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속도가 다른 두 사람이, 같은 결승선에서 만난 이야기
다은은 이번에도 꼴찌였다.
정확히는 꼴찌에서 세 번째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날은 조금도 억울하지 않았다.
억울하지 않았던 이유를, 이 글을 읽는 당신에게 처음부터 천천히 들려주고 싶다.
언제나, 대열의 맨 끝
새벽 다섯 시 반, 탄천은 아직 어두웠다.
대학 러닝 동아리 '달리다'의 아침 훈련은 언제나 이 시간에 시작됐고, 언제나 같은 순서로 끝났다.
제일 먼저 들어오는 건 지호였고, 제일 늦게 들어오는 건 다은이었다.
"하다은, 오늘도 꼴찌네."
동기 세아가 웃으며 던진 말에 악의는 없었다.
그냥 사실이었으니까.
다은은 숨을 몰아쉬며 억지로 입꼬리를 올렸다.
이 년째 이러고 있었다.
남들은 페이스를 이야기하고 기록을 이야기할 때, 다은은 그저 완주를, 그러니까 멈추지 않는 것만을 목표로 삼았다.
다은이 뛰기 시작한 건 엄마가 떠나고 난 다음 해였다.
심장이 약했던 엄마는 마지막 몇 달, 병원 복도를 손잡고 걸을 때마다 늘 같은 말을 했다.
"천천히 가도 괜찮아. 그냥 멈추지만 마."
다은은 그 말을 유서처럼 붙들고 살았다.
그래서 뛰었다.
잘 뛰려고 뛴 게 아니라, 멈추지 않으려고 뛰었다.
문제는 세상 어디에도 '완주만 하면 되는' 종목은 없다는 거였다.
특히 이 동아리에서는.
이번 학기가 끝나면 동아리를 그만둘 생각이었다.
매번 대열의 맨 끝에서, 다들 가고 난 자리에 혼자 남아 스트레칭을 하는 일에 슬슬 지쳐가고 있었다.
재활실에서 온 남자
선지호는 원래 이 시간에, 이 자리에 있을 사람이 아니었다.
고등학교 때부터 지역 대표로 뛰었고, 대학 마라톤부에서는 이미 국가대표 선발전 출전권을 눈앞에 두고 있던 에이스였다.
그런 그가 초보자 그룹 맨 뒤에서 어슬렁거리게 된 건, 지난달 정강이에 생긴 피로골절 때문이었다.
"재활은 천천히, 무리 없이."
의사와 코치는 입을 모아 말했지만 지호에게 그 말은 사형 선고나 다름없었다.
선발전까지 남은 시간은 넉 달. 코치는 그를 엘리트 그룹에서 빼내 초보자 그룹에 붙여버렸다.
다치기 전엔 한 번도 눈여겨본 적 없던 얼굴들 사이, 지호는 매일 아침 이방인처럼 뛰었다.
다은과 처음 말을 섞은 날도 유쾌하지 않았다.
좁은 산책로에서 지호가 그녀를 앞지르려다 부딪힐 뻔했고, 그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페이스 좀 일정하게 유지하시죠. 방해되니까."
다은은 아무 대꾸도 하지 못했다.
지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멀어졌다. 그
날 다은은 평소보다 더 늦게 들어왔다.

리듬을 보는 법
계기는 사소했다.
훈련 셋째 주, 다은이 발목을 접질렸다.
크게 다친 건 아니었지만 주저앉아 신발끈을 다시 묶는 그녀 옆을 다들 그냥 지나쳐 갔다.
지호도 지나치려 했다.
그런데 몇 걸음 가다 말고, 그가 걸음을 멈췄다.
"거기서 그러고 있으면 아무도 안 봐줍니다."
퉁명스러운 말투였지만, 그는 다시 돌아와 옆에 쭈그려 앉았다.
"발목보다 문제는 그거예요. 자꾸 앞 사람 등만 보고 뛰는 거."
"...안 그러면 뒤처지는 게 더 무서워서요."
"뒤처지는 게 무서우면 더 못 뛰어요. 남 속도 보지 말고, 자기 숨소리를 들으세요. 넷 마시고 넷 내쉬고. 그 리듬이 안 깨지면, 발은 알아서 따라옵니다."
지호가 자기 손목시계를 풀어 다은의 손목에 채워주며 말했다.
"완주는 재능이 아니에요. 리듬이에요."
그 한마디가 다은 안의 무언가를 건드렸다.
이 년 동안 아무도 그녀에게 '어떻게' 뛰어야 하는지 알려준 적이 없었다.
