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기차는 익숙한 풍경 사이를 더디게 흘렀다. 차창 밖으로 스치는 낮은 지붕들과 푸른 논밭은 수지가 떠나기 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다만 그 풍경을 바라보는 수지의 마음만이 잿빛으로 내려앉아 있었다. 한때 반짝이는 눈으로 세상을 담던 카메라는 가방 깊숙한 곳에서 먼지만 뒤집어쓰고 있었다. ‘꿈’이라 불렀던 그것은 빛바랜 사진처럼 흐릿해진 지 오래였다.
서울에서의 삶은 치열했고, 그만큼 공허했다. 무엇을 위해 그토록 달려왔는지 알 수 없게 된 어느 날, 수지는 모든 것을 멈췄다. 그리고 도망치듯, 어린 시절의 기억이 묻힌 고향집으로 향했다.
아무도 살지 않아 을씨년스러울 거라 예상했던 고향집은 의외로 따스한 햇살을 듬뿍 받고 있었다. 낡았지만 정갈한 마당에는 이름 모를 들꽃들이 소담하게 피어 있었다. 마치 누군가 그녀를 기다렸다는 듯이.
짐을 풀고 며칠, 수지는 텅 빈 집처럼 텅 빈 마음으로 시간을 흘려보냈다. 먼지를 털고, 묵은 때를 닦아내는 동안에도 마음은 쉬이 개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오후, 삐걱이는 대문 소리와 함께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야, 박수지! 너 맞구나!”
단발머리를 까맣게 물들인 보람이었다. 고등학교 시절, 같이 떡볶이를 먹으며 아이돌 얘기를 하던, 수지의 가장 오랜 친구. 보람은 수지를 와락 끌어안으며 등을 두드렸다.
“어떻게 연락도 없이 왔어! 보고 싶었잖아.”
보람의 꾸밈없는 환대에 굳었던 수지의 얼굴 근육이 조금 풀리는 듯했다. 그날 저녁, 보람은 직접 만든 반찬들을 한 상 가득 차려왔다. 어색함도 잠시, 둘은 밤늦도록 밀린 이야기를 나누었다. 수지는 애써 담담한 척 자신의 실패담을 늘어놓았지만, 보람은 그저 말없이 수지의 어깨를 토닥여줄 뿐이었다. 그 따뜻한 손길에, 뜨거운 무언가가 목구멍으로 차올랐다.
다음 날에는 민준이 찾아왔다. 동네 작은 서점을 운영하는 민준은 예나 지금이나 과묵하지만 속정이 깊었다. 그는 낡은 창틀을 고쳐주겠다며 연장을 들고 나타났다.
“힘든 일 있었으면… 너무 애쓰지 마라.”
서툰 위로였지만, 그 어떤 화려한 말보다 수지의 마음을 깊이 울렸다. 민준은 창틀을 고치는 내내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삐걱대던 창문이 부드럽게 열리고 닫힐 때, 마치 수지의 마음속 응어리 하나가 풀려나가는 기분이었다. 민준은 수리된 창문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햇살을 보며 희미하게 웃었다.
그 후로 보람과 민준은 거의 매일같이 수지의 집을 드나들었다. 셋은 함께 마당의 잡초를 뽑고, 텃밭에 작은 모종을 심었다. 저녁이면 마루에 나란히 앉아 수박을 나눠 먹으며 별을 보았다. 특별할 것 없는 일상이었지만, 그 안에는 도시에서 결코 느낄 수 없었던 평온함과 다정함이 있었다.
어느 날, 셋은 어릴 적 자주 갔던 강가로 소풍을 갔다. 그때처럼 돗자리를 펴고 앉아 김밥을 먹었다. 보람이 흥얼거리던 노래를 따라 부르다 문득, 수지는 가방 속 카메라를 떠올렸다.
“수지야, 너 사진 다시 안 찍어?”
민준의 조심스러운 물음에 수지는 고개를 저었다. “이젠 뭘 찍어야 할지 모르겠어.”
“그냥, 지금 좋은 거 찍으면 되지.” 보람이 해맑게 웃으며 말했다.
“여기 봐, 햇살에 반짝이는 강물도 예쁘고, 우리 민준이 땀 흘리는 모습도… 는 아니고! 저기 이름 모를 들꽃도 예쁘잖아.”
보람의 말에 수지는 홀린 듯 가방에서 카메라를 꺼냈다. 렌즈를 통해 본 세상은 여전히 아름다웠다. 햇살 아래 웃고 있는 친구들의 모습,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 잔잔하게 흐르는 강물. 셔터를 누르는 손가락이 가늘게 떨렸다.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감각, 세상을 애정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던 순간의 희열이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그날 이후, 수지는 다시 카메라를 들었다. 거창한 작품을 만들겠다는 욕심은 없었다. 그저 고향집 마당에 핀 들꽃, 저녁노을에 물든 하늘, 친구들의 웃는 얼굴처럼 소소하지만 반짝이는 순간들을 담았다.
사진을 찍는 동안, 수지는 깨달았다. 자신이 잃어버린 것은 꿈 자체가 아니라, 그 꿈을 향해 달려가던 과정 속의 ‘행복’이었음을. 그리고 그 행복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 여기, 소중한 사람들과 함께하는 일상 속에 스며들어 있었다는 것을.
시간이 흘러 수지의 고향집은 예전의 따스함을 되찾았다. 집 안 곳곳에는 수지가 찍은 사진들이 소박하게 걸렸다. 사진 속에는 환하게 웃는 보람과 민준, 햇살 가득한 마당, 반짝이는 강가의 풍경이 담겨 있었다. 사진을 바라보는 수지의 눈가에는 촉촉한 미소가 어렸다.
떠나야 할 이유는 수없이 많았지만, 머물러야 할 이유는 단 하나로 충분했다. 이곳, 햇살이 머무는 집에는 잊고 지냈던 행복이, 그리고 그 행복을 함께 나눌 사람들이 있었다. 수지는 더 이상 과거의 실패에 얽매이지 않았다. 그저 오늘 주어진 햇살을 만끽하며, 다시 찾아온 소중한 순간들을 마음 깊이 새길 뿐이었다.
가끔 울컥 눈물이 솟아도 괜찮았다.
그것은 슬픔의 눈물이 아닌, 따스한 감동과 감사의 눈물이었으므로. 이 집과 이곳의 사람들은, 그녀가 다시 삶을 사랑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사람들은 이곳 ‘햇살이 머무는 집’의 이야기를 오래도록 기억하며, 문득 떠올릴 때마다 가슴 한편이 따뜻해지는 것을 느낄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