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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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여름은 매미 소리와 짠 내 섞인 바람, 그리고 헌책방의 쿰쿰한 종이 냄새로 기억된다. 서울에서 잠시 도망치듯 내려온 서연은 작은 바닷가 마을의 낡은 서점 '시간의 책장'에서 지훈을 만났다.

 

무더위를 피해 들어간 그곳에서, 지훈은 낡은 시집의 먼지를 털며 서연에게 웃어 보였다. 그 웃음 하나에, 서연의 길고 지루할 것 같던 여름은 통째로 빛나기 시작했다.

 

둘은 자석처럼 서로에게 끌렸다. 함께 낡은 자전거를 타고 해안도로를 달렸고, 눅눅한 과자를 나눠 먹으며 밤바다의 파도 소리를 들었다. 지훈은 서연에게 자신이 가장 아끼는 초판본 시집을 보여주었고, 서연은 지훈에게 복잡한 도시의 삶과 자신의 작은 꿈들에 대해 이야기했다.

 

사랑은 예고 없이, 그러나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두 사람의 여름에 스며들었다. 여름의 끝자락, 서울로 돌아가야 하는 서연에게 지훈은 작은 조개껍데기를 엮어 만든 팔찌를 채워주며 속삭였다.

 

 

"내년 여름에도, 여기서 기다릴게."

 

그리고 돌아온 두 번째 여름. 서연은 약속을 지키기 위해 한달음에 그 바닷가 마을로 달려왔다. 하지만 1년 만에 마주한 지훈은 어딘지 모르게 그늘져 있었다. 예전처럼 웃어주었지만, 그 웃음 뒤에는 서연이 읽어낼 수 없는 깊은 슬픔이 배어 있었다.

 

"선배, 무슨 일 있어요? 얼굴이 안 좋아 보여요."
"아니야. 그냥… 좀 피곤해서 그래."

 

그는 자꾸만 서연의 눈을 피했다. 함께 걷는 해변의 풍경은 그대로였지만, 두 사람 사이의 공기는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며칠이 지나고, 지훈은 어렵게 입을 열었다.

 

"서연아. 우리… 그만하자."

 

"……뭐라고요?"

 

"너는 서울에서 멋지게 살아야 할 사람이잖아. 나는 이 작은 동네, 이 낡은 서점에서 평생 벗어날 수 없을 거야. 너한테 짐이 되기 싫다."

 

 

서연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짐이라니. 지훈은 서연에게 세상 그 자체였는데. 그녀는 붙잡고 싶었지만, 그의 눈빛은 너무나 단호했다. 마치 오랜 시간 준비한 대사를 읊는 사람처럼, 그의 말에는 어떤 망설임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해 여름, 서연은 억수같이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혼자 서울로 돌아왔다. 지훈이 채워준 조개껍데기 팔찌는 기차역 쓰레기통에 버려졌다. 사랑을 지키기 위한 이별이라는 그의 말은, 그저 비겁한 변명처럼 들릴 뿐이었다.

 

또다시 1년이 흐르고, 세 번째 여름이 찾아왔다. 서연은 이제 어엿한 출판사의 편집자가 되어 있었다. 까맣게 잊었다고 생각했지만, 여름의 습한 공기는 자꾸만 그 해의 기억을 끄집어냈다. 마침 회사에서 기획한 '동네 서점 탐방' 시리즈의 출장지가 우연히도 그 바닷가 마을로 정해졌다. 거부할 수 없었다. 어쩌면 이건, 지긋지긋한 미련에 마침표를 찍을 기회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마을은 조금 변해있었다. 그리고 '시간의 책장'은 '여름의 책장'이라는 산뜻한 이름으로 바뀌어 있었다. 예전의 낡은 모습 대신, 통유리 너머로 따뜻한 조명이 새어 나오는 세련된 공간이 되어 있었다.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망설이다 들어선 서점 안, 카운터에는 여전히 지훈이 있었다. 조금 야위었지만, 한결 편안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어쩐 일이야?"
"일 때문에… 잠시 들렀어요. 서점, 많이 바뀌었네요."

 

어색한 정적이 흘렀다. 서연은 서가를 둘러보는 척하며 애써 그를 외면했다. 그때, 지훈이 조용히 다가와 말했다.

 

"미안했다, 서연아."

 

그 한마디에 2년간 억눌러왔던 모든 감정이 터져 나왔다.

