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 너머의 온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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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이사 온 낡은 빌라는 방음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곳이었다. 프리랜서 일러스트레이터인 민아에게 재택근무 공간은 세상에서 가장 조용해야 할 성역이었지만, 202호의 현실은 달랐다.

 

옆집 203호에서는 거의 매일 오후, 서툰 피아노 소리가 벽을 타고 넘어왔다. 같은 소절을 수십 번씩 반복하다가 엉뚱한 건반을 누르고, 그러다가는 갑자기 연주를 멈춰버리는 식이었다.

 

"아, 진짜…!"

 

마감에 쫓기던 민아는 몇 번이고 옆집으로 달려가 멱살이라도 잡고 싶은 충동을 꾹꾹 눌러 참았다. 한 달이 넘도록 '엘리제를 위하여' 도입부만 반복하는 저 인내심 없는 연주자는 대체 누구일까.

 

그러던 어느 비 오는 날 오후였다. 그날따라 피아노 소리는 유독 절박하게 들렸다. 몇 번이고 엇나가는 음계에, 급기야 '쾅!' 하고 건반을 내리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잠시 후, 벽 너머에서 아주 희미하게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를 듣는 순간, 민아의 마음을 가득 채우고 있던 짜증과 분노가 눈 녹듯 사라졌다. 그 대신, 이름 모를 연주자에 대한 측은함이 그 자리를 메웠다. 얼마나 답답하고 속상하면 저럴까.

 

민아는 자리에서 일어나 작은 포스트잇에 서툰 졸라맨이 피아노를 치며 웃는 모습을 그렸다. 그리고 '당신의 연주, 매일 잘 듣고 있어요. 포기하지 마세요!' 라는 짧은 문구를 적었다. 그녀는 막 끓인 따뜻한 유자차를 보온병에 담아 포스트잇과 함께 조용히 203호 문고리에 걸어두고 돌아왔다.

 

 

다음 날 아침, 민아의 집 문고리에는 작은 초콜릿 하나와 답장이 걸려 있었다.

 

'따뜻한 차, 정말 고마웠습니다.'

 

삐뚤빼뚤하지만 정성스러운 글씨체였다. 그날 오후, 어김없이 피아노 소리가 들려왔다. 여전히 서툴렀지만, 이상하게도 전처럼 듣기 싫지가 않았다. 오히려 음 하나하나에 담긴 그의 노력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듯했다.

 

그렇게 둘의 소리 없는 소통이 시작되었다. 민아가 마감에 시달리는 밤이면, 옆집에서는 조용한 클래식 음악이 벽을 타고 넘어왔다. 마치 그녀를 응원하는 듯이. 민아는 그림이 잘 풀리지 않는 날이면, 옆집 문 앞에 작은 마들렌을 놓아두었다.

 

그러면 다음 날엔 어김없이 작은 감사 쪽지가 돌아왔다. 얼굴도, 이름도, 나이도 모르는 사이였지만, 두 사람은 얇은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서로의 가장 든든한 응원군이 되어주었다. 민아는 더 이상 혼자라는 생각에 잠 못 이루지 않았고, 옆집의 피아노 소리는 조금씩 다음 소절로 나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피아노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하루, 이틀, 그리고 일주일이 지났다. 문 앞에 간식을 놓아두어도 아무런 답이 없었다. 민아의 마음속에 덜컥, 불안감이 자리 잡았다. 그 시끄럽던 소음이 사라졌을 뿐인데, 집은 숨 막힐 듯한 적막감에 휩싸였다. 그의 서툰 연주가 자신에게 얼마나 큰 위로와 안정감을 주었는지, 민아는 비로소 깨달았다.

 

열흘째 되던 날, 더는 참을 수 없었던 민아는 용기를 내어 203호의 초인종을 눌렀다. 한참 뒤, 문을 연 것은 젊은 남자가 아닌, 인상 좋은 중년 여성이었다.

 

"저… 옆집에 사는 사람인데요. 혹시 무슨 일 있나 해서요."
"아… 202호 사시는 분이군요. 우리 아들이 항상 얘기했어요. 얼굴도 모르는 이웃분 덕분에 힘든 시간을 견디고 있다고요."

