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이 머무는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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낡은 가로등 불빛만이 희미하게 길을 밝히는 밤이었다. 수현은 하루의 무게를 어깨에 짊어진 채 공원 벤치에 힘없이 주저앉았다. 푸석한 얼굴 위로 허공을 응시하는 눈동자에는 깊은 고단함이 서려 있었다.

 

고개를 들자, 검푸른 하늘 한가운데에 은쟁반 같은 달이 휘영청 떠 있었다. 마치 그녀의 마음을 다 안다는 듯, 말없이 부드러운 빛을 쏟아내고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옆자리에 누군가 앉는 기척에 수현은 살짝 고개를 돌렸다. 중년으로 보이는 남자가 조금 떨어진 곳에 조용히 앉아, 그녀처럼 달을 바라보고 있었다. 처음 며칠은 서로의 존재가 어색하게 느껴졌다. 괜히 헛기침을 하기도 하고, 시선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몰라 달만 뚫어지게 쳐다보기도 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그 침묵은 어느새 익숙한 풍경이 되었다.

 

 

매일 밤, 비슷한 시간. 수현이 먼저 와 앉아있으면, 얼마 지나지 않아 남자가 다가와 벤치 한쪽을 차지했다. 그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았고, 그저 말없이 달을 함께 바라볼 뿐이었다.

 

이상하게도, 이름 모를 그의 존재는 수현에게 작은 위안이 되었다. 텅 빈 공원의 스산함도, 삶의 막막함도 그의 그림자 옆에서는 조금은 견딜 만하게 느껴졌다.

 

어느덧 계절이 바뀌어 밤공기가 제법 쌀쌀해진 가을밤이었다. 그날따라 수현의 어깨는 유난히 축 처져 있었다. 회사에서 하루 종일 좋지 않은 일들만 연거푸 터졌고, 집으로 돌아오는 발걸음은 천근만근이었다.

 

 

벤치에 앉자마자 참았던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소리 내어 울고 싶었지만, 옆자리의 그를 의식해 입술만 깨물었다. 어깨를 들썩이며 흐느끼는 그녀를 남자는 가만히 지켜보는 듯했다.

 

잠시 후, 그가 부스럭거리며 무언가를 꺼내는 소리가 들렸다. 수현은 혹시나 자신에게 말을 거는 건 아닐까 싶어 긴장했지만,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따뜻한 온기가 느껴지는 캔커피 하나가 그녀의 옆, 벤치 위에 조용히 놓였다. 수현은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남자는 여전히 달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그의 옆모습에서 어쩐지 따스한 미소가 느껴지는 것 같았다.

 

"저… 고맙습니다."

 

작게 떨리는 목소리로 수현이 겨우 입을 열었다. 남자는 그제야 수현을 향해 살짝 고개를 돌리며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그 미소 하나에, 얼어붙었던 수현의 마음 한구석이 사르르 녹아내리는 듯했다. 그날 밤, 그들은 처음으로 아주 짧은 대화를 나누었다.

 

 

"오늘… 달이 참 밝네요."
"그러게요. 유난히 더 그런 것 같습니다."

 

그것이 전부였지만, 그 어떤 긴 대화보다 더 깊은 울림이 있었다.

 

그 후로도 몇 번의 계절이 더 바뀌었다. 수현은 여전히 밤늦게 공원을 찾았고, 남자 역시 변함없이 그 자리를 지켰다. 그 사이 수현에게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힘겨웠던 일들은 조금씩 해결의 실마리를 보였고, 얼굴에는 다시 옅은 미소가 피어나기 시작했다. 이제 그녀는 더 이상 눈물을 삼키며 벤치에 앉지 않았다.

 

어느덧 초여름의 문턱, 싱그러운 밤바람이 불어오던 날이었다. 수현은 평소보다 조금 일찍 공원에 도착했다. 손에는 작은 종이봉투가 들려 있었다. 잠시 후, 익숙한 발걸음 소리와 함께 남자가 다가왔다.

 

 

"안녕하세요."

수현이 먼저 맑은 목소리로 인사를 건넸다.

 

남자는 살짝 놀란 듯했지만, 이내 부드러운 미소로 화답했다.

"네, 안녕하세요."

 

수현은 잠시 망설이다가 준비해온 종이봉투를 그에게 내밀었다.
"저… 항상 감사했습니다. 정말 큰 힘이 됐어요."

 

봉투 안에는 수현이 직접 구운 작은 쿠키 몇 개와 따뜻한 차가 담겨 있었다. 남자는 잠시 말없이 봉투를 내려다보더니, 이내 고개를 들어 수현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가에 잔잔한 감동이 어리는 듯했다.