 

"뭐가 미안한데요? 선배 맘대로 시작하고, 선배 맘대로 끝내놓고… 이제 와서 뭐가 미안해요!"

 

"그때… 어머니가 많이 아프셨어. 췌장암 말기셨고, 서점 정리하고 병원비 대기에도 벅찼어. 네 옆에서 초라해지는 내 모습을 보여주기가 싫었어. 꿈을 향해 달려가는 널, 내 아픔으로 붙잡아두고 싶지 않았고."

 

 

지훈은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어머니는 작년 가을에 돌아가셨고, 남은 시간 동안 그는 유품을 정리하고, 서점을 다시 일으키며 슬픔을 이겨냈다고 했다.

 

"그때 널 놓아주는 게, 내가 너를 사랑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어."

 

그의 눈가에 맺힌 눈물을 본 순간, 서연은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의 침묵은 비겁한 외면이 아니라, 가장 깊고 아픈 사랑의 방식이었음을. 그가 자신을 밀어냈던 그 순간이, 실은 서연을 가장 뜨겁게 끌어안고 있었던 시간이었음을.

서연은 조용히 그의 손을 잡았다. 그의 손은 여전히 따뜻했다.

 

"바보. 왜 혼자 다 짊어져요. 같이 아파해 줄 수도 있었는데."
"……이제라도 말할 수 있어서 다행이다."

 

창밖은 어느새 짙은 남색으로 물들고 있었다. 세 번째 여름밤이 조용히 내려앉고 있었다. 두 사람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서점 안을 채운 침묵은 그 어떤 말보다도 따뜻하고 단단했다. 첫 번째 여름의 설렘도, 두 번째 여름의 아픔도, 모두 이 세 번째 여름의 시작을 위한 긴 서문이었음을 그들은 비로소 깨닫고 있었다.

 


소설에 대한 심리학적 분석

  1. 이타적 방어기제 (Altruistic Defense Mechanism): 지훈이 서연에게 이별을 고한 행동은 자신의 고통과 불안을 해결하기 위해 타인(서연)의 필요를 우선시하는 '이타적 방어기제'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는 어머니의 투병과 경제적 어려움이라는 현실적 압박 속에서 극심한 스트레스와 무력감을 느꼈습니다. 이러한 자신의 부정적인 상황이 사랑하는 사람의 미래에 짐이 될 것이라는 불안감을 해소하기 위해, '그녀를 위한 선택'이라는 명분으로 관계를 단절하는 극단적인 방식을 택한 것입니다. 이는 자신의 고통을 직면하는 대신, 상대방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자신의 불안으로부터 도피하려는 무의식적 시도입니다.
  2. 애착 손상과 복구 (Attachment Injury and Repair): 두 사람의 관계는 애착 이론의 관점에서 '손상'과 '복구'의 과정을 보여줍니다. 첫 번째 여름에 형성된 안정적인 애착 관계는 두 번째 여름, 지훈의 일방적인 이별 통보로 인해 심각하게 손상됩니다. 서연의 입장에서는 이는 신뢰가 깨지는 '애착 손상'의 경험입니다. 하지만 세 번째 여름, 지훈이 자신의 행동 뒤에 숨겨진 진실(취약성)을 드러내고 진심으로 사과함으로써 '애착 복구'의 과정이 시작됩니다. 이 과정을 통해 두 사람은 이전보다 더 깊은 이해와 신뢰를 바탕으로 한, 한층 더 성숙한 관계를 재정립할 기회를 얻게 됩니다.
  3. 미결정 과제 (Unfinished Business): 서연이 2년이 지난 후에도 여름이 되면 지훈을 떠올리고, 출장 기회를 통해 다시 그를 찾아간 것은 심리학적으로 '미결정 과제'를 해결하려는 동기에서 비롯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갑작스럽고 납득할 수 없는 이별은 그녀에게 감정적으로 완결되지 않은 경험으로 남았습니다. "왜 헤어져야 했는가?"에 대한 명확한 답을 찾고, 그로 인한 상처와 미련을 해소하려는 무의식적 욕구가 그녀를 다시 그곳으로 이끈 것입니다. 지훈과의 재회를 통해 진실을 알게 되면서, 비로소 그녀는 과거의 상처를 온전히 이해하고 미래로 나아갈 수 있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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