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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색 빌딩 숲 사이를 빠져나가는 퇴근길은 언제나처럼 무미건조했다. 이어폰 너머로 흘러나오는 아이돌 음악도, 스마트폰 화면 속 시끌벅적한 세상사도 수현의 마음을 달래주지 못했다. 스물아홉, 딱히 불행할 것도 없지만 그렇다고 행복하다고 말하기도 애매한, 그런 날들의 연속이었다. 오늘도 어김없이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던 그때였다. 어디선가, 아주 낡고 깊은 소리가 흘러나왔다. 익숙한 전자음이 아닌, 나무 울림통을 타고 번지는 진짜 피아노 소리였다. 소리는 번화가 한쪽 구석, 낡은 상점들 앞에 놓인 낡은 업라이트 피아노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허리를 조금 구부린 채 건반 위에 마른 손가락을 올리고 있었다. 주변의 소음과 어울리지 않는, 너무나도 서정적이고 아름다운 멜로디. 하지만 그 안에는..
먼지 쌓인 굴뚝들이 하늘을 향해 앙상한 손가락처럼 뻗어 있는 곳, 사람들은 그곳을 ‘잿빛 골짜기’라고 불렀다. 한때는 철강 산업으로 번성했지만, 쇠락의 바람은 매섭게 불어닥쳤다. 공장은 문을 닫았고, 거리는 실직자들의 깊은 한숨으로 채워졌다. 웃음소리가 사라진 자리에는 무거운 침묵과 희뿌연 먼지만이 내려앉았다. 건물도, 사람들의 표정도, 심지어 하늘마저도 온통 잿빛이었다. 희망이라는 단어는 낡은 사전에나 존재하는 듯했다. 그런 도시에 한 남자가 흘러 들어왔다. 그의 이름은 루민, 어깨에는 닳고 닳은 기타 케이스 하나가 전부였다. 그는 정처 없이 떠도는 음악가였다. 왜 하필이면 이 생기 없는 도시를 찾았는지, 아무도 묻지 않았고 그 역시 설명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도시의 심장부였지만 이제는 폐허가 된 ..
서른을 갓 넘긴 지우에게 밤하늘은 그저 까만 도화지일 뿐이었다. 빼곡한 빌딩 숲 사이로 간신히 얼굴을 내민 달과, 그마저도 희미한 몇 개의 별. 어린 시절, 온 세상을 담은 듯 반짝이던 밤하늘은 더 이상 그녀의 것이 아니었다. 회색빛 도시의 소음과 고단한 하루의 무게만이 어깨를 짓누르는 밤이 반복될 뿐이었다. 가끔, 아주 가끔 지우는 생각했다. 풀벌레 소리 자지러지던 시골집 앞마당에서, 돗자리를 펴고 나란히 누워 밤하늘을 올려다보던 그 아이를. 민준이. 세상의 모든 별을 다 셀 기세로 손가락을 꼽던 아이. 천문학자가 되어 우주의 비밀을 밝혀내겠다며 눈을 빛내던 소년. 그리고 그 옆에서, 밤하늘처럼 까맣고 깊은 민준의 눈동자를 더 열심히 바라보던 자신을. “지우야, 저기 봐! 북두칠성! 오늘은 유난히 잘 ..
시간은 꼭 고장 난 시계 같았다. 2년 전, 민준이 곁을 떠난 그날 이후로 서진의 시간은 더는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계절은 속절없이 흘러 어느덧 거리엔 다시 연둣빛 새싹이 돋고 벚꽃 잎이 흩날리는 봄이 왔지만, 서진이 운영하는 작은 꽃집 ‘오늘의 꽃’은 여전히 한겨울의 스산함 속에 머물러 있었다. 꽃향기가 가득해야 할 공간은 늘 무거운 침묵으로 가라앉아 있었고, 형형색색의 아름다운 꽃들도 그녀의 텅 빈 눈동자에는 그저 흐릿한 색 덩어리로만 보일 뿐이었다. 꽃을 다듬고 물을 주고, 손님에게 건네는 모든 과정이 마치 미리 입력된 프로그램처럼 기계적으로 반복될 뿐이었다. 입가에 걸린 희미한 미소는 그녀의 진짜 감정을 가리기 위한 얇은 막과 같았다. “서진아, 너 정말 괜찮은 거 맞아? 이러다 너까지 쓰러..
햇살 좋은 오후, 먼지 쌓인 창문 너머로 나른한 공기가 스며드는 ‘햇살 동네 도서관’. 이곳의 주인은 서른 중반의 사서 민지였다. 그녀는 책 냄새와 오래된 나무 책장 냄새가 뒤섞인 이곳을 세상 그 무엇보다 사랑했다. 조금은 엉뚱하고, 가끔 책 정리를 하다 말고 창밖을 보며 멍하니 있기도 했지만, 도서관을 찾는 이들의 이름을 다정히 불러주고 그들이 찾는 책을 귀신같이 찾아내 주는, 마음 따뜻한 사람이었다. 도서관은 작고 낡았지만, 동네 사람들에게는 없어서는 안 될 아늑한 쉼터였다. 매일 오후 창가 자리에 앉아 뜨개질을 하는 정희 씨, 퇴근 후 들러 조용히 코딩 책을 보는 젊은 개발자 현우, 스페인어 원서를 빌려 가는 대학생 수현, 그리고 말수는 적지만 늘 묵묵히 신간 코너를 둘러보는 박 선생님까지. 그들..
#1. 바다는 늘 그 자리에 있었다. 끝없이 펼쳐진 수평선 너머로 해가 뜨고 지는 것을 묵묵히 지켜보며, 밀려왔다 밀려가는 파도로 시간을 노래했다. 그 바다가 가장 잘 보이는 곳, 해변가 작은 카페 '파도' 앞에도 늘 그 자리에, 파란 의자 하나가 놓여 있었다. 볕에 바래고 소금기에 절어 본래의 색을 잃고 하늘색에 가까워진 낡은 나무 의자. 군데군데 칠이 벗겨지고 살짝 삐걱거리기도 했지만, 이상하게도 그 의자는 사람들의 마음을 끌었다. 카페 주인 현수 씨는 그 의자를 일부러 밖에 내놓았다. 찾아오는 손님들이 잠시 쉬어가거나, 하염없이 바다를 바라볼 수 있도록. 마치 그 자리가 제 운명인 듯, 의자는 묵묵히 수많은 시선과 이야기를 담아내며 그곳에 있었다. 그리고 그 의자에는 유독 한 사람이 자주 앉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