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낡은 골목길 모퉁이를 돌 때마다 서윤은 걸음을 멈추곤 했다. 회색빛 건물들 사이에 숨은 듯 자리한 작은 화원, ‘마음 정원’. 간판조차 빛바랜 그곳은 이상하게도 서윤의 발길을 끌었다. 몇 번이나 문 앞을 서성였지만, 안으로 들어갈 용기는 차마 내지 못했다. 마음속 깊은 곳, 누구에게도 꺼내 보이지 못한 상처는 여전히 그녀를 좀먹고 있었다. 마치 뿌리째 뽑힌 화초처럼, 서윤은 메마른 일상을 겨우 버티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봄날 오후였다. 평소보다 일찍 퇴근한 서윤은 홀린 듯 ‘마음 정원’의 삐걱거리는 나무 문을 밀었다. 훅, 하고 끼쳐오는 흙냄새와 싱그러운 풀 내음. 그리고 그 모든 것을 감싸는 듯한 은은한 꽃향기가 마치 다른 세상에 온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화원 안은 생각보다 넓었고, 크고 작은..
잿빛 하늘 아래, 스산한 바람만이 맴도는 땅. 한때는 푸르렀을지 모르나, 이제는 검붉은 흙먼지만 날리는 불모지였다. 사람들은 이곳을 '저주받은 땅'이라 불렀다. 공장의 폐수가 스며들고, 정체 모를 화학 약품 냄새가 코를 찔렀다. 아무도 살 엄두를 내지 못했고, 그렇게 땅은 오랜 시간 버려져 있었다. 그런 흉흉한 땅에 하나둘, 그림자 같은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더 이상 물러설 곳 없는 이들이었다. 도시의 삶에서 밀려난 노인, 일자리를 잃고 거리로 내몰린 청년, 아이에게 깨끗한 흙 한 줌 밟게 해주고픈 젊은 부부까지. 그들의 눈빛엔 절박함과 일말의 희망이 뒤섞여 있었다. "여기서… 정말 살 수 있을까요?" 앳된 얼굴의 지아가 갓난아기를 꼭 끌어안은 채 물었다. 그녀의 남편 민준은 아내의 어깨를 다독이..
창밖으로 나른한 햇살이 길게 늘어지던 오후 네 시. 우리 집 작은 거실에는 언제나처럼 은은한 홍차 향기가 감돌았다. 지수는 창가 흔들의자에 앉아 뜨개질을 하고 있었고, 나는 맞은편 소파에 기대앉아 오래된 소설책 페이지를 넘기고 있었다. 특별할 것 없는 일상이었지만, 그 어떤 화려한 순간보다 충만하고 평화로운 시간이었다. "현우 씨, 이 부분 문장이 참 좋네요. '우리는 모두 시간 여행자다. 매일 과거와 미래 사이를 오가며, 현재라는 아주 작은 점 위에 서 있을 뿐이라고.'" 지수가 뜨개질을 잠시 멈추고 나를 보며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오후 햇살처럼 따스했다. "음, 그러게. 마치 우리 이야기 같지 않아? 매일 오후 네 시, 이 시간만큼은 세상 모든 시름을 잊고 딱 이 순간에만 머무는 것 같잖아." 나..
햇살 마을은 이름과는 달리, 어딘가 모르게 그늘진 구석이 있는 곳이었다. 옆집에 누가 사는지도 가물가물하고, 길에서 마주쳐도 멋쩍은 헛기침이나 하며 지나치기 일쑤였다. 사람 사는 동네가 다 그렇다지만, 유독 이곳의 공기는 서먹함으로 조금 더 무거웠다. 모든 것의 시작은 은수 할머니였다. 평생을 햇살 마을에서 살아온 할머니는 예전의 정겹던 마을 풍경을 그리워했다. 어느 날, 손녀가 알려준 인터넷 ‘챌린지’라는 것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할머니는 며칠 밤낮을 고민하다 꼬깃꼬깃한 종이 한 장을 들고 마을 회관으로 향했다. 게시판 가장 잘 보이는 곳에 할머니는 서툰 글씨로 쓴 공고문을 붙였다. 매일 딱 한 가지씩만, 아주 작은 친절이라도 이웃에게 베풀어봅시다.인사하기, 문 잡아주기, 칭찬 한마디… 뭐든 좋습니다!..
차가운 바람이 옷깃을 파고드는 늦가을, 하영은 세상의 모든 온기가 자신만 비껴가는 것 같다고 느꼈다. 낡은 원룸 창밖으로 보이는 회색 도시 풍경처럼, 그녀의 삶도 빛바랜 흑백 사진 같았다. 몇 년 전 불의의 사고로 부모님을 잃고 홀로 짊어진 삶의 무게는 스물넷의 어깨에는 너무 버거웠다. 대학은 휴학한 지 오래였고, 닥치는 대로 아르바이트를 하며 하루하루를 버텨냈다. 웃음은 사치가 되었고, 눈물은 일상이 되었다. 그날도 편의점 야간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새벽 찬 공기를 가르며 집으로 향하던 길이었다. 골목길 모퉁이를 돌아서는데, 어디선가 잔잔한 기타 소리가 들려왔다. 소리를 따라 몇 걸음 옮기자, 가로등 불빛 아래 낡은 벤치에 앉아 기타를 치는 남자가 보였다. 그는 마치 바람처럼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은 ..
박민준 씨는 오늘도 어김없이 지하철 유실물 센터의 문을 열었다. 퀴퀴한 먼지 냄새와 형광등의 희미한 불빛 아래, 세상의 온갖 사연을 품은 물건들이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를 그저 성실하고 조금은 과묵한 직원 정도로 알았다. 하지만 민준에게는 남들이 모르는 비밀이 하나 있었다. 물건에 손을 대면, 그것을 잃어버린 주인의 강한 감정이나 기억의 편린들이 파도처럼 밀려 들어오는 능력. 축복인지 저주인지 모를 이 능력 때문에 그는 평범하게 살기 어려웠다. "아저씨, 이거요. 어제 2호선에서 주웠는데..." 젊은 여성이 내민 것은 반짝이는 새것 같은 스마트폰이었다. 민준은 장갑 낀 손으로 조심스럽게 받아들었다. 순간, 짜릿한 불안감과 초조함이 온몸을 휘감았다. 중요한 면접 결과 발표를 기다리는 취업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