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이름 없는 뮤즈
화가 이선우의 작업실은 수많은 얼굴들로 가득했다. 하지만 그 모든 얼굴은 결국 하나의 얼굴이었다.
어떤 그림에서는 새벽녘 안개 속에 서 있었고, 다른 그림에서는 쏟아지는 햇살 아래 책을 읽고 있었다.
또 다른 그림에서는 무심하게 창밖을 응시했다. 표정도, 배경도, 색채도 모두 달랐지만, 그를 사로잡은 고요한 눈매와 입가의 희미한 미소, 그리고 왼쪽 눈 아래의 작은 점은 언제나 그 자리에 있었다.
그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주목받는 젊은 화가였다. 평론가들은 그의 그림을 ‘존재하지 않는 그리움에 대한 탐구’라 칭했고, 컬렉터들은 그의 그림에 담긴 아련한 감성에 열광했다. 하지만 선우 자신은 거대한 사기극을 벌이는 기분이었다.
“이 모델은 누구입니까? 작가님의 연인인가요?”
전시회에서 수없이 들었던 질문이었다. 그때마다 그는 모호한 미소로 답을 피했다. 사실대로 말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모릅니다.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사람입니다.’
그 얼굴은 그의 의지와 상관없이 캔버스 위에 나타났다. 마치 그의 손이, 그의 붓이, 그 얼굴의 기억을 독자적으로 품고 있는 것처럼. 꿈에서 본 환영인가, 상상력이 만들어낸 허상인가. 그는 자신도 모르는 이 미지의 뮤즈에게 잠식당하고 있었다.
그림이 완성될수록 명성은 높아졌지만, 그의 영혼은 점점 더 공허해졌다. 그는 자신의 그림 속에 완벽히 갇혀버린 죄수였다.
2. 기억의 조각
개인전을 며칠 앞둔 어느 밤, 선우는 슬럼프의 절벽 끝에 서 있었다. 새로 펼친 거대한 캔버스 앞에서 몇 시간째 붓을 들지 못했다. 또 그 얼굴을 그려야 한다는 사실이 질식할 듯한 압박감으로 다가왔다.
그때, 오랜 친구인 재혁이 야식을 들고 작업실에 닥쳤다. 재혁은 벽을 가득 메운 그림들을 훑어보더니 혀를 찼다.
“야, 이 정도면 병이다, 병. 스토커 수준이야. 대체 누구냐, 이 여자는?”
“나도 알았으면 좋겠다.”
선우의 자조적인 대답에 재혁은 시시하다는 듯 그림들을 다시 뜯어보기 시작했다. 그러다 문득, 가장 최근에 완성된 그림 앞에서 그의 시선이 멈췄다. 비 오는 버스 정류장을 배경으로, 여자가 노란 우산을 쓰고 있는 그림이었다.
“어? 이 그림… 이상하게 낯익은데.”
재혁은 미간을 찌푸리며 기억을 더듬었다.
“잠깐만. 이 노란 우산… 그리고 이 버스 정류장. 설마… 우리 대학교 앞 아니냐? 7년 전, 너랑 나랑 비 쫄딱 맞고 있을 때…”
재혁의 말이 방아쇠가 되었다. 선우의 머릿속에서 낡은 필름이 돌아가듯, 잊고 있던 풍경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7년 전, 장마가 한창이던 여름날이었다. 과제 때문에 밤을 새우고 나오던 길, 갑작스러운 폭우에 선우와 재혁은 버스 정류장 처마 밑에서 꼼짝없이 갇혀 있었다. 그때였다. 한 여학생이 그들 옆에 섰다. 그녀는 망설임 없이 자신의 노란 우산을 선우 쪽으로 기울여 주었다.
“같이 쓰세요. 비 많이 오네요.”
차분하고 나지막한 목소리. 빗소리에 섞여 아득하게 들려왔던 그 목소리. 선우는 얼떨결에 우산 아래로 들어갔다. 좁은 우산 아래, 빗물 냄새와 섞인 그녀의 은은한 샴푸 향이 희미하게 느껴졌다. 버스가 도착하고, 그녀는 먼저 올라타며 가볍게 목례를 하고 사라졌다. 그 모든 것은 1분도 채 되지 않는 짧은 순간이었다.
선우는 그제야 깨달았다. 자신의 무의식 가장 깊은 곳에 박혀 있던 얼굴의 주인이 바로 그 짧은 순간의 스침 속에 있었다는 것을. 그것은 사랑도, 설렘도 아니었다. 그저 폭우 속에서 예고 없이 찾아온, 이름 모를 친절과 온기였다. 그 강렬한 인상이 7년 동안 그의 내면에서 발효되어 수십, 수백 개의 이미지로 태어난 것이었다.

3. 당신을 찾아서
충격적인 깨달음에 선우는 며칠 밤낮을 앓았다. 그녀는 누구일까. 지금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이제는 알아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단 한 발짝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을 것 같았다.
단서는 ‘대학교’와 ‘7년 전’이라는 것뿐이었다. 그는 무작정 모교의 졸업 앨범을 뒤지기 시작했다. 수천 개의 얼굴 속에서 기억 속의 그 얼굴을 찾는 것은 사막에서 바늘 찾기였다. 며칠간의 수색 끝에, 그는 마침내 비슷한 얼굴을 찾아냈다.
‘윤지아. 문헌정보학과.’
이름을 되뇌는 순간,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 그는 수소문 끝에 그녀가 시립 도서관의 사서로 일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도서관의 오후는 고요했다. 선우는 책들 사이를 정처 없이 헤맸다. 그러다 서가 정리를 하고 있는 한 여자의 뒷모습을 발견했다. 그가 수백 번도 더 그렸던 바로 그 실루엣이었다. 여자가 천천히 뒤를 돌아보는 순간, 선우는 숨을 멈췄다. 그림 속에서만 존재하던 그녀가, 현실의 공간과 시간 속에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저… 윤지아 씨 맞으신가요?”