다들 '얼마나 빨리'만 물었으니까.
다음 날부터 지호는, 정확히는 재활 스케줄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었던 지호는, 초보자 그룹 옆에서 계속 같이 뛰었다.
그리고 정확히는, 매번 다은 옆에서.

풀코스 신청서
10월의 춘천마라톤이 두 달 앞으로 다가온 어느 날, 지호가 다은에게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하프코스가 아니라 풀코스 참가 신청서였다.
"저는 10킬로만 겨우 뛰는데요."
"지금 페이스면 풀코스도 컷오프 안에 들어와요. 계산해 봤습니다."
다은은 그 말이 무모하게 들리면서도, 동시에 처음으로 자신이 '계산해볼 만한 사람'으로 취급받았다는 사실에 마음이 흔들렸다.
"같이 신청하죠. 저도 이번에 풀코스로 국가대표 선발 기준 기록 뚫어야 하거든요."
"...같은 대회에 나가는 거예요. 다른 이유로."
"네. 같은 방향, 다른 속도. 그게 뭐 어때서요."
그날 밤 다은은 신청서를 냈다.
그리고 처음으로, 훈련이 끝난 뒤 지호와 나란히 앉아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눴다.
지호는 아버지 얘기를 했다.
한때 올림픽 대표 선발전 문턱까지 갔다가 부상으로 주저앉은 아버지가, 아들에게는 늘 "1등이 아니면 의미 없다"고 말했다는 것.
다치고 나서 처음으로, 자신이 1등이 아니어도 되는 사람인지 스스로 물어보게 됐다는 것.
"1등이 아니면, 저는 뭐가 되는 걸까요."
지호가 웃으며 던진 말이었지만, 웃고 있는 눈은 조금도 웃고 있지 않았다.
다은은 그제야 알았다.
이 사람도,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대열의 맨 끝을 두려워하고 있었다는 걸.
32킬로미터, 벽
10월의 의암호는 눈이 시릴 만큼 파랬다.
출발선에서 두 사람은 손을 마주쳤다.
"35킬로 반환점에서 만나요."
지호가 말했지만 그건 처음부터 지켜지기 힘든 약속이었다.
총성이 울리자 지호는 곧 인파 속으로 사라졌다.
국가대표 선발 기준 기록을 통과하려면 1킬로미터도 허투루 쓸 수 없었으니까.
다은은 자신의 리듬대로 뛰었다.
넷 마시고 넷 내쉬고. 20킬로, 25킬로, 넘어갈 때마다 그녀는 지호가 알려준 방식대로 스스로를 다독였다.
하지만 몸은 정직했다.
32킬로미터 지점, 다은의 다리가 갑자기 통나무처럼 무거워졌다.
흔히들 '벽'이라고 부르는 그 순간이었다.
그녀는 코스 옆 연석에 주저앉았다.
지나가는 주자들의 발소리가 낯설게 느껴졌다.
눈물이 났다.
엄마 생각이 났다.
천천히 가도 괜찮다던 그 말이, 처음으로 거짓말처럼 느껴졌다.
이 이상은 못 갈 것 같았다.
같은 시각 지호는 결승선을 4킬로미터 남기고 있었다.
개인 최고 기록을 3분 이상 앞당기는 페이스, 선발 기준 기록까지는 이제 정말 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였다.
그런데 35킬로 반환점을 지나면서도 다은이 보이지 않았다.
손목의 러닝 앱을 확인한 그는, 함께 공유해둔 그녀의 위치가 32킬로미터 지점에서 십 분째 멈춰 있는 걸 봤다.

돌아온 사람
지호는 3초쯤 멈춰 서 있었다.
그리고 몸을 돌렸다.
코스를 거슬러 뛰는 사람은 그 혼자였다.
사람들이 이상하게 쳐다봤지만 상관없었다.
2킬로미터를 거슬러 뛰어, 그는 연석에 주저앉아 있는 다은을 발견했다.
"여기서 뭐 해요. 반환점에서 만나기로 했잖아요."
"기록... 깨야 하잖아요. 저 신경 쓰지 말고 가요."
"이미 늦었어요. 저 지금 코스 거슬러 뛰어서, 선발 기준 기록은 물 건너갔거든요."
다은의 눈이 커졌다. 지호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물병을 건네며 그녀 옆에 앉았다.
"넷 마시고 넷 내쉬고. 리듬 잃어버렸죠? 제가 다시 맞춰줄게요."
