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을 걷는 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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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 중반의 민준에게 세상은 온통 회색이었다. 한때는 세상의 모든 색을 캔버스에 담겠다며 밤새 붓을 놓지 않던 시절도 있었지만, 이제는 디자인 회사에서 마우스 클릭 몇 번으로 규격화된 이미지를 뽑아내는 게 일상의 전부였다.

 

월급은 통장을 스쳐 갈 뿐이었고, 어릴 적 꿈은 빛바랜 사진처럼 기억 저편으로 희미해져 갔다. 주말이면 텅 빈 캔버스 앞에 앉아보기도 했지만, 붓을 쥔 손은 허공에서 길을 잃기 일쑤였다. 뭘 그려야 할지, 아니, 뭘 그리고 싶었는지조차 가물가물했다.

 

그러던 어느 토요일 오후였다. 답답한 마음에 집 앞 공원 벤치에 멍하니 앉아 있는데, 저만치에서 꼬마 아이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예닐곱 살쯤 되었을까. 다리가 조금 불편한지 절뚝거리면서도, 낡은 스케치북에 코를 박고 무언가를 열심히 그리고 있었다. 그 모습이 어딘가 짠하면서도 신기해서, 민준은 저도 모르게 아이에게 다가갔다.

 

"안녕? 꼬마 화가님, 뭘 그렇게 열심히 그려?"

 

아이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크고 맑은 눈망울이 민준을 향했다.

 

"안녕하세요! 저는 하늘이에요. 지금 제 꿈을 그리고 있어요."

"꿈?"

"네! 세상을 아주아주 예쁜 색깔로 칠하는 화가가 되는 거요!"

 

하늘이는 조금 불편한 다리를 쭉 뻗으며 환하게 웃었다. 그 웃음이 어찌나 해맑던지, 민준의 잿빛 세상에 잠시 노란 햇살 한 줌이 비집고 들어온 기분이었다. 하늘이는 조잘조잘 자신의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매일 그림을 그리고, 언젠가는 자기 그림으로 작은 전시회를 열고 싶다고 했다. 어려운 형편 탓에 좋은 미술 도구는 없었지만, 문구점에서 산 작은 색연필 세트 하나로도 하늘이는 세상을 얼마든지 다채롭게 만들 수 있었다.

 

그날 이후, 민준은 주말마다 공원에서 하늘이를 만났다. 처음에는 그저 아이의 순수한 열정이 신기했지만, 점점 하늘이의 그림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때로는 민준이 어설프게 그림에 대해 조언하기도 하고, 때로는 하늘이가 민준의 스케치북을 들여다보며 고개를 갸웃거리기도 했다.

 

"아저씨 그림은… 뭔가 슬퍼 보여요. 근데… 이상하게 따뜻하기도 해요."

 

하늘이의 꾸밈없는 말에 민준은 가슴 한구석이 찡했다. 잊고 살았던, 아니 외면하고 살았던 자신의 감정이 그림 속에 고스란히 녹아 있었던 모양이다. 하늘이와 함께하는 시간 동안, 민준의 마음속 잿빛 하늘에도 조금씩 파란 물감이 번져가는 것 같았다.

 

그러던 어느 날, 하늘이가 잔뜩 신이 나서 민준에게 달려왔다. 동네 작은 문화센터에서 열리는 어린이 미술대회에 참가하게 되었다는 소식이었다. 주제는 '나의 꿈'. 하늘이는 세상을 밝게 색칠하는 화가가 된 자신의 모습을 그릴 거라며 눈을 반짝였다. 민준은 진심으로 하늘이를 응원하며, 대회 날 꼭 보러 가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대회 전날, 공원에서 만난 하늘이는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얼굴이었다. 애지중지하던 색연필 세트를 어디선가 잃어버렸다는 것이다. 얼마 안 되는 용돈을 모아 산, 하늘이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보물이었다. 전문가용 색연필 세트가 아니면 제대로 된 색을 표현하기 어렵다는 것을 아는 민준이었지만, 하늘이의 형편에 다시 사달라고 조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괜찮아요… 그냥… 안 나가면 되죠, 뭐."

