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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가운 바람이 옷깃을 파고드는 늦가을, 하영은 세상의 모든 온기가 자신만 비껴가는 것 같다고 느꼈다. 낡은 원룸 창밖으로 보이는 회색 도시 풍경처럼, 그녀의 삶도 빛바랜 흑백 사진 같았다. 몇 년 전 불의의 사고로 부모님을 잃고 홀로 짊어진 삶의 무게는 스물넷의 어깨에는 너무 버거웠다. 대학은 휴학한 지 오래였고, 닥치는 대로 아르바이트를 하며 하루하루를 버텨냈다. 웃음은 사치가 되었고, 눈물은 일상이 되었다. 그날도 편의점 야간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새벽 찬 공기를 가르며 집으로 향하던 길이었다. 골목길 모퉁이를 돌아서는데, 어디선가 잔잔한 기타 소리가 들려왔다. 소리를 따라 몇 걸음 옮기자, 가로등 불빛 아래 낡은 벤치에 앉아 기타를 치는 남자가 보였다. 그는 마치 바람처럼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은 ..
까만 밤하늘을 도화지 삼아 별들이 콕콕 박혀 있던 여름밤이었다. 열 살 남짓한 여자아이가 강가 풀밭에 쪼그리고 앉아 두 손을 꼭 모으고 있었다. 앳된 얼굴엔 간절함이 가득했다. "제발… 제발 우리 수호, 안 아프게 해주세요." 수현이었다. 얼마 전부터 시름시름 앓기 시작한 남동생 걱정에 어린 마음은 까맣게 타들어 가고 있었다. 오늘 밤 유성우가 쏟아진다는 라디오 방송을 듣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엄마 몰래 집을 빠져나온 참이었다. 별똥별에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다는 말을 철석같이 믿었던 게다. 그때, 하늘을 가로지르며 긴 꼬리를 그리는 별똥별 하나가 나타났다. "앗!" 수현은 저도 모르게 탄성을 내지르며 눈을 질끈 감았다. ‘우리 수호, 제발….’ 수현이 소원에 온 정신을 집중하는 동안, 조금 떨어진 나무..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는 시간, 복잡한 도심 속 낡은 골목길 어귀엔 작은 불빛 하나가 사람들을 기다린다. 간판이라곤 닳고 닳은 나무판에 서툰 글씨로 쓰인 ‘온기 한 조각’이 전부인 빵집. 주인 민준 씨는 오늘도 어김없이 앞치마를 두르고 갓 구운 빵 냄새를 골목 안에 가득 채운다. 이곳은 빵 맛도 일품이지만, 그보다는 민준 씨의 말없는 위로를 찾아오는 이들이 더 많았다. 그는 화려한 언변을 가진 사람은 아니었다. 그저 찾아오는 손님들의 지친 어깨를, 굳게 다문 입술을, 때로는 붉어진 눈시울을 가만히 바라봐 줄 뿐이었다. 그리고는 말없이, 그날따라 유독 손님의 마음 같아 보이는 빵 한 조각을 내밀곤 했다. "어서 와요, 지연 씨. 오늘 유독 발걸음이 무거워 보이네." 단골손님인 지연 씨가 핼쑥한 얼굴로 들어..
서른 중반의 민준에게 세상은 온통 회색이었다. 한때는 세상의 모든 색을 캔버스에 담겠다며 밤새 붓을 놓지 않던 시절도 있었지만, 이제는 디자인 회사에서 마우스 클릭 몇 번으로 규격화된 이미지를 뽑아내는 게 일상의 전부였다. 월급은 통장을 스쳐 갈 뿐이었고, 어릴 적 꿈은 빛바랜 사진처럼 기억 저편으로 희미해져 갔다. 주말이면 텅 빈 캔버스 앞에 앉아보기도 했지만, 붓을 쥔 손은 허공에서 길을 잃기 일쑤였다. 뭘 그려야 할지, 아니, 뭘 그리고 싶었는지조차 가물가물했다. 그러던 어느 토요일 오후였다. 답답한 마음에 집 앞 공원 벤치에 멍하니 앉아 있는데, 저만치에서 꼬마 아이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예닐곱 살쯤 되었을까. 다리가 조금 불편한지 절뚝거리면서도, 낡은 스케치북에 코를 박고 무언가를 열심히 그..
새벽 공기가 차갑게 코끝을 스치는 시간.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도시 한 귀퉁이, 낡고 빛바랜 초록색 지붕을 인 버스 정류장에는 어김없이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매일 같은 시간, 같은 버스를 기다리는 익숙한 얼굴들. 하지만 그들은 서로에게 투명 인간이나 다름없었다. 각자의 시름과 상념에 잠겨 묵묵히 버스만을 기다릴 뿐, 따스한 눈인사조차 나누지 않는 삭막한 풍경이 몇 해째 이어지고 있었다. 그 중심에는 박 씨 할머니가 있었다. 허리가 살짝 굽었지만, 새벽 시장에 나가는 발걸음만큼은 언제나 꼿꼿했다. 매일 첫차를 타고 나가 좌판이라도 벌어야 겨우 손주들 간식거리라도 사줄 수 있다며, 할머니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정류장을 지켰다. 곁에는 늘 김민준이라는 청년이 서 있었다. 말끔하게 다려 입은 정장 ..
#1. 1998년 여름, 볕 좋은 오후였다. 낡은 빌라들이 어깨를 맞댄 골목길은 매미 소리로 자글자글 끓었다. 민준과 수현은 그 골목길의 왕과 여왕이었다. 딱지치기, 술래잡기, 땅따먹기… 해가 질 때까지 둘은 그림자처럼 붙어 다녔다. 민준의 아버지가 지방으로 발령 나기 전까지는. “진짜 가는 거야? 아주?” 수현의 까만 눈동자가 금방이라도 넘칠 듯 그렁거렸다. 민준은 애써 씩씩한 척 고개를 끄덕였다. 목이 메어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야, 울지 마. 내가 편지할게. 맨날 할게.”“거짓말. 멀리 가면 다 잊어버릴 거면서.”“아니야! 나중에 어른 되면, 내가 꼭 너 찾으러 올게! 약속!” 민준은 며칠 전 강가에서 주운, 유난히 반짝이던 조약돌을 수현의 작은 손에 쥐여주었다. 수현은 울음을 꾹 참으며 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