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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바랜 다이어리 한 권이 수아의 손에 들려 있었다. 이사 준비로 몇 년 만에 열어본 낡은 상자 속에서, 마치 숨겨둔 보물처럼 발견된 것이었다. 표지에는 유치한 글씨체로 ‘우리가 무지개를 만나는 완벽한 방법!’이라고 적혀 있었다. 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다 까르르 웃던 어린 날의 수아와 지훈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세상에서 가장 높은 산 정상에서 소리 지르기’, ‘한여름 소나기 맨몸으로 맞으며 춤추기’, ‘새벽 두 시, 아무도 없는 바닷가에서 파도 소리 듣기’… 잊고 지냈던 순수했던 약속들이 빼곡했다. 마지막 장에는 ‘가장 좋아하는 사람과 마주 보고 웃기’라는, 어쩌면 가장 어려울지도 모르는 항목이 적혀 있었다. 수아는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터져 나왔지만, 이내 가슴 한구석이 아릿해져 왔다..
“독사, 아니… 강 원장. 여기 좀 봐줘유. 우리 순심이가 며칠째 밥도 잘 안 먹고, 영 시원찮네.” 햇살이 따사롭게 부서지는 어느 바닷가 마을, 허름하지만 정갈한 ‘강태웅 동물병원’의 문을 밀치며 들어선 이는 자그마한 체구의 춘자 할머니였다. 그녀의 품에는 축 늘어진 늙은 개 한 마리가 안겨 있었다. 한때 ‘독사’라 불리며 뒷골목을 주름잡던 강태웅은 이제 백발이 성성한 할머니의 걱정 어린 부름에 익숙하게 고개를 드는, 평범한 시골 수의사 강 원장이었다. “어디 봅시다, 할머니. 순심이, 괜찮아. 아저씨가 한번 볼게.” 태웅의 거칠어 보이는 손이 순심이의 등을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그의 눈빛은 예전처럼 날카롭지 않았지만, 여전히 깊은 곳에는 쉽게 가늠할 수 없는 무언가가 담겨 있었다. 과거를 청산하고 ..
회색빛 도시의 숨 막히는 공기는 오늘도 여전했다. 끝없이 늘어선 빌딩들은 저마다의 무게로 지훈의 어깨를 짓누르는 듯했고, 그의 발걸음은 퇴근길 인파 속에서 무표정하게 섞여 들어갔다. 습관처럼 이어폰을 귀에 꽂으려던 순간, 후두둑. 차가운 것이 이마에 떨어졌다. 하나, 둘, 그리고 이내 세차게 쏟아지는 비였다. “아, 이런.” 가방을 뒤져봤지만, 늘 그렇듯 우산은 없었다. 처마 밑으로 잠시 몸을 피했지만, 금방이라도 온 세상을 삼킬 듯한 비의 기세는 멈출 줄 몰랐다.그때였다. 망설임과 조심스러움이 반쯤 섞인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저… 혹시 우산 없으시면… 같이 쓰실래요?” 고개를 돌리자, 아이보리색 트렌치코트를 입은 한 여자가 작은 하늘색 우산을 내밀고 서 있었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그..
새벽 공기는 아직 차가웠지만, 민준의 폐부로 스며드는 그 청량함은 언제나 하루를 시작하는 좋은 신호였다. 그의 발걸음은 규칙적이었고, 숨소리는 일정했다. 매일 아침 6시, 같은 공원, 같은 길. 그의 삶의 몇 안 되는 변하지 않는 루틴이었다. 그리고 그 루틴 속에는 또 하나의 익숙한 풍경이 있었다. 바로 반대편에서 달려오던, 늘 파란색 운동화를 신은 여자였다. 처음엔 그저 스쳐 지나가는 수많은 사람 중 하나였다. 하지만 매일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 마주치다 보니 어느새 그녀의 존재는 민준에게 익숙한 아침 풍경의 일부가 되어 있었다. 그녀는 항상 가벼운 미소를 머금고 있었고, 파란 운동화는 유난히 아침 햇살에 반짝였다. 서로 눈인사를 나누거나 대화를 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지만, 민준은 속으로 그..
먼지 쌓인 할아버지의 라디오 수리점은 마치 시간이 멈춘 섬 같았다. 스무 평 남짓한 공간에는 온갖 종류의 낡은 라디오와 부품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민준은 코를 킁킁거리며 오래된 나무와 먼지, 그리고 희미하게 남은 납땜 냄새를 맡았다. 이 가게를 정리하는 것은 생각보다 훨씬 고된 일이었다. 그가 어릴 적, 할아버지는 늘 이 작은 공간에서 라디오와 씨름하며 세월을 보냈었다. 한쪽 구석, 빛바랜 천에 덮인 채 잊혀진 듯 놓여 있는 라디오 하나가 민준의 눈길을 끌었다. 투박한 나무 상자에 커다란 다이얼 두 개, 그리고 정체를 알 수 없는 작은 스위치들이 달린, 그야말로 골동품이었다. “이건 또 뭐람.” 민준은 호기심에 천을 걷어내고 전원 코드를 찾아 꽂았다. 지지직거리는 소음과 함께 희미하게 불이 들..
갯내음보다 먼저 한숨이 마중 나오는 작은 바닷가 마을 ‘물마루’. 한때는 검은 바다를 누비는 해녀들의 숨비소리로 새벽을 열던 곳이었지만, 이제는 텅 빈 테왁만이 늙은 해녀들의 주름진 손처럼 처량하게 나뒹굴었다. 마지막 남은 해녀들마저 물질을 접는다는 소식에 마을은 묵직한 슬픔에 잠겼다. 그 중심엔 평생을 바다에 바친 강순옥 할머니가 있었다. 꼬장꼬장한 성품 뒤에 누구보다 깊은 바다 사랑을 품은 그녀였다. “이대로 우리 대에서 해녀 맥이 끊기게 내버려 둘 수는 없어.” 어느 날, 순옥 할머니의 낮은 목소리가 마을 회관에 모인 몇 안 되는 늙은 해녀들 사이에 울려 퍼졌다. “해녀 학교를 열어야겠어. 우리 숨비소리, 우리 삶의 지혜, 젊은 것들한테 넘겨주고 가야지 않겠나.” 처음엔 반신반의하던 동료 해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