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1998년 여름, 볕 좋은 오후였다. 낡은 빌라들이 어깨를 맞댄 골목길은 매미 소리로 자글자글 끓었다. 민준과 수현은 그 골목길의 왕과 여왕이었다. 딱지치기, 술래잡기, 땅따먹기… 해가 질 때까지 둘은 그림자처럼 붙어 다녔다. 민준의 아버지가 지방으로 발령 나기 전까지는.
“진짜 가는 거야? 아주?”
수현의 까만 눈동자가 금방이라도 넘칠 듯 그렁거렸다. 민준은 애써 씩씩한 척 고개를 끄덕였다. 목이 메어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야, 울지 마. 내가 편지할게. 맨날 할게.”
“거짓말. 멀리 가면 다 잊어버릴 거면서.”
“아니야! 나중에 어른 되면, 내가 꼭 너 찾으러 올게! 약속!”
민준은 며칠 전 강가에서 주운, 유난히 반짝이던 조약돌을 수현의 작은 손에 쥐여주었다. 수현은 울음을 꾹 참으며 민준에게 삐뚤빼뚤 그린 작은 새 그림을 내밀었다. 파란색 크레파스로 그린, 어딘가 슬퍼 보이는 새였다.
“이거… 너 대신이야. 잘 데리고 있어.”
“응. 너도 이거 잘 갖고 있어. 나 대신이야.”
다음 날, 민준은 이삿짐 트럭에 올라탔다. 수현은 골목 끝까지 달려 나와 손을 흔들었다. 멀어지는 수현의 모습이 눈물에 번져 흐릿해질 때까지, 민준은 차창 밖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게 열 살 여름, 두 사람의 마지막 기억이었다.
#2.
스무 해가 훌쩍 넘는 시간이 흘렀다. 민준은 렌즈를 통해 세상을 보는 사진작가가 되어 있었다. 정해진 거처 없이, 카메라 하나 메고 도시의 풍경과 사람들의 순간을 담으며 살았다. 때로는 찬란하고 때로는 지독히 외로운 일이었다.
문득문득, 필름처럼 끊어진 어린 시절의 한 조각이 떠올랐다. 골목길을 뛰어다니던 소녀, 해맑게 웃던 까만 눈동자. 수현이었다. 잘 지낼까? 지금쯤 어떤 모습일까? 인터넷에 희미한 기억 속 이름을 검색해 보기도 했지만, 흔한 이름 뒤에 숨은 그녀를 찾기란 모래사장에서 바늘 찾기였다.
수현은 아버지가 운영하던 동네의 작은 서점, ‘시간의 책방’을 물려받아 지키고 있었다. 빠르게 변하는 세상 속에서 낡은 서점을 지키는 일은 녹록지 않았다. 책 냄새와 먼지 냄새가 뒤섞인 공간에서 조용히 책을 정리하고 손님을 맞는 것이 그녀의 일상이었다. 힘든 날이면, 그녀는 서랍 깊숙한 곳에 넣어둔 작은 상자를 열었다.
그 안에는 민준이 주었던, 이제는 빛이 바랬지만 여전히 매끄러운 조약돌이 있었다. 조약돌을 만지작거리면, 이상하게도 마음이 조금은 가라앉는 것 같았다. ‘민준이는… 잘 살고 있겠지? 날 기억이나 할까?’
두 사람은 각자의 길 위에서 서로 다른 시간을 걷고 있었다. 서로를 그리워하면서도, 다시 만날 수 있으리라는 기대는 희미한 먼지처럼 현실의 무게에 흩어져 갔다.
#3.
민준은 ‘사라져가는 골목길의 기억’이라는 주제로 사진집을 준비하고 있었다. 자료 조사를 위해 어린 시절 살았던 동네 근처를 몇 년 만에 다시 찾았다. 재개발로 많은 것이 변했지만, 기억 속 풍경의 잔해들이 드문드문 남아 있었다.
익숙한 듯 낯선 골목길을 걷던 민준의 발걸음이 어느 낡은 상점 앞에서 우뚝 멈췄다. ‘시간의 책방’. 처음 보는 간판이었다. 무심코 지나치려던 순간, 서점 창문에 붙어 있는 작은 그림 하나가 그의 시선을 강하게 붙잡았다.
파란색 크레파스로 그린, 어딘가 익숙하고 서툰 새 그림.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설마. 아닐 거야. 하지만 발은 이미 서점 문고리를 향해 움직이고 있었다.
딸랑-
맑은 방울 소리와 함께 서점 안으로 들어섰다. 오래된 책 냄새와 희미한 커피 향이 섞여 코끝을 간질였다. 햇살이 비쳐드는 창가 쪽, 책 더미에 둘러싸여 조용히 책을 정리하던 여자가 고개를 들었다.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흐릿했던 기억 속 소녀의 얼굴 위로, 지금의 그녀 모습이 겹쳐졌다.
까만 눈동자, 오똑한 코, 웃을 때 살짝 휘어지던 입꼬리까지. 세월의 흔적은 있었지만, 틀림없는 수현이었다.
수현 역시 갑자기 들어선 낯선 남자를 의아하게 쳐다보다가, 그의 얼굴을 알아보는 순간 숨을 헙, 하고 들이마셨다. 손에 들고 있던 책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것도 몰랐다.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장난기 가득했던 눈빛, 웃을 때 한쪽만 찡긋거리던 버릇. 민준이었다.