 

하늘이는 애써 씩씩한 척했지만, 금세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그 작은 어깨가 어찌나 안쓰럽던지. 민준은 하늘이의 축 처진 등을 가만히 토닥여주었다. 그리고 문득, 자신의 작업실 구석에 먼지를 뒤집어쓴 채 잠들어 있는 상자 하나가 떠올랐다.

 

화가의 꿈을 처음 품었던 스무 살 무렵, 몇 달간의 아르바이트비를 몽땅 털어 장만했던 전문가용 파스텔과 색연필 세트. 그때는 그 상자를 끌어안고 세상을 다 가진 듯 기뻤었다. 하지만 꿈을 접은 후로는, 그 존재 자체가 민준에게는 아픈 기억일 뿐이었다.

 

민준은 잠시 망설였다. 자신의 실패한 꿈의 증거를, 저 순수한 아이에게 건네는 것이 옳은 일일까. 하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하늘이의 반짝이는 꿈이, 자신의 묵은 상처 때문에 꺾이게 둘 수는 없었다. 민준은 하늘이의 손을 잡고 자신의 작업실로 향했다. 그리고 먼지 쌓인 상자를 꺼내 하늘이 앞에 내밀었다.

 

"하늘아, 이걸로 한번 그려볼래? 아저씨가 아주 어릴 때 쓰던 건데… 아마 너한테 더 잘 어울릴 거야. 네 꿈을 색칠하기에 딱 좋을걸."

 

하늘이는 동그래진 눈으로 민준과 상자를 번갈아 보았다. 상자 안에는 민준의 젊은 날의 열정처럼, 다채로운 색상의 파스텔과 색연필이 가지런히 누워 있었다. 하늘이는 잠시 망설이는 듯했지만, 이내 민준의 진심 어린 눈빛을 읽고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었다.

 

그날 밤, 민준은 하늘이가 그림을 완성할 수 있도록 늦게까지 옆을 지켰다. 서툰 솜씨지만, 하늘이는 민준이 준 파스텔과 색연필로 도화지 위에 자신만의 세상을 펼쳐나갔다. 불편한 다리로 쪼그리고 앉아 그림에 몰두하는 하늘이의 모습은, 그 어떤 명화보다도 민준의 가슴을 뜨겁게 만들었다.

 

다음 날, 하늘이는 민준이 지켜보는 가운데 당당하게 그림을 제출했다. 결과는 '특별상'. 대상이나 금상은 아니었지만, 하늘이는 세상을 다 얻은 듯 기뻐했다. 시상대에 오른 하늘이는 작은 목소리로, 하지만 또렷하게 말했다.

 

"이 그림은… 저 혼자 그린 게 아니에요. 제가 다시 꿈을 꿀 수 있게 도와주신, 저기 계신 아저씨랑 같이 그린 거예요! 고맙습니다!"

 

하늘이는 민준을 향해 활짝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그 순간, 민준은 울컥 차오르는 감정을 애써 눌렀다. 잊었던 꿈, 외면했던 열정이 뜨거운 용암처럼 가슴속에서 다시 끓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하늘이의 순수한 믿음과 자신의 작은 용기가 만들어낸 이 기적 같은 순간 앞에서, 민준은 더 이상 도망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주말, 민준은 오랜만에 작업실 창문을 활짝 열었다. 햇살이 쏟아져 들어와 먼지 쌓인 캔버스를 비췄다. 그는 심호흡을 한번 하고 붓을 들었다. 더 이상 손은 허공에서 헤매지 않았다.

 

민준은 가슴 뛰는 설렘과 함께, 캔버스 위에 하늘이의 해맑은 미소를, 그리고 그 미소가 비추는 밝고 희망찬 세상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림 속 세상은 더 이상 잿빛이 아니었다. 따뜻하고 다채로운 색깔들이 살아 숨 쉬고 있었다. 

 

꿈을 잃어버린 게 아니라, 잠시 다른 길을 걷고 있었을 뿐이라는 걸 깨달았다. 

