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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 중반의 민준에게 세상은 온통 회색이었다. 한때는 세상의 모든 색을 캔버스에 담겠다며 밤새 붓을 놓지 않던 시절도 있었지만, 이제는 디자인 회사에서 마우스 클릭 몇 번으로 규격화된 이미지를 뽑아내는 게 일상의 전부였다. 월급은 통장을 스쳐 갈 뿐이었고, 어릴 적 꿈은 빛바랜 사진처럼 기억 저편으로 희미해져 갔다. 주말이면 텅 빈 캔버스 앞에 앉아보기도 했지만, 붓을 쥔 손은 허공에서 길을 잃기 일쑤였다. 뭘 그려야 할지, 아니, 뭘 그리고 싶었는지조차 가물가물했다. 그러던 어느 토요일 오후였다. 답답한 마음에 집 앞 공원 벤치에 멍하니 앉아 있는데, 저만치에서 꼬마 아이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예닐곱 살쯤 되었을까. 다리가 조금 불편한지 절뚝거리면서도, 낡은 스케치북에 코를 박고 무언가를 열심히 그..
새벽 공기가 차갑게 코끝을 스치는 시간.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도시 한 귀퉁이, 낡고 빛바랜 초록색 지붕을 인 버스 정류장에는 어김없이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매일 같은 시간, 같은 버스를 기다리는 익숙한 얼굴들. 하지만 그들은 서로에게 투명 인간이나 다름없었다. 각자의 시름과 상념에 잠겨 묵묵히 버스만을 기다릴 뿐, 따스한 눈인사조차 나누지 않는 삭막한 풍경이 몇 해째 이어지고 있었다. 그 중심에는 박 씨 할머니가 있었다. 허리가 살짝 굽었지만, 새벽 시장에 나가는 발걸음만큼은 언제나 꼿꼿했다. 매일 첫차를 타고 나가 좌판이라도 벌어야 겨우 손주들 간식거리라도 사줄 수 있다며, 할머니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정류장을 지켰다. 곁에는 늘 김민준이라는 청년이 서 있었다. 말끔하게 다려 입은 정장 ..
#1. 1998년 여름, 볕 좋은 오후였다. 낡은 빌라들이 어깨를 맞댄 골목길은 매미 소리로 자글자글 끓었다. 민준과 수현은 그 골목길의 왕과 여왕이었다. 딱지치기, 술래잡기, 땅따먹기… 해가 질 때까지 둘은 그림자처럼 붙어 다녔다. 민준의 아버지가 지방으로 발령 나기 전까지는. “진짜 가는 거야? 아주?” 수현의 까만 눈동자가 금방이라도 넘칠 듯 그렁거렸다. 민준은 애써 씩씩한 척 고개를 끄덕였다. 목이 메어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야, 울지 마. 내가 편지할게. 맨날 할게.”“거짓말. 멀리 가면 다 잊어버릴 거면서.”“아니야! 나중에 어른 되면, 내가 꼭 너 찾으러 올게! 약속!” 민준은 며칠 전 강가에서 주운, 유난히 반짝이던 조약돌을 수현의 작은 손에 쥐여주었다. 수현은 울음을 꾹 참으며 민..
세상은 선우에게 늘 잿빛이었다. 창밖으로 보이는 세상은 늘 소란스럽고 번잡했으며, 그 소란함의 파편이라도 자신에게 튈까 그는 늘 커튼 뒤에 숨어 지냈다. 사람들과 눈을 마주치는 것, 의미 없는 대화를 나누는 것, 그 모든 것이 버거웠다. 꼭 필요한 외출이 아니면 집 밖을 나서는 일은 드물었고, 어쩌다 마주치는 이웃에게는 목례조차 생략하기 일쑤였다. 배달 음식을 시켜 먹고, 필요한 물건은 전부 인터넷으로 주문하는 생활. 그의 세상은 모니터 화면과 창문 너머의 풍경, 그게 전부였다. 무엇이 그를 이렇게 만들었을까. 기억 저편 어딘가에 희미하게 남은 날카로운 말들, 차갑게 외면하던 눈빛들. 사람에게 받은 상처는 아물지 않고 딱지가 되어 그의 마음 전체를 뒤덮어 버렸다. 더 이상 상처받고 싶지 않다는 방어기..
오래된 골목길 끝, 먼지 쌓인 폐가 담벼락 아래는 동네 꼬마들의 비밀 아지트였다. 이름하여 ‘꿈꾸는 다락방’. 실제 다락방은 아니었지만, 낡은 평상 하나와 비뚤어진 나무 상자 몇 개가 전부인 그곳에서 아이들은 세상을 다 가진 듯했다.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는 수현이, 콧노래를 흥얼거리길 좋아하는 민준이, 공상 소설 쓰기를 좋아하는 지우, 그리고 조금 느리지만 누구보다 반짝이는 눈을 가진 하늘이까지. 네 명의 아이들은 매일 해 질 녘이면 어김없이 그곳에 모였다. “어른들은 맨날 안 된대.” 민준이가 입을 삐죽 내밀며 투덜거렸다. 손에는 구겨진 악보가 들려 있었다. 동네 노래자랑 예선에서 또 떨어졌다는 이야기였다. 심사위원 아저씨는 ‘아직 어리다’는 말만 반복했다고 했다. “우리 엄마도 그래. 그림 그려서 ..
햇살 좋은 골목길 모퉁이, ‘이야기가 머무는 집’이라는 작은 간판을 내건 서점이 있었다. 주인 강선우는 서점 이름처럼 늘 따뜻한 이야기와 웃음을 품고 사는 사람이었다. 그는 단순히 책을 파는 것을 넘어, 동네 사람들의 크고 작은 고민을 들어주고, 도움이 필요한 이웃에게는 망설임 없이 손을 내미는, 그런 사람이었다. "선우 씨, 우리 손주 녀석 읽을 만한 동화책 좀 골라줘요. 요즘 통 말을 안 들어서…." "아이고, 할머니 오셨어요? 그럼요, 요즘 딱 그 나이대 애들이 좋아할 만한 걸로 찾아놨죠! 잠깐만요." "선우 형, 저 이번에 면접 보는데… 혹시 정장 빌릴 만한 데 알아요?" "어이구, 우리 민수 취직하는구나! 걱정 마, 형 사이즈랑 비슷하니까, 내 거 빌려줄게. 세탁도 싹 해놨어." 선우의 서점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