게 만들었을까. 기억 저편 어딘가에 희미하게 남은 날카로운 말들, 차갑게 외면하던 눈빛들. 사람에게 받은 상처는 아물지 않고 딱지가 되어 그의 마음 전체를 뒤덮어 버렸다. 더 이상 상처받고 싶지 않다는 방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