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토록 가벼운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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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유의 세상은 언제나 타인의 감정이라는 옅은 안개로 뒤덮여 있었다. 그녀의 귀는 다른 사람의 한숨 소리에 유난히 밝았고, 그녀의 눈은 미간에 잡히는 미세한 주름을 기가 막히게 포착했다. 그래서 ‘괜찮아’는 지유의 오랜 습관이자, 거의 반사적으로 튀어나오는 말버릇이었다. 괜찮지 않을 때조차도.

 

“지유 씨, 미안한데 주말에 이 클라이언트 건 좀 맡아줄 수 있을까? 내가 급한 집안일이 생겨서.”

 

금요일 오후, 퇴근을 삼십 분 앞두고 팀장이 난처한 얼굴로 다가왔다. 지유의 머릿속에서는 주말 내내 보기로 약속했던 영화와, 새로 산 책과, 모처럼의 늦잠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갔다. 입술이 떨어지기 전, 수만 가지 생각이 오갔다.

 

‘팀장님도 오죽하면 나한테 부탁하시겠어. 집안에 무슨 일 있으신가 보네. 내가 조금만 고생하면 다들 편한 거잖아.’

결국 입 밖으로 나온 말은 정해져 있었다.

 

“네, 팀장님. 괜찮아요. 제가 할게요.”

 

팀장의 얼굴에 화색이 도는 것을 보며 지유는 희미하게 웃었다. 또다시 가슴 한구석이 묵직하게 내려앉는 것을 애써 무시하면서. 그녀의 ‘괜찮음’은 언제나 이런 식이었다. 자신을 깎아내 타인의 공간을 메워주는, 소모적인 퍼즐 조각 같은 것.

 

 

그 주말, 지유는 약속이라도 한 듯 동네 카페 구석 자리에 앉아 노트북을 켰다. 창밖은 눈부시게 화창한데, 화면 속 보고서는 끝이 보이지 않았다. 그때였다.

 

“그렇게 맛없는 표정으로 마시는 커피는 처음 보네요.”

 

나지막하고 장난기 섞인 목소리에 고개를 들자, 카페 주인인 도윤이 쟁반을 든 채 서 있었다. 그는 갓 구운 스콘 하나를 그녀의 테이블에 슬쩍 내려놓으며 말했다.

 

“이건 서비스. 너무 쓰게 일하는 것 같아서.”

“아… 감사합니다.” 지유는 당황하며 꾸벅 고개를 숙였다.

“근데 진짜 괜찮아요? 아까부터 표정이 거의 세상 종말 5분 전이던데.”

 

 

‘괜찮냐’는 질문은 늘 듣던 것이었지만, 도윤의 질문은 결이 달랐다. 보통은 의례적인 인사였지만, 그의 눈은 진심으로 ‘너의 상태’를 묻고 있었다. 지유는 자기도 모르게 대답했다.

 

“아니요. 사실은… 좀 힘들어요.”

 

평생 처음으로 낯선 사람에게, 아니 어쩌면 자기 자신에게 처음으로 내뱉은 솔직한 말이었다. 그 한마디에 둑이라도 터진 듯, 주말 약속을 포기한 이야기, 거절하지 못해 떠안은 업무 이야기를 주절주절 늘어놓았다. 도윤은 그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들어주었다.

지유의 이야기가 끝났을 때, 그는 의외의 말을 건넸다.

 

“혹시 ‘싫어요’라는 말, 해본 적 있어요?”

“네? 아뇨… 그건 좀 무례하잖아요.”

“왜요? 내 감정을 표현하는 게 왜 무례한 거죠?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하면서 속으로 상대를 미워하는 것보다야 백배 낫지 않나?”

 

도윤은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지유 씨는 너무 착해서 탈이에요. 착한 건 좋은 건데, 스스로를 돌보지 않는 착함은 독이에요. 자신한테 주는 독.”

그의 말은 날카로운 바늘처럼 지유의 마음 가장 아픈 곳을 찔렀다. 늘 희미하게 느끼고 있었지만, 감히 들여다볼 용기가 없었던 진실이었다.

 

“한번 해봐요. 아주 사소한 거라도 좋으니까. ‘싫다’고 말하는 연습. 예를 들면, 제가 지금 이 스콘을 다시 가져가겠다고 하면 ‘싫어요, 제가 먹을 거예요’라고 말하는 거죠.”

 

지유는 그의 엉뚱한 제안에 피식 웃고 말았다. 잿빛이던 주말에 처음으로 들어온 작은 색채였다. 그날 이후, 지유는 도윤의 카페를 매일같이 드나들었다. 그와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은 유일하게 안개를 걷어내고 자기 자신을 마주하는 시간이었다. ‘싫다’고 말하는 연습은 여전히 어려웠지만, 마음속으로나마 수십 번씩 되뇌었다. ‘이건 싫어. 저것도 싫어.’

 

진짜 시험대는 예고 없이 찾아왔다. 몇 주 뒤, 중요한 프로젝트를 막 끝낸 금요일이었다. 모두가 축제 분위기일 때, 그 팀장이 또다시 지유에게 다가왔다.

 

 

“지유 씨, 정말 미안한데… 이번 주말에 최종 보고서 정리 좀… 알지? 지유 씨가 제일 꼼꼼하잖아.”

 

익숙한 상황, 익숙한 부탁. 지유의 심장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동료들의 눈치가 보였고, 팀장의 기대 어린 얼굴이 시야에 가득 찼다. 머릿속에서는 ‘어쩔 수 없지’, ‘이번 한 번만 더’라는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때, 문득 도윤의 얼굴이 떠올랐다. ‘스스로를 돌보지 않는 착함은 독이에요.’

