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린 날의 고백

반응형

.

 

그 사람은 늘 흐린 날에만 나타났다. 장마가 시작되면 어김없이 우리 동네 작은 도서관 창가 자리에 나타났고, 가을 안개가 자욱한 날이면 공원 벤치에 앉아있었다. 우리는 그렇게 만났다.

 

비 오는 날 함께 우산을 쓰고 걷거나, 잿빛 하늘 아래에서 말없이 커피를 마셨다. 그와 함께하는 시간은 고요하고, 편안했으며, 어딘지 모르게 애틋했다.

 

"햇살 좋은 날은 뭐해요?"

 

언젠가 내가 넌지시 물었을 때, 그는 희미하게 웃으며 찻잔만 내려다볼 뿐이었다.

 

"그냥… 할 일이 좀 있어서."

 

그의 세상엔 햇빛이 없는 것 같았다. 밝고 화창한 날이면 그는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연락처도, 사는 곳도 모르는 나는 그저 다음 흐린 날을 기다리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사람들은 그를 '흐린 날의 신사'라고 불렀지만, 내게 그는 그저 아픈 손가락 같은 남자, 민준 씨였다.

 

우리의 관계는 잿빛 하늘 아래에서만 안전했다. 서로의 취향이나 사소한 습관에 대해 알아가면서 감정은 짙어졌지만, 우리의 세계는 거기까지였다. 맑은 날은 우리에게 허락되지 않은 시간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며칠째 이어지던 가을비가 막 그치고, 구름이 듬성듬성 떠 있던 날이었다. 우리는 평소처럼 공원 벤치에 앉아 따뜻한 캔커피를 나눠 마시고 있었다.

 

그의 옆모습을 바라보는데, 문득 이 사람의 맑은 날이 궁금해 미칠 것 같았다. 햇살 아래에서 웃는 모습은 어떨까. 눈부심에 살짝 찡그린 얼굴은 어떨까.

 

그때였다. 얄궂게도, 두꺼운 구름 사이로 강렬한 햇살 한 줄기가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렸다. 갑작스러운 빛에 내가 눈을 찡그리며 그의 옆을 봤을 때, 나는 숨을 멈췄다. 그의 얼굴은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평온하던 눈동자는 공포에 질린 듯 잘게 떨렸고, 손에 들고 있던 커피캔을 놓쳐 바닥에 뒹굴었다.

 

"민준 씨…?"
"…미안해요."

 

그는 짧은 한마디를 내뱉고는 도망치듯 자리를 떠났다. 그 뒷모습은 상처 입은 짐승처럼 위태로워 보였다. 나는 차마 그를 붙잡지 못하고, 그가 사라진 길목과 우리 발치에 쏟아지는 햇살을 번갈아 볼 뿐이었다. 그날 이후, 길었던 장마가 끝나고 눈부시게 맑은 날들이 이어졌다. 그리고 그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의 부재는 흐린 날보다 더 시렸다. 나는 그가 왜 햇빛을 두려워하는지 알아야만 했다. 그가 마지막으로 읽던 책을 도서관에서 찾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책장을 넘겼다.

 

책갈피처럼 끼워진 낡은 신문기사 조각 하나. ‘빗길 교통사고, 안타까운 10대 소녀의 죽음… 운전자는 큰 충격’ 흐릿한 사진 속에는 앳된 얼굴의 민준 씨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날짜는 5년 전, 눈부시게 맑았던 7월의 어느 날이었다.

 

모든 조각이 맞춰졌다. 나는 수소문 끝에 그가 지내는 작은 원룸을 찾아냈다. 문을 두드리자, 한참 만에 익숙한 얼굴이 나타났다. 햇빛이 닿지 않는 어두운 방 안에서 그는 유령처럼 서 있었다.

 

"어떻게…"
"얘기해줘요. 왜 혼자 아파해요."

 

내 말에 그의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렸다. 그는 한참을 망설이다, 아주 작은 목소리로 자신의 과거를 털어놓았다. 5년 전 그날, 눈부신 햇살에 순간적으로 눈이 멀어 핸들을 잘못 꺾었다고. 그 사고로 뒷자리에 탔던,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던 여동생을 잃었다고.

 

"햇빛만 보면… 그날이 생각나요. 내 실수로 동생을… 그래서 나는 밝은 곳에 있을 자격이 없는 사람이에요."