“혹시… 민준… 이니?”
수현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려 나왔다. 그 한마디에 닫혀 있던 시간의 문이 활짝 열리는 것 같았다.
“…수현아.”
민준의 목소리 역시 잔뜩 잠겨 있었다. 눈앞의 현실이 믿기지 않았다. 수많은 날들을 그리워했던 얼굴이, 이렇게 예고 없이 눈앞에 있었다. 두 사람의 눈시울이 동시에 뜨거워졌다.
#4.
어색한 침묵이 감돌았다. 먼저 정신을 차린 것은 수현이었다.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바닥에 떨어진 책을 주워 들며 희미하게 웃었다.
“어… 어서 와. 아니, 이게 얼마 만이야. 진짜… 맞구나.”
“그러게. 나도… 믿기지가 않네.”
민준은 홀린 듯 서점 안을 둘러보았다. 따뜻하고 아늑한 공간이었다. 마치 오랫동안 찾아 헤매던 안식처를 발견한 기분이었다.
“여기… 서점 하는구나.”
“응. 아버지 하시던 거 물려받았어. 너는? 어떻게 여기까지 왔어?”
두 사람은 서점 안 작은 테이블에 마주 앉았다. 처음엔 어색했지만, 이내 봇물 터지듯 그동안의 이야기들이 쏟아져 나왔다. 스무 해가 넘는 시간 동안 각자 걸어온 길, 겪었던 기쁨과 슬픔, 그리고 마음 한구석에 늘 간직하고 있었던 서로에 대한 그리움까지.
이야기 도중, 민준은 조심스럽게 주머니에서 오랫동안 간직해 온 조약돌을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수현은 눈을 크게 뜨고 그것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잠시 후, 일어나 서랍으로 가더니 작은 상자를 가져와 열었다.
그 안에는 민준이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빛이 바랬지만, 분명 자신이 주었던 파란 새 그림이 고이 접혀 있었다.
두 사람은 마주 보며 웃었다. 눈가에는 어느새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었다.
"결국, 이렇게 다시 만나려고 그랬나 봐, 우리."
수현이 나지막이 속삭였다. 민준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길고 긴 시간을 돌고 돌아, 수많은 갈래길 끝에서, 두 사람은 마침내 서로에게 닿았다. 잃어버렸다고 생각했던 시간들이 이 순간을 위해 존재했던 것처럼, 가슴 벅찬 충만함이 밀려왔다.
서점 창밖으로는 따스한 오후의 햇살이 쏟아지고 있었다. ‘시간의 책방’ 안에서, 민준과 수현의 멈추었던 시간은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이제는 함께 걸어갈 새로운 길 위에서.
소설에 대한 심리학적 분석
- 애착 이론 (Attachment Theory): 민준과 수현이 어린 시절 형성했던 깊은 우정은 안정적인 애착 관계의 특징을 보여줍니다. 갑작스러운 이별에도 불구하고 서로에게 준 기념품(조약돌, 그림)을 소중히 간직하고, 성인이 되어서도 서로를 그리워하는 모습은 초기 애착 대상과의 정서적 유대를 유지하려는 인간의 본능적인 욕구를 반영합니다. 특히 힘든 시기에 서로를 떠올리며 위안을 얻는 것은, 내면화된 애착 대상이 심리적 안정감을 제공하는 '안전 기지(Secure Base)' 역할을 수행함을 시사합니다. 재회의 순간 경험하는 강렬한 감정적 반응 역시 오랫동안 단절되었던 애착 관계가 복원되면서 오는 안도감과 기쁨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 향수 (Nostalgia): 소설 전반에 걸쳐 두 주인공은 과거의 행복했던 기억(함께 보낸 어린 시절)을 자주 회상합니다. 민준이 외로운 작업 중 수현의 웃음을 떠올리거나, 수현이 힘든 날 민준이 준 조약돌을 만지작거리는 행동은 향수의 대표적인 예입니다. 향수는 단순히 과거를 그리워하는 것을 넘어, 현재의 부정적인 감정(외로움, 어려움)을 완화하고 자아 존중감을 높이며 삶의 의미를 되찾게 돕는 심리적 자원으로 기능합니다. 과거의 긍정적 경험을 통해 현재의 자신을 위로하고 미래에 대한 희망을 유지하려는 심리적 대처 방식으로 볼 수 있습니다.
- 무의식적 끌림 및 의미 부여 (Unconscious Attraction & Meaning-Making): 민준이 특별한 이유 없이 어린 시절 동네 근처에서 사진 프로젝트를 진행하게 되고, 우연히 수현의 서점을 발견하는 과정은 표면적으로는 우연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심리학적으로는 해결되지 않은 과거의 관계(수현과의 이별)에 대한 무의식적인 끌림이나 '미해결 과제'를 완수하려는 동기가 작용했을 수 있습니다. 또한, 재회 후 "결국, 이렇게 다시 만나려고 그랬나 봐"라고 생각하는 것은 인간이 예측 불가능하고 통제할 수 없는 사건에 대해 '운명'이나 '필연'과 같은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심리적 안정감을 얻고 세상에 대한 긍정적인 믿음을 유지하려는 경향(인지적 편향의 일종)을 보여줍니다. 이는 특히 오랜 시간 간직해 온 그리움과 재회에 대한 갈망이 강할수록 두드러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