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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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 이게 뭐예요?"

하준은 다락방에서 먼지가 쌓인 낡은 상자를 발견했다. 그 안에는 수십 년이 지나 색이 바랜 편지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조심스럽게 하나를 꺼내 읽으려는 순간, 할아버지인 명수 씨가 그를 제지했다.

"그건 건드리지 말거라." 명수 씨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하지만 눈빛 속엔 알 수 없는 슬픔이 어렸다.

"하지만 궁금해요. 이건 누가 보낸 편지예요?"

할아버지는 한참을 침묵하더니, 마침내 무겁게 입을 열었다.

"네가 이제 어른이 되었으니 말해줘야겠구나... 이 편지는 네 할머니가 보내던 마지막 편지란다."

 

 "할머니가요? 그런데 왜 읽지 않으셨어요?"

하준은 의아해하며 봉인도 풀리지 않은 편지들을 바라보았다. 명수 씨는 떨리는 손으로 편지 한 장을 집어 들고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땐... 읽을 용기가 없었지."

시간이 멈춘 듯했다. 하준은 그를 재촉하지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명수 씨는 조용히 편지를 하나 뜯어 읽기 시작했다.

"명수 씨, 이 편지를 당신이 읽을 날이 올까요? 저는 그날이 오길 바라며 매일 기도합니다..."

 

편지 속엔 헤어진 이후에도 할머니가 명수 씨를 그리워하며 쓴 이야기들이 가득했다. 그녀는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도 그를 원망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의 행복을 빌고 있었다.

"난... 내가 너무 미웠다. 그녀를 잡았어야 했는데." 할아버지의 눈가가 촉촉해졌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

명수 씨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과거의 기억을 떠올렸다.

 

 "우린 젊었을 때 사랑했지만, 현실은 사랑만으로 해결되지 않더구나. 가난했고, 난 그녀에게 아무것도 해줄 수 없다고 생각했지. 그래서 떠나보냈어. 더 좋은 사람 만나라고 말하면서... 하지만 그게 실수였어."

하준은 조용히 듣고 있었다.

"그리고 몇 년 후, 그녀가 나를 찾아왔단다. 마지막으로 한 번만 만나자고. 하지만 난 차마 그녀를 볼 자신이 없었어. 그래서 만나지 않았지. 그리고 이 편지가 도착했어..."

그는 편지를 가만히 내려놓았다.

 

 "할아버지, 이제라도 읽어보세요."

하준의 말에 명수 씨는 눈을 감았다 뜨고, 하나씩 편지를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지막 편지를 열었을 때, 그의 손이 떨렸다.

"명수 씨, 당신을 용서해요. 나는 당신을 원망한 적이 없어요. 우리 사랑은 끝난 게 아니라고 믿어요. 그래서 이 편지를 남깁니다. 당신이 이 편지를 읽는 날, 꼭 저를 찾아와 주세요. 저는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을게요."

편지의 끝엔 주소가 적혀 있었다.

 

"할아버지, 여기에 가보셔야 해요!"

할아버지는 한참을 망설였지만, 결국 하준과 함께 주소가 적힌 곳을 찾아갔다. 그곳은 작은 언덕 위에 자리한 오래된 나무 아래였다.

그곳엔 오래된 벤치 하나와, 누군가 다녀간 흔적이 남아 있었다. 그리고 벤치 옆엔 작은 표지석이 있었다.

"여기서 사랑을 기다립니다. - 지은"

명수 씨는 떨리는 손으로 표지석을 쓰다듬었다. 그리고 조용히 중얼거렸다.

"미안하다, 그리고... 사랑한다."

그의 눈에서 처음으로 한 줄기 눈물이 흘렀다.

 

하준은 조용히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말했다.

"할아버지, 할머니는 분명 할아버지가 올 거라고 믿고 있었던 것 같아요."

명수 씨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녀는 항상 나보다 더 깊은 사랑을 했었지. 난 바보처럼 도망치기만 했고."

 

그 순간, 한 여성이 다가왔다. 그녀는 50대 후반쯤 되어 보였고, 손에는 낡은 노트를 들고 있었다.

"혹시... 명수 씨인가요?" 그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명수 씨는 놀란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네... 그런데, 당신은?"

여성은 눈시울을 붉히며 노트를 내밀었다. "저는 어머니의 친구였어요. 지은 씨는 저에게 당신이 꼭 이곳에 올 거라고 했어요. 그리고 이걸 전해 달라고 했죠."

명수 씨는 떨리는 손으로 노트를 받았다. 표지를 넘기자, 그 안에는 수십 년 동안 써 내려간 편지들이 있었다. 하지만 마지막 페이지에는 짧은 한 문장이 적혀 있었다.

 

"내 사랑, 나는 이제 편히 쉬러 갑니다. 하지만 당신이 온다면, 다시 만나게 될 거예요."

 

그 글을 읽는 순간, 명수 씨는 더 이상 눈물을 참지 않았다. 그는 조용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처음으로, 아주 오랜 세월 동안 짓지 못했던 미소를 지었다.

 

하준은 그 모습을 보며 미소 지었다.

사랑은, 때로는 시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는다는 걸 깨닫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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