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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98년 여름, 볕 좋은 오후였다. 낡은 빌라들이 어깨를 맞댄 골목길은 매미 소리로 자글자글 끓었다. 민준과 수현은 그 골목길의 왕과 여왕이었다. 딱지치기, 술래잡기, 땅따먹기… 해가 질 때까지 둘은 그림자처럼 붙어 다녔다. 민준의 아버지가 지방으로 발령 나기 전까지는. “진짜 가는 거야? 아주?” 수현의 까만 눈동자가 금방이라도 넘칠 듯 그렁거렸다. 민준은 애써 씩씩한 척 고개를 끄덕였다. 목이 메어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야, 울지 마. 내가 편지할게. 맨날 할게.”“거짓말. 멀리 가면 다 잊어버릴 거면서.”“아니야! 나중에 어른 되면, 내가 꼭 너 찾으러 올게! 약속!” 민준은 며칠 전 강가에서 주운, 유난히 반짝이던 조약돌을 수현의 작은 손에 쥐여주었다. 수현은 울음을 꾹 참으며 민..
바다는 늘 그 자리에 있었다. 망망대해 한가운데 외로이 떠 있는 ‘외로운 등불 섬’. 그리고 그 섬의 심장처럼 밤새도록 깜빡이는 등대. 김 노인과 그의 어린 손녀 수현은 그 등대와 함께 섬을 지켰다. 세상의 속도와는 다른, 느리고 고요한 시간 속에서 할아버지와 손녀는 서로의 그림자이자 온기였다. 김 노인은 뭍에서의 기억을 좀처럼 입에 올리지 않았고, 수현에게 세상은 섬과 바다, 그리고 할아버지가 전부였다. 가끔 드나드는 보급선 외에는 인기척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곳. 그들의 삶은 잔잔했지만, 어딘가 모르게 사무치는 외로움이 공기처럼 떠다녔다. “할아버지, 오늘 파도가 좀 심상치 않아요.” 수현이 등대 아래 작은 창밖을 내다보며 말했다. 먹구름이 섬 전체를 삼킬 듯 낮게 드리워져 있었고, 바람 소리는 이..
세상은 선우에게 늘 잿빛이었다. 창밖으로 보이는 세상은 늘 소란스럽고 번잡했으며, 그 소란함의 파편이라도 자신에게 튈까 그는 늘 커튼 뒤에 숨어 지냈다. 사람들과 눈을 마주치는 것, 의미 없는 대화를 나누는 것, 그 모든 것이 버거웠다. 꼭 필요한 외출이 아니면 집 밖을 나서는 일은 드물었고, 어쩌다 마주치는 이웃에게는 목례조차 생략하기 일쑤였다. 배달 음식을 시켜 먹고, 필요한 물건은 전부 인터넷으로 주문하는 생활. 그의 세상은 모니터 화면과 창문 너머의 풍경, 그게 전부였다. 무엇이 그를 이렇게 만들었을까. 기억 저편 어딘가에 희미하게 남은 날카로운 말들, 차갑게 외면하던 눈빛들. 사람에게 받은 상처는 아물지 않고 딱지가 되어 그의 마음 전체를 뒤덮어 버렸다. 더 이상 상처받고 싶지 않다는 방어기..
#1:햇살마저 비껴가는 듯한 낡은 골목길 끝, ‘최소망 부동산’ 간판 옆으로 먼지 쌓인 유리창 너머 텅 빈 공간이 보였다. 몇 년째 비어 있다는 그 집은 회색빛 구도심의 풍경처럼 스산했다. 민준은 캔버스 대신 스마트폰 액정만 들여다보는 날이 늘었다. 미대 졸업 후 야심 차게 시작한 작업실은 월세를 감당 못 해 접은 지 오래. "야, 박민준. 너 또 땅 꺼져라 한숨이냐?" 동기였던 지훈의 톡 메시지가 울렸다. 천재 소리 듣던 코딩 능력으로 번듯한 회사에 들어갔지만, ‘부품’ 같은 삶에 염증을 느끼고 뛰쳐나온 참이었다. "답이 안 보여서 그런다, 왜." 민준의 답장엔 맥이 빠져 있었다. 그때, 지훈에게서 링크 하나가 날아왔다. '구도심 빈집, 청년들의 실험 공간으로! 참여자 모집'. 시큰둥하게 링크..
오래된 골목길 끝, 먼지 쌓인 폐가 담벼락 아래는 동네 꼬마들의 비밀 아지트였다. 이름하여 ‘꿈꾸는 다락방’. 실제 다락방은 아니었지만, 낡은 평상 하나와 비뚤어진 나무 상자 몇 개가 전부인 그곳에서 아이들은 세상을 다 가진 듯했다.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는 수현이, 콧노래를 흥얼거리길 좋아하는 민준이, 공상 소설 쓰기를 좋아하는 지우, 그리고 조금 느리지만 누구보다 반짝이는 눈을 가진 하늘이까지. 네 명의 아이들은 매일 해 질 녘이면 어김없이 그곳에 모였다. “어른들은 맨날 안 된대.” 민준이가 입을 삐죽 내밀며 투덜거렸다. 손에는 구겨진 악보가 들려 있었다. 동네 노래자랑 예선에서 또 떨어졌다는 이야기였다. 심사위원 아저씨는 ‘아직 어리다’는 말만 반복했다고 했다. “우리 엄마도 그래. 그림 그려서 ..
스마트폰 액정의 푸른빛만이 어둠을 밝히는 늦은 밤, 민준은 또다시 잠 못 이루고 있었다. 반복되는 일상, 의미를 찾기 힘든 회사 생활. 스물일곱의 그는 거대한 도시 속 외로운 섬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부터인가, 그의 고요한 세상에 미세한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낡은 한복 차림으로 길을 잃은 듯 두리번거리는 노인, 빅토리아 시대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드레스를 입고 당황한 표정의 여성, 미래적인 디자인의 옷을 입고 불안하게 주변을 살피는 청년… 처음에는 코스프레려니, 혹은 촬영 중이려니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이상한’ 사람들이 점점 더 자주 눈에 띄었고, 그들의 눈빛 속에는 연기가 아닌 진짜 당혹감과 절박함이 서려 있었다. 호기심 반, 알 수 없는 이끌림 반으로 그들의 뒤를 밟던 민준은 마침내 그들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