 

여인은 아들, 준우에 대해 이야기해주었다. 촉망받던 피아니스트였던 준우는 2년 전 불의의 사고로 오른손 신경이 크게 손상되었다. 절망 속에서 피아노를 포기했던 그가, 다시 건반 앞에 앉기로 결심하고 이곳으로 와 재활을 시작한 것이 불과 몇 달 전이었다.

 

 

"그 애, 손이 마음대로 움직여주지 않으니 얼마나 속상했겠어요. 몇 번이고 포기하려 했는데… 그때마다 이웃분이 주신 응원 덕분에 다시 일어섰다고…."

 

여인은 눈시울을 붉히며 작은 상자 하나를 내밀었다. 그 안에는 민아가 보냈던 모든 포스트잇과 함께, 준우가 차마 문고리에 걸어두지 못했던 편지 수십 통이 들어있었다.

 

그는 재활이 너무 고통스러워 주저앉고 싶었던 날의 심정,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작은 온기 덕분에 다시 건반에 손을 올릴 수 있었던 순간들을 빼곡히 적어 내려갔다. 그리고 마지막 편지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얼굴도 모르는 당신이 벽 너머로 건네준 온기 덕분에, 저는 절망 속에서도 피아노를 다시 사랑하는 법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준우는 재활 경과가 좋지 않아 얼마 전 다시 병원에 입원했다고 했다.

다음 날, 민아는 수소문 끝에 준우가 입원한 병실을 찾아갔다. 창가 쪽 침대에 앉아 있던 준우는 오른손에 붕대를 감고 있었다. 처음 마주하는 얼굴이었지만, 전혀 낯설지가 않았다.

 

"저… 202호예요."

 

민아의 말에 준우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는 잠시 말을 잇지 못하다가, 이내 세상 가장 따뜻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와주셨네요. …고맙습니다."

 

민아는 가방에서 스케치북을 꺼내 그에게 보여주었다. 스케치북에는 그의 서툰 피아노 소리를 들으며 그렸던 그림들이 가득했다. 절망하는 피아니스트, 다시 일어서는 피아니스트, 그리고 마침내 환하게 웃는 피아니스트의 모습까지.

 

두 사람을 가로막고 있던 차가운 벽은 사라지고, 그 자리엔 서로의 상처를 보듬는 따뜻한 온기만이 가득했다.


소설에 대한 심리학적 분석

  1. 근접성 효과 (Propinquity Effect): 민아와 준우의 관계는 '근접성 효과'의 좋은 예시입니다. 이 효과는 물리적 거리가 가까울수록 사람들이 서로에게 호감을 느끼고 관계를 형성할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이론입니다. 두 사람은 얼굴 한번 본 적 없지만, '얇은 벽 하나'라는 극단적인 물리적 근접성 때문에 서로의 삶에 깊숙이 개입하게 됩니다. 소음이라는 부정적인 첫인상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인 상호작용(소리, 메모)이 가능한 환경은 결국 긍정적인 관계로 발전하는 결정적인 토대가 되었습니다.
  2. 사회적 지지 이론 (Social Support Theory): 민아가 건넨 작은 메모와 유자차는 준우에게 강력한 '정서적 지지(Emotional Support)'로 작용했습니다. 사회적 지지 이론에 따르면, 타인으로부터 받는 위로, 격려, 공감 등은 스트레스 상황에 대한 대처 능력을 향상시키고 심리적 안녕감을 높입니다. 사고 후유증과 재활의 고통이라는 극심한 스트레스 상황에 놓여있던 준우에게, 익명의 이웃이 보내는 꾸준한 지지는 절망적인 상황을 견뎌내고 재활을 계속할 수 있는 핵심적인 동기 부여 요인이 된 것입니다.
  3. 벤자민 프랭클린 효과 (Ben Franklin Effect): 민아의 심리 변화는 '벤자민 프랭클린 효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이 효과는 우리가 어떤 사람에게 호의를 베풀면, 그 사람을 더 좋아하게 되는 경향이 있다는 인지 부조화 이론의 한 갈래입니다. 처음에 민아는 준우의 피아노 소리를 '소음'으로 인식하며 부정적인 감정을 가졌습니다. 하지만 그에게 동정심을 느끼고 '따뜻한 차와 메모'라는 호의를 베푸는 행동을 한 후,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기 위해 준우에 대한 인식을 '시끄러운 이웃'에서 '응원하고 싶은 사람'으로 바꾸게 됩니다. 이 작은 친절이 두 사람의 관계를 극적으로 전환시키는 계기가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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