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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선우에게 늘 잿빛이었다. 창밖으로 보이는 세상은 늘 소란스럽고 번잡했으며, 그 소란함의 파편이라도 자신에게 튈까 그는 늘 커튼 뒤에 숨어 지냈다. 사람들과 눈을 마주치는 것, 의미 없는 대화를 나누는 것, 그 모든 것이 버거웠다. 꼭 필요한 외출이 아니면 집 밖을 나서는 일은 드물었고, 어쩌다 마주치는 이웃에게는 목례조차 생략하기 일쑤였다. 배달 음식을 시켜 먹고, 필요한 물건은 전부 인터넷으로 주문하는 생활. 그의 세상은 모니터 화면과 창문 너머의 풍경, 그게 전부였다. 무엇이 그를 이렇게 만들었을까. 기억 저편 어딘가에 희미하게 남은 날카로운 말들, 차갑게 외면하던 눈빛들. 사람에게 받은 상처는 아물지 않고 딱지가 되어 그의 마음 전체를 뒤덮어 버렸다. 더 이상 상처받고 싶지 않다는 방어기..
#1:햇살마저 비껴가는 듯한 낡은 골목길 끝, ‘최소망 부동산’ 간판 옆으로 먼지 쌓인 유리창 너머 텅 빈 공간이 보였다. 몇 년째 비어 있다는 그 집은 회색빛 구도심의 풍경처럼 스산했다. 민준은 캔버스 대신 스마트폰 액정만 들여다보는 날이 늘었다. 미대 졸업 후 야심 차게 시작한 작업실은 월세를 감당 못 해 접은 지 오래. "야, 박민준. 너 또 땅 꺼져라 한숨이냐?" 동기였던 지훈의 톡 메시지가 울렸다. 천재 소리 듣던 코딩 능력으로 번듯한 회사에 들어갔지만, ‘부품’ 같은 삶에 염증을 느끼고 뛰쳐나온 참이었다. "답이 안 보여서 그런다, 왜." 민준의 답장엔 맥이 빠져 있었다. 그때, 지훈에게서 링크 하나가 날아왔다. '구도심 빈집, 청년들의 실험 공간으로! 참여자 모집'. 시큰둥하게 링크..
오래된 골목길 끝, 먼지 쌓인 폐가 담벼락 아래는 동네 꼬마들의 비밀 아지트였다. 이름하여 ‘꿈꾸는 다락방’. 실제 다락방은 아니었지만, 낡은 평상 하나와 비뚤어진 나무 상자 몇 개가 전부인 그곳에서 아이들은 세상을 다 가진 듯했다.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는 수현이, 콧노래를 흥얼거리길 좋아하는 민준이, 공상 소설 쓰기를 좋아하는 지우, 그리고 조금 느리지만 누구보다 반짝이는 눈을 가진 하늘이까지. 네 명의 아이들은 매일 해 질 녘이면 어김없이 그곳에 모였다. “어른들은 맨날 안 된대.” 민준이가 입을 삐죽 내밀며 투덜거렸다. 손에는 구겨진 악보가 들려 있었다. 동네 노래자랑 예선에서 또 떨어졌다는 이야기였다. 심사위원 아저씨는 ‘아직 어리다’는 말만 반복했다고 했다. “우리 엄마도 그래. 그림 그려서 ..
스마트폰 액정의 푸른빛만이 어둠을 밝히는 늦은 밤, 민준은 또다시 잠 못 이루고 있었다. 반복되는 일상, 의미를 찾기 힘든 회사 생활. 스물일곱의 그는 거대한 도시 속 외로운 섬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부터인가, 그의 고요한 세상에 미세한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낡은 한복 차림으로 길을 잃은 듯 두리번거리는 노인, 빅토리아 시대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드레스를 입고 당황한 표정의 여성, 미래적인 디자인의 옷을 입고 불안하게 주변을 살피는 청년… 처음에는 코스프레려니, 혹은 촬영 중이려니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이상한’ 사람들이 점점 더 자주 눈에 띄었고, 그들의 눈빛 속에는 연기가 아닌 진짜 당혹감과 절박함이 서려 있었다. 호기심 반, 알 수 없는 이끌림 반으로 그들의 뒤를 밟던 민준은 마침내 그들의..
햇살 좋은 골목길 모퉁이, ‘이야기가 머무는 집’이라는 작은 간판을 내건 서점이 있었다. 주인 강선우는 서점 이름처럼 늘 따뜻한 이야기와 웃음을 품고 사는 사람이었다. 그는 단순히 책을 파는 것을 넘어, 동네 사람들의 크고 작은 고민을 들어주고, 도움이 필요한 이웃에게는 망설임 없이 손을 내미는, 그런 사람이었다. "선우 씨, 우리 손주 녀석 읽을 만한 동화책 좀 골라줘요. 요즘 통 말을 안 들어서…." "아이고, 할머니 오셨어요? 그럼요, 요즘 딱 그 나이대 애들이 좋아할 만한 걸로 찾아놨죠! 잠깐만요." "선우 형, 저 이번에 면접 보는데… 혹시 정장 빌릴 만한 데 알아요?" "어이구, 우리 민수 취직하는구나! 걱정 마, 형 사이즈랑 비슷하니까, 내 거 빌려줄게. 세탁도 싹 해놨어." 선우의 서점은 ..
도시의 밤이 깊어갈수록 오히려 희미한 불빛을 밝히는 곳이 있었다. 간판도 눈에 띄지 않는 골목길 모퉁이, ‘달빛 머무는 곳’이라는 작은 나무 팻말이 전부인 카페였다. 이곳은 낮에는 굳게 문을 닫고 있다가, 해가 지고 가로등 불빛이 하나둘 켜질 무렵이면 어김없이 문을 열었다. 주인장 민준은 낮에는 평범한 회사원으로 살다가, 밤이 되면 이 작은 공간의 주인이 되었다. 그가 왜 이런 이중생활 같은 밤 카페를 운영하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아니, 굳이 묻지 않았다. 카페 안은 세상의 소음이 닿지 않는 듯 고요했다. 오래된 나무 테이블 몇 개와 푹신해 보이는 소파 하나, 그리고 벽면을 가득 채운 책장이 전부였지만, 공간을 감싸는 은은한 조명과 낮은 볼륨으로 흐르는 재즈 음악, 그리고 민준이 직접 내리는 커피 향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