 

 

"제가 한 일이라고는 그저 달을 본 것밖에 없는데요."

남자가 멋쩍은 듯 웃으며 말했다.

 

"아니에요. 저에게는… 그 어떤 위로보다 더 큰 의미였어요."

수현의 목소리에는 진심이 가득 담겨 있었다. 

 

서로의 이름을 묻지 않았지만, 그들은 달빛 아래 가장 깊은 위로를 나눈 사이가 되었다.

 

남자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하늘을 가리키며 말했다.

 

"오늘도 달이 참 좋네요. 함께 보시겠습니까?"

 

수현은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좋아요."

 

두 사람은 나란히 벤치에 앉아 다시 달을 바라보았다. 예전처럼 침묵이 흘렀지만, 이제 그 침묵 속에는 어색함 대신 편안함과 따뜻한 유대감이 가득했다. 달빛은 변함없이 그들을 비추고 있었고, 그 달빛 아래 두 사람의 마음도 잔잔하게 빛나고 있었다.

 

 

어쩌면 내일도, 그다음 날도, 달이 뜨는 한 그들의 말없는 만남은 계속될 것만 같았다. 수현은 문득 생각했다. 어쩌면 삶이란, 이렇게 이름 모를 누군가와 함께 달을 바라보는 그 짧은 순간들의 온기로 이어지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소설에 대한 심리학적 분석

  1. 비언어적 의사소통 (Nonverbal Communication)과 암묵적 지지 (Implicit Social Support): 소설 속 수현과 민준은 직접적인 대화 없이도 서로의 존재를 통해 위안을 얻습니다. 민준이 수현에게 말없이 따뜻한 캔커피를 건네는 행동, 수현이 눈물을 흘릴 때 조용히 곁을 지켜주는 모습 등은 대표적인 비언어적 의사소통의 예입니다. 이러한 행동들은 직접적인 위로의 말보다 더 깊은 공감과 지지를 전달하며, 상대방이 혼자가 아니라는 느낌을 주어 심리적 안정감을 제공합니다. 이는 암묵적 사회적 지지의 한 형태로, 명시적인 도움 요청이나 대화 없이도 타인의 존재나 배려를 통해 얻는 정서적 지원을 의미합니다.
  2. 이타주의 (Altruism) 및 공감 (Empathy): 민준이 수현에게 보여주는 작은 친절들(캔커피, 침묵의 위로)은 자신의 이익을 고려하지 않고 타인의 행복과 안녕을 우선시하는 이타주의적 동기에서 비롯된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특히, 수현의 슬픔을 감지하고 그녀의 감정에 조용히 동조하는 모습은 타인의 감정을 이해하고 공유하는 공감 능력이 높음을 시사합니다. 이러한 공감 기반의 이타적 행동은 인간관계의 긍정적인 측면을 강화하고, 받는 사람에게는 정서적 치유 효과를 가져다줍니다.
  3. 안전 기지 (Secure Base)의 형성: 매일 밤 같은 시간, 같은 벤치에서 만나는 반복적인 경험은 수현과 민준 모두에게 심리적인 안전 기지를 제공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애착 이론에서 ‘안전 기지’는 개인이 세상으로 나아가 탐색하고 어려움에 직면했을 때 돌아와 위안을 얻을 수 있는 존재나 장소를 의미합니다. 비록 서로 깊은 대화를 나누지는 않았지만, 예측 가능한 상대방의 존재는 각박한 현실에서 잠시 벗어나 정서적 안정감을 느끼고 내면을 돌아볼 수 있는 심리적 공간을 마련해 준 것입니다. 특히 수현에게 민준의 존재는 늦은 밤 공원이라는 잠재적으로 불안한 공간을 안전하게 느끼도록 만드는 요인이 되었을 수 있습니다.
  4. 사회적 현존감 (Social Presence)의 치유 효과와 익명성의 역설: 소설 속 인물들은 서로의 이름이나 사연을 묻지 않는 익명성을 유지합니다. 이러한 익명성은 오히려 솔직한 감정 표현(수현의 눈물)이나 부담 없는 지지(민준의 커피)를 가능하게 만들었을 수 있습니다. 가까운 관계에서 오는 기대나 평가의 부담 없이, 그저 ‘함께 있음’이라는 사회적 현존감 자체가 고립감을 줄이고 긍정적인 정서적 경험을 제공한 것입니다. 때로는 잘 알지 못하는 타인과의 느슨한 연결이 더 큰 위로와 치유를 가져다줄 수 있다는 ‘익명성의 역설’을 보여주는 사례로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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