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회색 도시의 라이더
강민호의 세상은 아스팔트와 매연, 그리고 마감 시간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의 낡은 스쿠터는 서울의 혈관을 막힘없이 뚫고 나가는 적혈구처럼, 오늘도 쉴 틈 없이 달렸다. 서류 뭉치, 작은 소포, 잊고 온 휴대폰. 그가 나르는 것은 물건이었고, 그에게 중요한 것은 오직 ‘신속’과 ‘정확’이라는 두 단어뿐이었다. 감정은 사치였고, 배달지에 얽힌 사연 따위는 궁금해할 여유도 없었다.
그러던 어느 오후, 그의 단말기에 조금은 특별한 주문이 떴다.
‘피어나, 너의 시간’이라는 작은 꽃집에서 온 다중 배송 요청. 품목은 ‘꽃다발’.
“꽃배달은 전문 업체 쓰지, 왜 퀵을 부른담.”
민호는 투덜거리며 헬멧을 썼다. 꽃은 뭉개지기 쉽고, 향기는 거슬렸으며, 무엇보다 돈이 안 되는 배송이었다. 하지만 콜을 거를 처지는 아니었다. 꽃집에 도착하자, 젊은 여사장이 정성껏 포장된 세 개의 작은 꽃다발을 내밀었다. 모두 다른 색감, 다른 구성이었지만 신기하게도 같은 종류의 푸른색 들꽃이 한 송이씩 꽂혀 있었다.
“조심히, 정말 조심히 다뤄주세요. 물건이 아니라… 마음이거든요.”
여사장의 간곡한 부탁에, 민호는 무심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첫 번째 주소로 향했다. 스쿠터 뒤에 실린 꽃 상자에서, 낯선 향기가 바람을 타고 그의 등을 감쌌다.
2. 첫 번째 주소
첫 번째 배송지는 낡은 연립주택 3층이었다. 계단을 오르는 내내 ‘이런 곳에 무슨 꽃을…’ 하는 생각이 머리를 맴돌았다. 초인종을 누르자, 허리가 희끗한 할아버지가 문을 열었다.
“퀵서비스입니다.”
민호가 무뚝뚝하게 꽃다발을 내밀자, 할아버지의 눈이 동그래졌다.
“아이고, 벌써 왔는가. 이리 주게.”
할아버지는 조심스럽게 꽃다발을 받아 들고는 안쪽을 향해 소리쳤다.
“여보! 당신이 좋아하는 꽃 왔어!”
안방 문이 열리고, 비슷한 연배의 할머니가 나왔다. 하지만 할머니의 시선은 초점이 없었다. 할아버지를, 그리고 민호를 그저 텅 빈 눈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이 양반이… 기억이 오락가락해서. 그래도 꽃은 참 좋아해. 내가 누군지는 잊어도, 이 꽃 보면 꼭 한 번은 웃어주거든.”
할아버지는 아내의 손에 꽃다발을 쥐여주었다. 할머니는 무표정하게 꽃을 내려다보더니, 아주 천천히,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피워 올렸다. 그 순간, 할아버지의 깊게 팬 주름 사이로 안도와 행복이 스며 나왔다.
“고생했수, 총각.”
민호는 아무 말 없이 꾸벅 고개를 숙이고 돌아섰다. 스쿠터에 다시 올라탔을 때, 매캐한 매연 냄새에 섞여 들어온 꽃향기가 아까처럼 거슬리지만은 않았다.

3. 두 번째 이야기
두 번째 주소는 여의도의 으리으리한 오피스 빌딩이었다. 1층 로비에서 신분증을 맡기고 출입증을 받아 27층으로 올라갔다. ‘김수진 님’ 앞으로 온 꽃다발. 민호가 두리번거리자, 한쪽 구석 테이블에 앉아 있던 젊은 여성이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잔뜩 긴장하고 지친 얼굴이었다. 면접 대기자 같았다.
“저… 혹시 김수진…”
“네! 저요!”
여자는 거의 꽃다발을 빼앗다시피 받아 들었다. 그리고는 함께 붙어있는 작은 카드를 떨리는 손으로 열어보았다. 민호는 결제를 받기 위해 옆에 서 있다가, 여자의 어깨가 잘게 떨리는 것을 보았다. 그녀는 소리 없이 울고 있었다.
‘면접 망쳤나… 왜 우는 거지?’
민호가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을 때, 여자가 젖은 목소리로 말했다.
“죄송해요… 너무 좋아서요.”
그녀는 민호에게 카드 내용을 보여주었다. 시골 부모님의 삐뚤빼뚤한 글씨였다.
‘결과가 어떻든 너는 우리 최고의 딸이다. 기죽지 말고 맛있는 거 사 먹어라. 사랑한다.’
수십 번의 탈락에 익숙해졌을 딸에게, 부모님은 합격 기원보다 따뜻한 위로를 먼저 보낸 것이었다. 여자는 눈물을 닦으며 환하게 웃었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그 인사는 민호에게 하는 말이 아니었지만, 민호는 또다시 가슴 한구석이 뻐근해지는 것을 느꼈다. 도시의 차가운 빌딩 숲에서, 그는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응원을 배달한 참이었다.