 

민준은 다시, 화가가 되기로 했다. 그의 붓끝에서 새로운 이야기가 시작되고 있었다. 하늘이와 함께, 꿈을 향해 걸어가는 이야기가.


소설에 대한 심리학적 분석

  1. 자기 효능감 (Self-Efficacy): 소설 속 민준은 처음에는 과거의 꿈을 이루지 못하고 현실에 안주하며 무력감을 느끼는, 낮은 자기 효능감 상태를 보여줍니다. 디자인 회사에서의 기계적인 업무와 텅 빈 캔버스 앞에서 느끼는 막막함이 이를 잘 나타냅니다. 하지만 하늘이를 만나고, 특히 자신의 소중했던 미술 도구를 건네 하늘이의 꿈을 지지하는 행동을 통해 긍정적인 결과(하늘이의 수상과 감사 표현)를 경험하면서 변화합니다. 이 성공 경험은 민준이 '자신도 무언가 의미 있는 일을 할 수 있고,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믿음, 즉 자기 효능감을 회복하게 만드는 결정적인 계기가 됩니다. 이는 스스로의 능력에 대한 믿음이 행동 변화와 목표 추구에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는 예시입니다.
  2. 대리 경험 (Vicarious Experience): 민준은 하늘이라는 아이가 어려운 환경과 신체적 약점에도 불구하고 화가라는 꿈을 향해 순수하게 열정을 불태우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봅니다. 하늘이의 빛나는 눈빛, 그림에 대한 진지한 태도, 그리고 대회 참가와 수상 과정 전체가 민준에게는 강력한 대리 경험으로 작용합니다. 사회 학습 이론의 관점에서 볼 때, 타인(하늘이)의 성공적인 노력과 성취를 관찰하는 것은 관찰자(민준) 자신의 잠재력과 가능성에 대한 믿음을 강화시킬 수 있습니다. 하늘이의 모습은 민준에게 잊었던 자신의 꿈을 상기시키고, '나도 다시 시작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용기를 불어넣는 중요한 심리적 자극제가 된 것입니다.
  3. 의미 치료 (Logotherapy): 민준은 반복적인 회사 생활 속에서 삶의 의미와 목적을 상실한 듯한 모습을 보입니다. 그의 잿빛 세상과 슬프면서도 따뜻한 그림은 이러한 내면 상태를 반영합니다. 하지만 하늘이를 만나 그녀의 꿈을 응원하고 결정적인 도움(미술 도구 전달)을 주는 과정에서 민준은 새로운 삶의 의미를 발견합니다. 그것은 바로 '타인의 성장을 돕는 것', '자신의 재능과 경험을 나누는 것', 그리고 이를 통해 '잊었던 자신의 꿈과 다시 연결되는 것'입니다. 하늘이의 감사 표현과 그로 인한 민준의 벅찬 감동은, 단순한 성취감을 넘어 자신의 존재가 누군가에게 긍정적인 의미를 가질 수 있다는 깊은 깨달음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이는 빅터 프랭클이 강조했듯, 고통이나 역경 속에서도 삶의 의미를 찾을 때 인간은 다시 일어설 힘을 얻는다는 의미 치료의 핵심 원리를 잘 보여줍니다.
  4. 이타주의 (Altruism): 민준이 자신의 젊은 시절 꿈과 열정이 담긴, 개인적으로 매우 소중한 전문가용 파스텔과 색연필 세트를 하늘이에게 선뜻 내어주는 행동은 이타주의적 동기의 발현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 미술 도구는 민준에게 과거의 꿈과 실패를 상징하는 물건일 수도 있었지만, 그는 자신의 감정적 가치보다 하늘이의 꿈을 실현하는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이 결정은 단순히 물질적인 도움을 넘어, 자신의 가장 소중했던 일부를 내어줌으로써 타인의 행복과 성장을 진심으로 바라는 순수한 마음에서 비롯된 행동입니다. 이러한 이타적 행동은 결국 민준 자신에게도 긍정적인 감정(벅찬 감동, 삶의 의미 발견)과 행동 변화(다시 그림을 그리는 것)를 가져오는 선순환을 만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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