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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선우에게 늘 잿빛이었다. 창밖으로 보이는 세상은 늘 소란스럽고 번잡했으며, 그 소란함의 파편이라도 자신에게 튈까 그는 늘 커튼 뒤에 숨어 지냈다. 사람들과 눈을 마주치는 것, 의미 없는 대화를 나누는 것, 그 모든 것이 버거웠다. 꼭 필요한 외출이 아니면 집 밖을 나서는 일은 드물었고, 어쩌다 마주치는 이웃에게는 목례조차 생략하기 일쑤였다. 배달 음식을 시켜 먹고, 필요한 물건은 전부 인터넷으로 주문하는 생활. 그의 세상은 모니터 화면과 창문 너머의 풍경, 그게 전부였다. 무엇이 그를 이렇게 만들었을까. 기억 저편 어딘가에 희미하게 남은 날카로운 말들, 차갑게 외면하던 눈빛들. 사람에게 받은 상처는 아물지 않고 딱지가 되어 그의 마음 전체를 뒤덮어 버렸다. 더 이상 상처받고 싶지 않다는 방어기..
오래된 골목길 끝, 먼지 쌓인 폐가 담벼락 아래는 동네 꼬마들의 비밀 아지트였다. 이름하여 ‘꿈꾸는 다락방’. 실제 다락방은 아니었지만, 낡은 평상 하나와 비뚤어진 나무 상자 몇 개가 전부인 그곳에서 아이들은 세상을 다 가진 듯했다.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는 수현이, 콧노래를 흥얼거리길 좋아하는 민준이, 공상 소설 쓰기를 좋아하는 지우, 그리고 조금 느리지만 누구보다 반짝이는 눈을 가진 하늘이까지. 네 명의 아이들은 매일 해 질 녘이면 어김없이 그곳에 모였다. “어른들은 맨날 안 된대.” 민준이가 입을 삐죽 내밀며 투덜거렸다. 손에는 구겨진 악보가 들려 있었다. 동네 노래자랑 예선에서 또 떨어졌다는 이야기였다. 심사위원 아저씨는 ‘아직 어리다’는 말만 반복했다고 했다. “우리 엄마도 그래. 그림 그려서 ..
햇살 좋은 골목길 모퉁이, ‘이야기가 머무는 집’이라는 작은 간판을 내건 서점이 있었다. 주인 강선우는 서점 이름처럼 늘 따뜻한 이야기와 웃음을 품고 사는 사람이었다. 그는 단순히 책을 파는 것을 넘어, 동네 사람들의 크고 작은 고민을 들어주고, 도움이 필요한 이웃에게는 망설임 없이 손을 내미는, 그런 사람이었다. "선우 씨, 우리 손주 녀석 읽을 만한 동화책 좀 골라줘요. 요즘 통 말을 안 들어서…." "아이고, 할머니 오셨어요? 그럼요, 요즘 딱 그 나이대 애들이 좋아할 만한 걸로 찾아놨죠! 잠깐만요." "선우 형, 저 이번에 면접 보는데… 혹시 정장 빌릴 만한 데 알아요?" "어이구, 우리 민수 취직하는구나! 걱정 마, 형 사이즈랑 비슷하니까, 내 거 빌려줄게. 세탁도 싹 해놨어." 선우의 서점은 ..
도시의 밤이 깊어갈수록 오히려 희미한 불빛을 밝히는 곳이 있었다. 간판도 눈에 띄지 않는 골목길 모퉁이, ‘달빛 머무는 곳’이라는 작은 나무 팻말이 전부인 카페였다. 이곳은 낮에는 굳게 문을 닫고 있다가, 해가 지고 가로등 불빛이 하나둘 켜질 무렵이면 어김없이 문을 열었다. 주인장 민준은 낮에는 평범한 회사원으로 살다가, 밤이 되면 이 작은 공간의 주인이 되었다. 그가 왜 이런 이중생활 같은 밤 카페를 운영하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아니, 굳이 묻지 않았다. 카페 안은 세상의 소음이 닿지 않는 듯 고요했다. 오래된 나무 테이블 몇 개와 푹신해 보이는 소파 하나, 그리고 벽면을 가득 채운 책장이 전부였지만, 공간을 감싸는 은은한 조명과 낮은 볼륨으로 흐르는 재즈 음악, 그리고 민준이 직접 내리는 커피 향이..
회색 빌딩 숲 사이를 빠져나가는 퇴근길은 언제나처럼 무미건조했다. 이어폰 너머로 흘러나오는 아이돌 음악도, 스마트폰 화면 속 시끌벅적한 세상사도 수현의 마음을 달래주지 못했다. 스물아홉, 딱히 불행할 것도 없지만 그렇다고 행복하다고 말하기도 애매한, 그런 날들의 연속이었다. 오늘도 어김없이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던 그때였다. 어디선가, 아주 낡고 깊은 소리가 흘러나왔다. 익숙한 전자음이 아닌, 나무 울림통을 타고 번지는 진짜 피아노 소리였다. 소리는 번화가 한쪽 구석, 낡은 상점들 앞에 놓인 낡은 업라이트 피아노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허리를 조금 구부린 채 건반 위에 마른 손가락을 올리고 있었다. 주변의 소음과 어울리지 않는, 너무나도 서정적이고 아름다운 멜로디. 하지만 그 안에는..
서른을 갓 넘긴 지우에게 밤하늘은 그저 까만 도화지일 뿐이었다. 빼곡한 빌딩 숲 사이로 간신히 얼굴을 내민 달과, 그마저도 희미한 몇 개의 별. 어린 시절, 온 세상을 담은 듯 반짝이던 밤하늘은 더 이상 그녀의 것이 아니었다. 회색빛 도시의 소음과 고단한 하루의 무게만이 어깨를 짓누르는 밤이 반복될 뿐이었다. 가끔, 아주 가끔 지우는 생각했다. 풀벌레 소리 자지러지던 시골집 앞마당에서, 돗자리를 펴고 나란히 누워 밤하늘을 올려다보던 그 아이를. 민준이. 세상의 모든 별을 다 셀 기세로 손가락을 꼽던 아이. 천문학자가 되어 우주의 비밀을 밝혀내겠다며 눈을 빛내던 소년. 그리고 그 옆에서, 밤하늘처럼 까맣고 깊은 민준의 눈동자를 더 열심히 바라보던 자신을. “지우야, 저기 봐! 북두칠성! 오늘은 유난히 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