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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한마디 때문에, 나는 20년 동안 글을 못 썼다마감 사흘 전, 도서관에서 마주친 낯익은 뒷모습유리문을 밀고 들어서던 소율의 발걸음이 복도 한가운데서 뚝 멈췄다. 안내 데스크 옆 작은 무대에서 아이들에게 그림책을 읽어주고 있는 백발의 여자, 그 뒷모습이 낯설지 않아서였다.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저 목소리, 저 말투, 설마.소율은 서른두 살, 작은 출판사에서 오 년째 편집보조로 일하고 있었다. 퇴근 후 작업실 대신 쓰는 좁은 방 책상 위에는 반쯤 완성된 그림책 더미북이 늘 펼쳐져 있었지만, 누구에게도 보여준 적이 없었다. 꿈은 또렷한데 그 꿈을 세상에 내놓을 용기만 자꾸 바닥을 긁었다.그 용기 없음의 뿌리는 스무 해도 더 지난 초등학교 5학년 교실에 있었다. 전교 글쓰기 대회에서 소율의 동화가 뽑혔던..
서른여섯 해의 마침표, 비 내리는 교차로에서 만난 노란 우산첫 번째 장: 마침표가 다가오는 계절, 텅 빈 서랍 속의 온기서른여섯 해 동안 하루도 거르지 않고 드나들던 사무실의 형광등 불빛이 오늘따라 유난히 시리게 명멸했다. 이정우는 먼지가 뽀얗게 쌓인 책상 서랍 깊숙한 구석에서 손때 묻은 황동 나침반 한 자루를 천천히 꺼내 들었다.다음 주면 평생을 전부 바쳤던 이 직장을 영영 떠나야 하는 정년퇴직을 앞두고 있었지만, 가슴속을 채운 것은 후련함이 아니라 발 디딜 곳 없는 막막한 두려움뿐이었다.회사라는 견고한 울타리 밖 세상은 그에게 아무런 안전장치도 없는 막막한 빙판길처럼 느껴졌다.파티션 너머 후배 직원들은 그의 빈자리를 지울 송별회 장소를 예약하느라 분주하게 떠들고 있었다. 한때 자신이 진두지휘하던 기획..
이민 떠나는 동생, 가방 속에 숨겨둔 서류 한 장떠나는 동생, 남겨지는 언니거실 바닥에는 입을 쩍 벌린 캐리어 세 개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저마다 23킬로그램 제한을 넘기지 않으려고 몇 번이나 쌌다 풀었다 한 흔적이 역력했는데, 개어 놓은 옷가지 사이로 서류 봉투와 반쯤 포장된 머그컵, 한국 라면 몇 봉지가 뒤섞여 어수선하기 짝이 없었다. 다음 주 수요일이면 동생 다은이 캐나다 영주권을 받아 밴쿠버행 비행기에 오르는 날이었는데, 그림을 그려 먹고 사는 하율은 거실 한쪽 소파에 걸터앉아 괜히 캐리어 손잡이만 매만지고 있었다. 창밖으로는 늦가을 바람에 가로수 잎이 부스럭 흩날렸고, 그 소리마저 오늘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열일곱 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가 식당 일로 밤늦도록 집을 비우던 시절부터, 하..
새로 이사 온 옆집 할아버지, 떨리던 붓끝의 비밀새로 이사 온 날, 옆집에서 들려온 그 소리이사 온 지 나흘째 되던 날 오후, 장맛비가 양철 차양을 투둑투둑 두드렸고 서은은 흠뻑 젖은 종이박스를 품에 안고 계단 앞에 철퍼덕 주저앉았다. 팔 년차 웹툰작가로 구독자 십이만 명을 모았던 연재작 '달빛정원'이 악플 테러로 멈춘 뒤로, 그녀는 펜을 쥐기만 하면 손끝이 바들바들 떨리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그래서 삼 년치 원고를 서랍 깊숙이 밀어넣고, 아무도 자신을 모르는 이 재개발 예정 골목 다세대주택 삼층으로 숨어들었지만, 짐 몇 개 옮기는 일조차 혼자선 버거웠다.그러다 손에 든 박스 손잡이가 뚝 끊어지며 그릇들이 와르르 쏟아졌고, 요란한 소리에 놀란 옆집 현관문이 벌컥 열렸다. "어허, 이 복도가 자네 혼자 쓰..
첫 출근 날, 열네 살에 사라진 친구를 다시 만났다두 번째 이력서 끝에 잡은 첫 출근송민서는 서른일곱 해를 살면서 이력서를 이백 통 가까이 썼다. 지난 이 년 동안 면접에서 떨어진 숫자만 헤아려도 손가락이 모자랄 지경이었는데, 그 끝에 겨우 붙잡은 자리가 고향 근처 소도시 설촌의 작은 지역아동센터, 생활복지사 자리였다. 혼자 몸이 아픈 어머니를 돌보며 서울살이를 접고 내려온 민서에게는 이번 첫 출근이 마지막 기회처럼 느껴졌다.출근 전날 밤, 옷장 구석에서 낡은 가방을 꺼내 뒤적이던 민서는 손끝에 걸리는 두꺼운 스프링 노트 하나를 발견했다. 표지가 다 닳고 모서리가 둥글게 말린 그 노트는 중학교 시절 짝꿍이던 현아와 번갈아 쓰고 그리던 낙서장이었는데, 왜인지 선뜻 버리지 못하고 가방 안쪽 깊숙이 밀어 넣었..
짝꿍이었던 그 애, 양봉 지도사가 되어 돌아왔다열쇠 없는 집, 돌아온 밤막차 버스가 마지막 정류장에 끼익 멈추자 지훈은 가방 하나를 둘러메고 캄캄한 신작로에 내려섰다. 열다섯 해 만의 귀향이었는데, 반가움보다 먼저 올라오는 건 두 시간 전 걸려온 전화의 떨리는 목소리였다. 서울에서 수의사로 일하다 원장과 다투고 그만둔 지 두 달, 딱히 돌아갈 곳도 없던 지훈에게이 귀향은 준비 없이 떠밀려 온 일이었다.두 시간 전, 서울의 좁은 고시원 방에서 전화를 받았을 때 지훈은 짐도 제대로 챙기지 못한 채 역으로 뛰었다. 심장이 쿵쿵 뛰고 손이 떨려서 표를 끊는 손끝마저 허둥지둥했다."지훈아, 큰일 났다! 아버지가 갑자기 마당에서 쓰러지셨어. 지금 바로 내려와야 해!""네? 아니, 언제요? 어디가 어떻게... 아저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