그의 목소리는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지아는 낯선 남자의 등장에 살짝 경계하는 눈빛이었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맞는데요. 누구시죠?”
선우는 준비해 간 전시회 초대장을 내밀었다.
“화가 이선우라고 합니다. 혹시… 시간이 되시면 제 전시회에 와주셨으면 합니다.”
그리고 그는 가장 어렵고, 가장 진실된 말을 덧붙였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제 그림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4. 내가 너를 그리기 시작한 날
전시회 마지막 날, 약속처럼 지아가 찾아왔다. 그녀는 자신의 얼굴로 가득한 전시장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놀라움, 당혹감, 그리고 알 수 없는 신비감이 뒤섞인 표정이었다.
선우는 그녀를 자신의 첫 번째 그림 앞으로 데려갔다. 가장 서툴지만, 가장 순수했던 첫 습작.
“이게… 제가 당신을 그린 첫 번째 그림입니다.”
그는 7년 전 그날의 이야기를 꺼냈다. 비 내리던 버스 정류장, 노란 우산, 그리고 이름 모를 온기. 그리고 그날 이후, 자신도 모르게 그녀를 그려왔던 기나긴 시간들에 대해 고백했다. 그것은 사랑 고백이라기보다, 한 예술가의 뿌리를 찾아가는 순례자의 고해성사에 가까웠다.
이야기를 모두 들은 지아는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그녀는 그림 속 자신의 얼굴을, 그리고 현실의 선우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전혀… 기억나지 않아요. 그냥 무심코 했던 일인걸요.”
그녀의 대답은 담담했다.
“하지만… 누군가에게 제 작은 행동이 이런 영감이 되었다니, 신기하네요. 제 얼굴을 이렇게 아름답게 그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그 순간, 선우를 오랫동안 짓눌러왔던 무언가가 안개처럼 흩어지는 것을 느꼈다. 허상인 줄 알았던 뮤즈는 실재했고, 그의 예술은 거짓이 아니었다. 그는 마침내 자신의 그림과 화해했다.
전시회가 끝나고 며칠 뒤, 선우는 새하얀 캔버스 앞에 섰다. 그는 더 이상 지아의 얼굴을 그리지 않았다. 대신, 비에 젖은 아스팔트와 노란 우산, 그리고 버스 정류장의 풍경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의 그림에서 처음으로 인물이 사라졌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풍경은 그가 그렸던 그 어떤 인물화보다 더 깊은 이야기를 품고 있었다.
그는 이제 알았다. 자신이 그렸던 것은 그녀의 얼굴이 아니었다. 그가 그렸던 것은 7년 전, 한 청년이 느꼈던 예기치 못한 ‘온기’ 그 자체였다는 것을. 그리고 이제, 그는 그 온기로 세상의 다른 풍경들을 그려나갈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것이 바로, 그가 진짜 ‘화가’로서 세상에 첫발을 내디딘 날이었다.

심리학적 이론 분석
이 소설은 한 예술가의 무의식적 집착과 그 근원을 찾아가는 여정을 통해, 다음과 같은 심리학적 개념들을 흥미롭게 풀어냅니다.
- 잠재기억 (Cryptomnesia): 주인공이 자신이 경험했다는 사실을 잊은 채, 과거의 기억(스쳐 지나간 인연)을 완전히 새롭고 독창적인 창작물(그림)로 여기는 현상입니다. 이는 소설의 핵심 미스터리를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심리학적 개념입니다. 그는 의식적으로는 그녀를 기억하지 못하지만, 그의 무의식은 그 기억을 붙들고 예술로 표현해왔습니다.
- 승화 (Sublimation): 프로이트의 방어기제 중 하나로, 사회적으로 용납되지 않는 충동이나 욕구를 예술, 학문, 스포츠 등 사회적으로 가치 있는 활동으로 전환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소설에서는 '이름 모를 온기에 대한 강렬한 인상과 그리움'이라는 원초적 감정이 '그림'이라는 예술 활동으로 승화되어 나타났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 뮤즈와 아니마 (Muse and Anima): 칼 융의 분석심리학적 관점에서, 주인공에게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여성의 이미지는 그의 내면에 존재하는 여성적 원형, 즉 '아니마(Anima)'의 투사로 볼 수 있습니다. 그가 만난 실제 인물은 그의 아니마를 활성화시키는 계기가 되었고, 그는 자신의 내면의 뮤즈(아니마)를 캔버스에 구현함으로써 자기 자신을 탐구해온 것입니다.
- 프루스트 현상 (Proustian Moment): 특정 감각(소설에서는 친구의 말을 통해 촉발된 '비 오는 버스 정류장'이라는 시각적, 상황적 단서)이 과거의 기억 전체를 비자발적으로 생생하게 불러일으키는 현상입니다. 이 순간을 통해 주인공은 잊고 있던 기억의 봉인을 해제하고 미스터리의 실마리를 찾게 됩니다.
- 미해결 과제 (Unfinished Business): 게슈탈트 심리학의 개념으로, 완결되지 못한 경험이나 감정은 계속해서 개인의 의식에 떠오르며 완결되기를 요구한다는 이론입니다. 7년 전의 짧은 만남과 표현되지 못한 감정(감사함, 강렬한 인상)이 미해결 과제로 남아, 주인공이 무의식적으로 그녀를 계속 그리게 만드는 심리적 동력이 되었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