"왜 이래요, 정말. 당신 기록이 얼마나 중요한 건지 알면서."
"압니다. 근데 방금 알았어요. 저 혼자 1등으로 들어가는 결승선보다, 당신이랑 같이 걸어 들어가는 결승선이 더 갖고 싶다는 거."
그는 다은을 일으켜 세웠다.
남은 10킬로미터, 두 사람은 다은의 속도로 뛰었다.
걷다가 뛰다가, 다시 걷다가. 지호는 한 번도 앞서 나가지 않았다.
처음으로 그는, 누군가의 옆에서 뛰는 법을 배우고 있었다.
결승선, 그리고 아직
의암호의 노을이 붉게 번질 무렵, 두 사람은 손을 잡고 결승선을 통과했다.
전광판의 기록은 지호의 개인 최고 기록에도, 다은의 목표 컷오프에도 아슬아슬하게 걸쳐 있었다.
둘 다 신경 쓰지 않았다.
"우리 이제 다 왔다."
다은이 숨을 몰아쉬며 웃었다. 지호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사실 우리, 아직 멀었어."
"뭐가요, 방금 결승선 통과했잖아요."
"이건 42.195킬로미터짜리 결승선이고. 나는 지금부터 시작되는 다른 길 얘기하는 거예요."
다은은 그 말의 뜻을 알 것 같았다. 지호는 그 후로도 국가대표 선발전에 재도전했고, 이번엔 혼자가 아니라 다은과 함께 훈련하며 도전했다.
다은은 여전히 동아리에서 제일 느린 주자였지만, 더는 아무도 그녀를 대열의 맨 끝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그저 '지호 옆'이라고 불렀을 뿐.
빨리 가려면 혼자 가고, 멀리 가려면 함께 가라는 말이 있다.
두 사람은 그 말을 온몸으로 증명하며, 사랑이라는 이름의 페이스메이커를 얻었다.
완주보다 오래, 결승선보다 멀리 이어질 그 길 위에서, 그들은 오늘도 나란히 숨을 고른다.
넷 마시고, 넷 내쉬고. 아직 멀었지만, 함께라서 괜찮다.

소설 속 심리학적 현상 분석 — 한 단어로 정의하기
| 사회비교 | 다은이 매일 대열의 맨 끝에서 빠른 주자들과 자신의 페이스를 비교하며 느끼는 열등감 | 페스팅거의 사회비교이론에서, 자신보다 뛰어난 대상과의 '상향비교'는 자존감을 낮추고 위축을 낳는다. 다은의 초반 자기불신은 순위 자체보다 '남과 비교하는 습관'에서 비롯됐기에, 이 한 단어가 가장 정확하다. |
| 오귀인 | 32킬로미터의 극한 신체 각성(심장박동, 거친 호흡) 상태에서 지호가 돌아왔을 때 다은이 느끼는 감정의 격렬함 | 심리학의 '흔들다리 실험'(Dutton & Aron)처럼, 격렬한 신체적 각성 상태는 그 원인을 실제 감정(설렘)으로 잘못 해석하게 만든다. 극한의 운동 상태에서 피어난 두 사람의 감정선은 이 현상으로 설명될 때 더 입체적이다. |
| 동조 | 나란히 뛰며 호흡과 보폭을 맞춰가는 훈련 장면들 | 사회심리학에서 '동조 현상'은 타인과 신체 리듬(걸음, 호흡)을 일치시킬 때 무의식적으로 신뢰와 친밀감이 높아지는 현상을 가리킨다. 두 사람이 대사보다 '같이 뛰는 행위' 자체로 가까워지는 과정을 이 한 단어가 압축한다. |
| 러너스하이 | 완주 직전, 극도의 피로 속에서 오히려 감정이 솔직해지고 벽이 허물어지는 순간 | 장시간 고강도 운동 후 엔도르핀 분비로 인한 도취감(러너스하이)은 통증 인식을 낮추고 정서적 개방성을 높인다. 지친 몸으로도 서로에게 솔직해질 수 있었던 결말부의 정서를 뒷받침한다. |
| 상호성 | 지호가 자신의 선발 기준 기록을 포기하고 코스를 거슬러 돌아오는 결정적 장면 | 사회심리학의 상호성 원리는, 누군가 자신에게 손해를 감수하며 희생적 행동을 할 때 그 상대에 대한 신뢰와 애착이 급격히 강화된다고 설명한다. 이 소설의 감정적 클라이맥스가 '고백'이 아니라 '희생'으로 설계된 이유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