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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잿빛의 아침박민준의 아침은 언제나 똑같았다. 6시 30분, 기계적으로 울리는 알람 소리에 몸을 일으켜 씻고, 토스트 한 조각을 억지로 삼킨다. 넥타이를 목에 두르는 순간, 그는 거대한 도시의 부품이 될 준비를 마친다. 그가 올라타는 지하철 2호선은 언제나 사람들로 가득 찬 캔버스였다. 모두가 비슷하게 지친 얼굴, 비슷하게 어두운 옷차림, 비슷하게 스마트폰 화면에 고정된 시선. 민준 역시 그 캔버스의 일부, 무채색의 점 하나에 불과했다.하지만 그의 잿빛 세상에 유일하게 색을 더하는 존재가 있었다. 매일 아침 8시 15분, 삼성역에서 타는 여자. 그녀는 언제나 같은 칸, 창가 쪽 문에 기대어 섰다. 계절에 따라 옷차림은 바뀌었지만, 손에는 늘 책 한 권이 들려 있었다. 때로는 고전 소설, 때로는 시집..
민준의 세상은 가로세로 몇 미터 남짓한 무균실 안이 전부였다. 면역력이 바닥까지 떨어진 그에게 바깥세상은 치명적인 바이러스로 가득한 위험지대일 뿐이었다. 그의 유일한 낙은 창밖을 내다보는 것이었다. 창문 너머로는 병원 중앙 정원이 보였고, 그 너머에는 소아 병동의 통유리로 된 놀이방이 마주 보였다. 그곳에서 수아를 처음 보았다. 아이들에게 동화책을 읽어주는 자원봉사자인 듯했다. 햇살처럼 환한 미소를 띤 그녀는 민준의 잿빛 세상에 떨어진 한 방울의 수채 물감 같았다. 매일 오후 3시, 민준은 약속처럼 창가에 앉아 그녀를 기다렸다. 수아도 어느 순간부터인가 맞은편 창가에 앉은 민준의 시선을 느끼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며칠 뒤에는 그를 향해 작게 손을 흔들어주었다. 민준의 ..
회사를 그만두고, 소희의 세상은 잿빛이 되었다. 번아웃이었다. 끝없이 달리던 트랙에서 강제로 이탈 당한 기분. 그녀는 도망치듯 모든 연을 끊고, 볕도 잘 들지 않는 낡은 빌라의 꼭대기 층으로 숨어들었다.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빼곡한 빌라의 벽들뿐이었지만, 그 삭막함 속에도 유일하게 시선이 머무는 곳이 있었다. 바로 맞은편 빌라 302호의 작은 발코니였다. 그곳에는 늘 한 남자가 있었다. 그는 매일 아침, 작은 토분에 담긴 이름 모를 꽃에게 물을 주었다. 잎사귀를 정성껏 닦아주고, 시든 잎을 떼어내고, 가끔은 화분을 이리저리 돌려가며 햇볕을 골고루 받게 해주었다. 소희는 그 꽃의 이름을 몰랐다. 흔한 장미나 튤립도 아니었고, 그저 작고 파란 잎사귀 몇 개에 가느다란 줄기 하나가 전부인, 눈에 띄지 않..
태성의 사랑은 언제나 소리 대신 형태로 존재했다. 삐걱거리던 지은의 현관문을 밤새 기름칠해 고쳐놓는 것으로, 그녀가 스치듯 예쁘다고 말했던 잡지 속 원목 책장을 똑같이 만들어주는 것으로, 말없이 그녀의 회사 앞에 찾아가 지친 퇴근길을 함께하는 것으로 그의 사랑은 완성되었다. 지은은 그런 태성의 언어를 처음엔 신기해했고, 다음엔 고마워했으며, 마침내는 조금씩 지쳐갔다. "오빠, 이거… 정말 예쁘다. 오빠가 만들어준 거니까 세상에 하나뿐인 거네." 삼 주년 기념일, 태성이 건넨 것은 그가 손수 깎아 만든 자작나무 보석함이었다. 매끄러운 나무의 결, 이음새 하나 보이지 않는 완벽한 마감. 그의 정성과 시간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하지만 지은이 정말로 바랐던 것은 서툰 글씨로 눌러쓴 카드 한 장이었다. "고마워..
새로 이사 온 낡은 빌라는 방음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곳이었다. 프리랜서 일러스트레이터인 민아에게 재택근무 공간은 세상에서 가장 조용해야 할 성역이었지만, 202호의 현실은 달랐다. 옆집 203호에서는 거의 매일 오후, 서툰 피아노 소리가 벽을 타고 넘어왔다. 같은 소절을 수십 번씩 반복하다가 엉뚱한 건반을 누르고, 그러다가는 갑자기 연주를 멈춰버리는 식이었다. "아, 진짜…!" 마감에 쫓기던 민아는 몇 번이고 옆집으로 달려가 멱살이라도 잡고 싶은 충동을 꾹꾹 눌러 참았다. 한 달이 넘도록 '엘리제를 위하여' 도입부만 반복하는 저 인내심 없는 연주자는 대체 누구일까. 그러던 어느 비 오는 날 오후였다. 그날따라 피아노 소리는 유독 절박하게 들렸다. 몇 번이고 엇나가는 음계에, 급기야 '쾅!' 하고 건반..
첫 번째 여름은 매미 소리와 짠 내 섞인 바람, 그리고 헌책방의 쿰쿰한 종이 냄새로 기억된다. 서울에서 잠시 도망치듯 내려온 서연은 작은 바닷가 마을의 낡은 서점 '시간의 책장'에서 지훈을 만났다. 무더위를 피해 들어간 그곳에서, 지훈은 낡은 시집의 먼지를 털며 서연에게 웃어 보였다. 그 웃음 하나에, 서연의 길고 지루할 것 같던 여름은 통째로 빛나기 시작했다. 둘은 자석처럼 서로에게 끌렸다. 함께 낡은 자전거를 타고 해안도로를 달렸고, 눅눅한 과자를 나눠 먹으며 밤바다의 파도 소리를 들었다. 지훈은 서연에게 자신이 가장 아끼는 초판본 시집을 보여주었고, 서연은 지훈에게 복잡한 도시의 삶과 자신의 작은 꿈들에 대해 이야기했다. 사랑은 예고 없이, 그러나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두 사람의 여름에 스며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