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728x90
1. 이름 없는 뮤즈화가 이선우의 작업실은 수많은 얼굴들로 가득했다. 하지만 그 모든 얼굴은 결국 하나의 얼굴이었다. 어떤 그림에서는 새벽녘 안개 속에 서 있었고, 다른 그림에서는 쏟아지는 햇살 아래 책을 읽고 있었다. 또 다른 그림에서는 무심하게 창밖을 응시했다. 표정도, 배경도, 색채도 모두 달랐지만, 그를 사로잡은 고요한 눈매와 입가의 희미한 미소, 그리고 왼쪽 눈 아래의 작은 점은 언제나 그 자리에 있었다. 그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주목받는 젊은 화가였다. 평론가들은 그의 그림을 ‘존재하지 않는 그리움에 대한 탐구’라 칭했고, 컬렉터들은 그의 그림에 담긴 아련한 감성에 열광했다. 하지만 선우 자신은 거대한 사기극을 벌이는 기분이었다. “이 모델은 누구입니까? 작가님의 연인인가요?” 전시회에서 수없이..
1. 만남: 굳게 닫힌 문 미술치료사 한유월의 오후는 언제나 도화지처럼 깨끗하게 시작되었다. 하지만 그 위를 채우는 것은 대개 혼돈의 색, 어지러운 선들이었다. 아이들의 상처는 언어를 비껴가 그림으로 먼저 도착하곤 했다. 유월은 그 혼돈 속에서 길을 찾아내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요즘, 그녀는 자기 자신이 짙은 안갯속에 갇힌 기분이었다.그리고 서진이를 만났다. 열한 살 소년, 서진. 1년 전 교통사고로 부모님을 잃고, 기적처럼 살아남은 아이. 사고 이후, 아이는 말을 잃었다. 더 정확히는, 말을 하지 않았다. 아이의 모든 언어는 양 주먹 안에 갇혀버린 듯했다. 손가락은 사고의 충격 때문인지, 마음의 상처 때문인지 늘 뻣뻣하게 굳어 있었다. 연필조차 제대로 쥐지 못하는 손. 첫 상담 시간, 서진이는 유월의..
1. 회색 도시의 라이더 강민호의 세상은 아스팔트와 매연, 그리고 마감 시간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의 낡은 스쿠터는 서울의 혈관을 막힘없이 뚫고 나가는 적혈구처럼, 오늘도 쉴 틈 없이 달렸다. 서류 뭉치, 작은 소포, 잊고 온 휴대폰. 그가 나르는 것은 물건이었고, 그에게 중요한 것은 오직 ‘신속’과 ‘정확’이라는 두 단어뿐이었다. 감정은 사치였고, 배달지에 얽힌 사연 따위는 궁금해할 여유도 없었다. 그러던 어느 오후, 그의 단말기에 조금은 특별한 주문이 떴다.‘피어나, 너의 시간’이라는 작은 꽃집에서 온 다중 배송 요청. 품목은 ‘꽃다발’. “꽃배달은 전문 업체 쓰지, 왜 퀵을 부른담.” 민호는 투덜거리며 헬멧을 썼다. 꽃은 뭉개지기 쉽고, 향기는 거슬렸으며, 무엇보다 돈이 안 되는 배송이었다. 하지..
1. 잿빛의 아침박민준의 아침은 언제나 똑같았다. 6시 30분, 기계적으로 울리는 알람 소리에 몸을 일으켜 씻고, 토스트 한 조각을 억지로 삼킨다. 넥타이를 목에 두르는 순간, 그는 거대한 도시의 부품이 될 준비를 마친다. 그가 올라타는 지하철 2호선은 언제나 사람들로 가득 찬 캔버스였다. 모두가 비슷하게 지친 얼굴, 비슷하게 어두운 옷차림, 비슷하게 스마트폰 화면에 고정된 시선. 민준 역시 그 캔버스의 일부, 무채색의 점 하나에 불과했다.하지만 그의 잿빛 세상에 유일하게 색을 더하는 존재가 있었다. 매일 아침 8시 15분, 삼성역에서 타는 여자. 그녀는 언제나 같은 칸, 창가 쪽 문에 기대어 섰다. 계절에 따라 옷차림은 바뀌었지만, 손에는 늘 책 한 권이 들려 있었다. 때로는 고전 소설, 때로는 시집..
민준의 세상은 가로세로 몇 미터 남짓한 무균실 안이 전부였다. 면역력이 바닥까지 떨어진 그에게 바깥세상은 치명적인 바이러스로 가득한 위험지대일 뿐이었다. 그의 유일한 낙은 창밖을 내다보는 것이었다. 창문 너머로는 병원 중앙 정원이 보였고, 그 너머에는 소아 병동의 통유리로 된 놀이방이 마주 보였다. 그곳에서 수아를 처음 보았다. 아이들에게 동화책을 읽어주는 자원봉사자인 듯했다. 햇살처럼 환한 미소를 띤 그녀는 민준의 잿빛 세상에 떨어진 한 방울의 수채 물감 같았다. 매일 오후 3시, 민준은 약속처럼 창가에 앉아 그녀를 기다렸다. 수아도 어느 순간부터인가 맞은편 창가에 앉은 민준의 시선을 느끼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며칠 뒤에는 그를 향해 작게 손을 흔들어주었다. 민준의 ..
회사를 그만두고, 소희의 세상은 잿빛이 되었다. 번아웃이었다. 끝없이 달리던 트랙에서 강제로 이탈 당한 기분. 그녀는 도망치듯 모든 연을 끊고, 볕도 잘 들지 않는 낡은 빌라의 꼭대기 층으로 숨어들었다.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빼곡한 빌라의 벽들뿐이었지만, 그 삭막함 속에도 유일하게 시선이 머무는 곳이 있었다. 바로 맞은편 빌라 302호의 작은 발코니였다. 그곳에는 늘 한 남자가 있었다. 그는 매일 아침, 작은 토분에 담긴 이름 모를 꽃에게 물을 주었다. 잎사귀를 정성껏 닦아주고, 시든 잎을 떼어내고, 가끔은 화분을 이리저리 돌려가며 햇볕을 골고루 받게 해주었다. 소희는 그 꽃의 이름을 몰랐다. 흔한 장미나 튤립도 아니었고, 그저 작고 파란 잎사귀 몇 개에 가느다란 줄기 하나가 전부인, 눈에 띄지 않..