 

그의 목소리는 죄책감과 슬픔으로 갈라져 있었다. 나는 가만히 그의 손을 잡았다.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그건 민준 씨 잘못이 아니에요."
"…."
"자책은 이제 그만해요. 당신 탓이 아니야."

 

나는 그의 손을 잡고 현관으로 이끌었다. 그는 필사적으로 버텼지만, 나는 놓지 않았다.

 

“싫어요… 난…”
“나 좀 봐줘요. 나랑 같이, 딱 1분만.”

나는 문을 열었다. 눈부신 오후의 햇살이 복도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그는 고통스럽게 눈을 감았지만, 나는 그의 손을 더 꽉 잡았다. 그의 떨림이 내게도 전해졌다.

 

“괜찮아요. 내가 옆에 있잖아요.”

 

한참이 지났을까. 그의 떨림이 조금씩 잦어들었다. 그가 천천히, 아주 천천히 눈을 떴다. 햇살이 그의 젖은 속눈썹에 닿아 반짝였다. 그는 나를, 햇살 속에 서 있는 나를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는 더 이상 공포가 아닌, 깊은 슬픔과… 애정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그는 아주 조용히, 내게 고백했다.

 

"나는 그냥… 당신의 세상에 나의 어둠을 묻히고 싶지 않았던 겁쟁이였어요."

 

그의 말에 나는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그의 어둠까지 사랑할 준비가 되어있다고, 당신의 흐린 날이 되어주겠다고 말하고 싶었다. 우리는 한참 동안 그렇게 햇살 속에서 서로를 마주 보고 서 있었다. 그의 세상에 마침내, 아주 오랜만에 빛이 들고 있었다.


소설에 대한 심리학적 분석

  1.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PTSD)와 트라우마 재경험: 민준이 햇빛을 극도로 회피하는 행동은 전형적인 PTSD 증상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5년 전 여동생을 잃은 교통사고가 일어난 '맑은 날'과 '햇빛'은 그에게 강력한 트라우마 유발 요인(Trigger)으로 작용합니다. 햇빛에 노출되었을 때 창백해지며 공황 상태를 보이고 도망치는 모습은, 과거의 끔찍한 기억과 감정이 현재로 되살아나는 '재경험(Re-experiencing)' 증상을 명확히 보여줍니다. 그는 자신의 세상을 '어둠'으로 규정하며 햇빛(과거의 고통)으로부터 자신을 격리시키는 방어기제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2. 생존자 죄책감 (Survivor's Guilt): 민준은 사고에서 혼자 살아남았다는 사실에 대해 깊은 죄책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나는 밝은 곳에 있을 자격이 없는 사람"이라는 그의 대사는 생존자 죄책감의 핵심적인 심리를 드러냅니다. 그는 스스로 행복이나 밝음을 누리는 것을 일종의 배신 행위로 간주하며, 무의식적으로 자기 자신을 처벌(self-punishment)하고 있습니다. 흐린 날에만 타인과 관계를 맺는 것은, 자신의 삶을 고통스러웠던 과거에 묶어두고 스스로에게 '밝음'과 '행복'을 허락하지 않으려는 심리적 기제의 발현입니다.
  3. 애착 이론과 교정적 정서 체험 (Corrective Emotional Experience): 주인공 '나'와의 관계는 민준에게 중요한 심리적 전환점이 됩니다. 민준의 회피적이고 불안정한 관계 패턴(흐린 날에만 만남)은 트라우마로 인한 대인관계 기피에서 비롯됩니다. 하지만 주인공은 그의 회피에도 불구하고 끈기 있게 기다려주고, 그의 비밀을 알게 된 후에도 비난 대신 수용과 위로를 건넵니다. 이는 민준에게 '교정적 정서 체험'을 제공합니다. 즉, 타인과 깊은 관계를 맺는 것이 또 다른 상처가 될 것이라는 그의 믿음을 깨고, 안전하고 신뢰할 수 있는 애착 관계가 가능하다는 것을 경험하게 해준 것입니다. 주인공의 손을 잡고 함께 햇빛으로 나아가는 마지막 장면은, 이 안정적인 애착 관계가 트라우마 극복의 결정적인 발판이 되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728x90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