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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민준 씨는 오늘도 어김없이 지하철 유실물 센터의 문을 열었다. 퀴퀴한 먼지 냄새와 형광등의 희미한 불빛 아래, 세상의 온갖 사연을 품은 물건들이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를 그저 성실하고 조금은 과묵한 직원 정도로 알았다. 하지만 민준에게는 남들이 모르는 비밀이 하나 있었다. 물건에 손을 대면, 그것을 잃어버린 주인의 강한 감정이나 기억의 편린들이 파도처럼 밀려 들어오는 능력. 축복인지 저주인지 모를 이 능력 때문에 그는 평범하게 살기 어려웠다. "아저씨, 이거요. 어제 2호선에서 주웠는데..." 젊은 여성이 내민 것은 반짝이는 새것 같은 스마트폰이었다. 민준은 장갑 낀 손으로 조심스럽게 받아들었다. 순간, 짜릿한 불안감과 초조함이 온몸을 휘감았다. 중요한 면접 결과 발표를 기다리는 취업 ..
까만 밤하늘을 도화지 삼아 별들이 콕콕 박혀 있던 여름밤이었다. 열 살 남짓한 여자아이가 강가 풀밭에 쪼그리고 앉아 두 손을 꼭 모으고 있었다. 앳된 얼굴엔 간절함이 가득했다. "제발… 제발 우리 수호, 안 아프게 해주세요." 수현이었다. 얼마 전부터 시름시름 앓기 시작한 남동생 걱정에 어린 마음은 까맣게 타들어 가고 있었다. 오늘 밤 유성우가 쏟아진다는 라디오 방송을 듣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엄마 몰래 집을 빠져나온 참이었다. 별똥별에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다는 말을 철석같이 믿었던 게다. 그때, 하늘을 가로지르며 긴 꼬리를 그리는 별똥별 하나가 나타났다. "앗!" 수현은 저도 모르게 탄성을 내지르며 눈을 질끈 감았다. ‘우리 수호, 제발….’ 수현이 소원에 온 정신을 집중하는 동안, 조금 떨어진 나무..
볕이 잘 드는 낡은 골목길 모퉁이, ‘마음 세탁소’라는 정겨운 간판이 세월의 때를 입고 걸려 있었다. 세탁소 주인 김 씨는 희끗한 머리에 늘 깨끗하게 다려진 와이셔츠를 입고 손님을 맞았다. 그는 말이 많은 편은 아니었지만, 그의 눈빛에는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보는 듯한 깊이가 있었다. 동네 사람들은 그저 옷을 맡기러 왔다가도, 김 씨 앞에서는 속마음을 털어놓곤 했다. 김 씨에게는 남다른 능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옷에 묻은 얼룩뿐 아니라, 그 옷 주인이 지닌 마음의 얼룩, 즉 지우고 싶은 고민이나 아픈 상처 같은 것들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어느 늦은 오후, 앳된 얼굴의 청년이 잔뜩 구겨진 셔츠 한 장을 들고 세탁소 문을 열었다. 셔츠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검은 얼룩과 함께, 잔뜩 풀 죽은 기운이..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는 시간, 복잡한 도심 속 낡은 골목길 어귀엔 작은 불빛 하나가 사람들을 기다린다. 간판이라곤 닳고 닳은 나무판에 서툰 글씨로 쓰인 ‘온기 한 조각’이 전부인 빵집. 주인 민준 씨는 오늘도 어김없이 앞치마를 두르고 갓 구운 빵 냄새를 골목 안에 가득 채운다. 이곳은 빵 맛도 일품이지만, 그보다는 민준 씨의 말없는 위로를 찾아오는 이들이 더 많았다. 그는 화려한 언변을 가진 사람은 아니었다. 그저 찾아오는 손님들의 지친 어깨를, 굳게 다문 입술을, 때로는 붉어진 눈시울을 가만히 바라봐 줄 뿐이었다. 그리고는 말없이, 그날따라 유독 손님의 마음 같아 보이는 빵 한 조각을 내밀곤 했다. "어서 와요, 지연 씨. 오늘 유독 발걸음이 무거워 보이네." 단골손님인 지연 씨가 핼쑥한 얼굴로 들어..
밤의 추격자들 "야, 용전사! 힐 좀 똑바로 넣어 봐! 나 죽겠다!""아, 시끄러! 마나 딸린다고! 강철 방패, 너 어그로 제대로 끌어!" 밤 11시, 김민준은 헤드셋 너머로 들려오는 익숙한 고함 소리에 피식 웃으며 키보드를 두드렸다. 온라인 게임 '아르테미스 연대기' 속 그의 캐릭터 '용전사'는 오늘도 어김없이 길드 '밤의 추격자들'의 레이드를 지휘하고 있었다. 민준은 현실에선 평범한 중소기업 대리지만, 게임 속에서는 카리스마 넘치는 길드 마스터였다. "어휴, 오빠들 또 싸운다. 내가 다 보고 있다!" 힐러 '치유의 손길', 현실에서는 야간 근무 중 잠시 짬을 낸 간호사 박수현의 차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수현아, 저 둘 좀 말려봐. 시끄러워서 집중이 안 돼." 탱커 '강철 방패', 낮에는 건설 현장..
#1 스물여덟 민지에게 할머니는 언제나 부엌 한가운데 환하게 웃고 있는 모습으로 기억되었다. 특히 마을 잔치나 명절이면 어김없이 등장하던 할머니표 된장찌개는 그 자체로 축복이었다. 구수하면서도 깊은 맛, 뭔가 특별한 비법이 숨어 있는 듯한 그 찌개는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로 누구도 완벽하게 재현해내지 못하는 전설 같은 음식이 되어버렸다. 엄마도, 이모도, 심지어 동네에서 손맛 좋기로 소문난 반찬가게 아주머니조차 “아이고, 네 할머니 손맛은 못 따라가지. 그 양반은 손끝에 뭐가 달렸나벼.” 하고 혀를 내두를 뿐이었다. 올해도 어김없이 할머니의 기일이 다가오자, 민지는 문득 사무치는 그리움과 함께 그 된장찌개 맛이 간절해졌다. ‘마지막으로 할머니 찌개를 먹은 게 언제였더라…’ 기억조차 희미해진 맛을 떠올리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