지유는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그리고 아주 작은, 그러나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팀장님, 죄송합니다.”

 

사무실의 모든 소음이 거짓말처럼 멎었다.

 

“이번 주말은 좀 힘들 것 같아요. 저도 이번 프로젝트 때문에 내내 야근해서, 주말에는 꼭 쉬어야 할 것 같습니다.”

 

정적이 흘렀다. 지유는 심장이 터져버릴 것 같았다. 팀장의 얼굴이 굳어지는 게 보였다. 이제 나는 미움받을 거야, 이기적인 사람으로 낙인찍히겠지. 온갖 부정적인 생각들이 그녀를 덮쳤다.

 

하지만 팀장의 입에서 나온 말은 의외였다.

 

“어… 그래? 아, 하긴 지유 씨가 제일 고생했지. 알았어. 다른 사람 찾아볼게. 푹 쉬어.”

 

 

그는 조금 어색하게 어깨를 툭툭 두드리고는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동료 중 하나는 지유를 향해 슬쩍 엄지를 들어 보였다. 세상은 무너지지 않았다. 관계는 끊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무언가 단단하게 제자리를 찾은 기분이었다.

 

그날 저녁, 지유는 홀가분한 발걸음으로 도윤의 카페를 찾았다. 문을 열고 들어서는 그녀의 얼굴을 보자마자 도윤이 활짝 웃었다.

 

“무슨 좋은 일 있어요? 표정이 날아갈 것 같은데.”

 

지유는 그제야 긴장이 풀리며 눈에 눈물이 그렁 맺혔다. 그리고는 세상에서 가장 밝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저, 오늘 처음으로 ‘싫다’고 말했어요.”

 

그 한마디에 모든 것이 담겨 있었다. 두려움, 용기, 그리고 마침내 찾아온 해방감. 

 

 

그토록 무거울 줄 알았던 '싫다'는 말 한마디가, 실은 세상을 들어 올릴 만큼 가벼운 날개였다는 것을. 

 

그녀는 이제야 깨달았다. 자신의 감정을 존중하는 것이야말로, 타인과 진정으로 건강한 관계를 맺는 첫걸음이라는 것을.

도윤은 따뜻한 라떼 한 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봐요, 세상 무너지지 않았죠? 이제 겨우 첫 깃털을 얻은 거예요. 앞으로 훨훨 날 일만 남았네.”

 

지유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창밖으로 보이는 저녁노을이 꼭 그녀의 새로운 마음처럼, 따뜻하고 가벼워 보였다.

 

 

소설에 대한 심리학적 분석

  1. 자기 주장 훈련 (Assertiveness Training): 이 소설은 주인공 지유가 수동적이고 비주장적인 태도에서 벗어나 자기 주장을 하는 사람으로 성장하는 과정을 명확히 보여줍니다. 처음에는 자신의 욕구나 감정을 억누르고 타인의 요구를 무조건 수용하는 모습(팀장의 부당한 요구 수락)을 보이지만, 도윤이라는 조력자를 만나 ‘싫다’고 말하는 연습을 시작합니다. 클라이맥스에서 팀장의 요구를 거절하는 장면은, 자신의 권리를 존중하고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하는 자기 주장 행동의 성공적인 실행 사례입니다. 이는 단순한 거절이 아니라, 자신의 상태를 설명하며 상대방의 감정을 배려하는 성숙한 방식의 주장이라는 점에서 중요합니다.
  2. 인지적 재구성 (Cognitive Restructuring): 지유는 ‘거절하면 미움받을 것이고 관계가 망가질 것’이라는 비합리적인 신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는 사회적 관계에서 거절에 대한 과도한 불안과 두려움을 유발하는 핵심적인 인지 왜곡입니다. 도윤과의 대화와 내면적 연습을 통해 이 신념에 도전하게 되고, 마침내 실제로 거절을 했을 때 세상이 무너지지 않는다는 경험(팀장의 의외의 수용, 동료의 지지)을 합니다. 이 경험은 ‘나의 감정과 권리를 주장해도 괜찮다’는 새로운 합리적 신념을 형성하게 하는 강력한 계기가 되며, 이는 인지행동치료의 핵심 원리인 인지적 재구성에 해당합니다.
  3. 사회적 학습 이론 (Social Learning Theory): 도윤은 지유의 변화 과정에서 중요한 ‘모델’의 역할을 합니다. 그는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고 자연스럽게 표현하는 모습을 직접 보여줌으로써(모델링), 지유에게 새로운 행동 양식을 제시합니다. 또한 “해봐요”, “괜찮아요” 와 같은 언어적 격려와 긍정적인 피드백(강화)을 통해 지유가 새로운 행동(자기 주장)을 시도하도록 동기를 부여합니다. 지유가 도윤의 행동과 철학을 관찰하고, 이를 내면화하여 실제 상황에 적용하는 과정은 알버트 반두라가 제시한 사회적 학습 이론으로 효과적으로 설명될 수 있습니다.
  4. 외상 후 성장 (Post-Traumatic Growth): 여기서 '외상'은 극적인 사건이 아니라, 타인에게 맞추기 위해 끊임없이 자신을 억눌러온 만성적인 스트레스와 정서적 고통을 의미합니다. 지유는 이러한 고통스러운 상태를 단순히 견디는 것을 넘어, 이를 계기로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더 건강한 대인관계 방식과 자기 존중감을 배우게 됩니다. 이는 고통스러운 경험을 통해 오히려 긍정적인 심리적 변화와 성숙을 이루는 외상 후 성장의 한 형태로 볼 수 있습니다.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것의 가치를 깨닫고 ‘가벼운 마음’을 얻게 된 결말은 이러한 성장의 명백한 증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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