4. 마지막 배송지
마지막 주소는 뜻밖에도 시립 추모공원이었다. 민호는 내비게이션이 고장 났나 싶어 몇 번이고 주소를 확인했다. 서늘한 공기가 감도는 납골당 앞에서 그가 잠시 망설이고 있을 때, 익숙한 얼굴이 그를 향해 걸어왔다.
꽃집 여사장이었다.
“제가 받을 사람이에요.”
그녀는 민호에게서 마지막 꽃다발을 건네받았다. 그리고는 익숙하게 한 칸으로 다가가, 투명한 유리창 앞에 꽃을 놓았다. 유리창 안에는 제복을 입은 채 환하게 웃고 있는 젊은 남자의 사진이 있었다. 퀵서비스 라이더의 복장이었다.
“제 남자친구였어요. 1년 전 오늘, 배달 중에 사고로… 저를 만나러 오던 길이었죠.”
그녀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그 사람은 이 일이 세상에서 제일 좋다고 했어요. 누군가의 기쁨, 슬픔, 사랑… 그 모든 이야기의 마지막 조각을 자기가 맞추는 것 같다면서. 그래서 저도 그 사람 기일마다, 그가 달렸던 길 위에 작은 이야기들을 피워내고 싶었어요.”
할아버지의 변치 않는 사랑, 부모님의 따뜻한 위로. 그 모든 것은 떠나간 연인을 향한 그녀의 그리움이자, 그의 신념을 이어가려는 노력이었다. 그리고 그 이야기의 마지막 조각은, 지금 민호가 맞추고 있었다.
민호는 사진 속 남자와 자신의 모습을 번갈아 보았다. 그가 매일 스쳐 지나가던 무수한 도로와 건물들, 그 안에 얼마나 많은 마음들이 숨 쉬고 있었는지 처음으로 깨달았다.
“그분도… 분명 좋아하실 겁니다. 오늘 아주 멋진 배달이었어요.”
민호가 어렵게 꺼낸 말에, 여사장은 처음으로 희미하게 웃었다.

5. 피어나는 길 위에서
추모공원을 빠져나와 다시 도로 위로 올라섰을 때, 세상은 조금 다르게 보였다. 회색빛 도시는 여전히 시끄럽고 복잡했지만, 그 속을 달리는 사람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저마다의 사연을 싣고 달리는 수많은 ‘마음’들이 보였다.
민호는 스쿠터 핸들을 굳게 잡았다. 이제 그는 단순한 배달 기사가 아니었다. 그는 도시의 길 위에 꽃을 피우는, 이야기의 전달자였다.
‘달리는 꽃’.
그것은 오늘 그가 배달한 꽃다발의 이름이자, 그의 새로운 이름이 되었다. 석양이 물드는 도시의 도로 위를, 민호의 스쿠터가 꽃향기를 남기며 힘차게 달려 나갔다.
이 소설은 무관심했던 주인공이 타인의 삶을 엿보며 겪는 내적 변화를 통해, 다음과 같은 심리학적 개념들을 탐구합니다.
- 공감-이타주의 가설 (Empathy-Altruism Hypothesis): 주인공은 처음에는 자신의 이익(시간, 돈)만을 생각했지만, 배달 과정에서 타인의 감정(할아버지의 사랑, 취준생의 설움, 사장의 그리움)을 목격하며 공감 능력이 발현됩니다. 마지막에 꽃집 사장에게 건네는 위로의 말은, 순수한 공감에서 비롯된 이타적 행동으로 볼 수 있습니다.
- 인지 부조화 (Cognitive Dissonance): 주인공은 '배달은 감정 없는 노동'이라는 기존의 신념과, 배달을 통해 마주하게 된 '감동적인 이야기들' 사이에서 부조화를 경험합니다. 이 불편함을 해소하기 위해, 그는 자신의 직업에 대한 태도와 신념을 '나는 이야기와 마음을 전달하는 사람'으로 변화시킵니다.
- 의미 형성 이론 (Meaning-Making Theory): 꽃집 사장은 남자친구의 죽음이라는 비극적 사건을 겪은 후, 그의 기일에 꽃을 배달하는 행위를 통해 고통스러운 경험에 긍정적인 의미(그리움의 표현, 그의 신념 계승)를 부여합니다. 주인공 역시 이 과정을 지켜보며 자신의 무의미했던 일상에서 새로운 의미를 찾아냅니다.
- 관점 수용 (Perspective-Taking): 주인공은 세 번의 배달을 통해 노인, 취업준비생, 사별한 연인이라는 각기 다른 타인의 입장을 간접적으로 경험합니다. 이는 타인의 상황과 감정을 이해하는 능력인 관점 수용 능력을 자극하여, 그의 자기중심적 사고에서 벗어나게 하는 결정적 계기가 됩니다.
- 자이가르니크 효과 (Zeigarnik Effect): 불완전하거나 미완성된 과업을 더 잘 기억하는 현상입니다. 주인공에게 배달은 완료된 과업이지만, 그 배달에 얽힌 감동적인 이야기들은 그의 마음속에 '미완의 감정적 과제'로 남아 계속해서 영향을 미칩니다. 이는 그의 가치관 변화에 지속적인 동력으로 작용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