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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밖으로 나른한 햇살이 길게 늘어지던 오후 네 시. 우리 집 작은 거실에는 언제나처럼 은은한 홍차 향기가 감돌았다. 지수는 창가 흔들의자에 앉아 뜨개질을 하고 있었고, 나는 맞은편 소파에 기대앉아 오래된 소설책 페이지를 넘기고 있었다. 특별할 것 없는 일상이었지만, 그 어떤 화려한 순간보다 충만하고 평화로운 시간이었다. "현우 씨, 이 부분 문장이 참 좋네요. '우리는 모두 시간 여행자다. 매일 과거와 미래 사이를 오가며, 현재라는 아주 작은 점 위에 서 있을 뿐이라고.'" 지수가 뜨개질을 잠시 멈추고 나를 보며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오후 햇살처럼 따스했다. "음, 그러게. 마치 우리 이야기 같지 않아? 매일 오후 네 시, 이 시간만큼은 세상 모든 시름을 잊고 딱 이 순간에만 머무는 것 같잖아." 나..
차가운 바람이 옷깃을 파고드는 늦가을, 하영은 세상의 모든 온기가 자신만 비껴가는 것 같다고 느꼈다. 낡은 원룸 창밖으로 보이는 회색 도시 풍경처럼, 그녀의 삶도 빛바랜 흑백 사진 같았다. 몇 년 전 불의의 사고로 부모님을 잃고 홀로 짊어진 삶의 무게는 스물넷의 어깨에는 너무 버거웠다. 대학은 휴학한 지 오래였고, 닥치는 대로 아르바이트를 하며 하루하루를 버텨냈다. 웃음은 사치가 되었고, 눈물은 일상이 되었다. 그날도 편의점 야간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새벽 찬 공기를 가르며 집으로 향하던 길이었다. 골목길 모퉁이를 돌아서는데, 어디선가 잔잔한 기타 소리가 들려왔다. 소리를 따라 몇 걸음 옮기자, 가로등 불빛 아래 낡은 벤치에 앉아 기타를 치는 남자가 보였다. 그는 마치 바람처럼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은 ..
까만 밤하늘을 도화지 삼아 별들이 콕콕 박혀 있던 여름밤이었다. 열 살 남짓한 여자아이가 강가 풀밭에 쪼그리고 앉아 두 손을 꼭 모으고 있었다. 앳된 얼굴엔 간절함이 가득했다. "제발… 제발 우리 수호, 안 아프게 해주세요." 수현이었다. 얼마 전부터 시름시름 앓기 시작한 남동생 걱정에 어린 마음은 까맣게 타들어 가고 있었다. 오늘 밤 유성우가 쏟아진다는 라디오 방송을 듣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엄마 몰래 집을 빠져나온 참이었다. 별똥별에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다는 말을 철석같이 믿었던 게다. 그때, 하늘을 가로지르며 긴 꼬리를 그리는 별똥별 하나가 나타났다. "앗!" 수현은 저도 모르게 탄성을 내지르며 눈을 질끈 감았다. ‘우리 수호, 제발….’ 수현이 소원에 온 정신을 집중하는 동안, 조금 떨어진 나무..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는 시간, 복잡한 도심 속 낡은 골목길 어귀엔 작은 불빛 하나가 사람들을 기다린다. 간판이라곤 닳고 닳은 나무판에 서툰 글씨로 쓰인 ‘온기 한 조각’이 전부인 빵집. 주인 민준 씨는 오늘도 어김없이 앞치마를 두르고 갓 구운 빵 냄새를 골목 안에 가득 채운다. 이곳은 빵 맛도 일품이지만, 그보다는 민준 씨의 말없는 위로를 찾아오는 이들이 더 많았다. 그는 화려한 언변을 가진 사람은 아니었다. 그저 찾아오는 손님들의 지친 어깨를, 굳게 다문 입술을, 때로는 붉어진 눈시울을 가만히 바라봐 줄 뿐이었다. 그리고는 말없이, 그날따라 유독 손님의 마음 같아 보이는 빵 한 조각을 내밀곤 했다. "어서 와요, 지연 씨. 오늘 유독 발걸음이 무거워 보이네." 단골손님인 지연 씨가 핼쑥한 얼굴로 들어..
서른 중반의 민준에게 세상은 온통 회색이었다. 한때는 세상의 모든 색을 캔버스에 담겠다며 밤새 붓을 놓지 않던 시절도 있었지만, 이제는 디자인 회사에서 마우스 클릭 몇 번으로 규격화된 이미지를 뽑아내는 게 일상의 전부였다. 월급은 통장을 스쳐 갈 뿐이었고, 어릴 적 꿈은 빛바랜 사진처럼 기억 저편으로 희미해져 갔다. 주말이면 텅 빈 캔버스 앞에 앉아보기도 했지만, 붓을 쥔 손은 허공에서 길을 잃기 일쑤였다. 뭘 그려야 할지, 아니, 뭘 그리고 싶었는지조차 가물가물했다. 그러던 어느 토요일 오후였다. 답답한 마음에 집 앞 공원 벤치에 멍하니 앉아 있는데, 저만치에서 꼬마 아이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예닐곱 살쯤 되었을까. 다리가 조금 불편한지 절뚝거리면서도, 낡은 스케치북에 코를 박고 무언가를 열심히 그..
새벽 공기가 차갑게 코끝을 스치는 시간.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도시 한 귀퉁이, 낡고 빛바랜 초록색 지붕을 인 버스 정류장에는 어김없이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매일 같은 시간, 같은 버스를 기다리는 익숙한 얼굴들. 하지만 그들은 서로에게 투명 인간이나 다름없었다. 각자의 시름과 상념에 잠겨 묵묵히 버스만을 기다릴 뿐, 따스한 눈인사조차 나누지 않는 삭막한 풍경이 몇 해째 이어지고 있었다. 그 중심에는 박 씨 할머니가 있었다. 허리가 살짝 굽었지만, 새벽 시장에 나가는 발걸음만큼은 언제나 꼿꼿했다. 매일 첫차를 타고 나가 좌판이라도 벌어야 겨우 손주들 간식거리라도 사줄 수 있다며, 할머니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정류장을 지켰다. 곁에는 늘 김민준이라는 청년이 서 있었다. 말끔하게 다려 입은 정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