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발의 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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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발을 벗어야만, 비로소 보이는 것들

그날 밤 서연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구두를 손에 들고 걸었다.

발바닥에 닿는 아스팔트는 아직 낮의 열기를 다 내려놓지 못한 채 미지근했다.

장마가 막 끝난 밤이었고, 길은 젖어 있었다.

그 축축하고 미지근한 감촉이, 이상하게도 서연을 조금씩 제정신으로 돌려놓고 있었다.

구두를 벗어 던진 밤

세 시간 전, 서연은 회의실 한가운데 서 있었다.

 

"이번 캠페인 실패는, 결국 서연 대리 책임이라고 봐야죠."

 

본부장의 말이었다.

사실이 아니었다.

시안을 뒤집은 건 클라이언트였고, 일정이 꼬인 건 위에서 컨펌을 두 번이나 미룬 탓이었다.

하지만 그 자리에서 서연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대신 늘 그래왔듯, 입꼬리를 정확히 15도쯤 끌어올리며 말했다.

 

"제가 더 꼼꼼히 챙겼어야 했는데, 죄송합니다."

 

칭찬받아 마땅한 순간에도, 억울한 순간에도 서연의 표정은 늘 같았다.

적당히 웃고, 적당히 미안해하고, 적당히 괜찮은 척. 입사 5년 차, 서연은 그 표정을 만드는 데 도가 텄다.

문제는 회의실을 나선 뒤에도 그 표정이 좀처럼 벗겨지지 않는다는 거였다.

 

퇴근길, 반포 한강공원 쪽으로 발이 저절로 향했다.

잠수교 아래 벤치에 앉았을 때, 서연은 오른쪽 뒤꿈치가 유난히 화끈거리는 걸 느꼈다.

새로 산 8센티 구두였다.

예쁘지만 처음부터 자신의 발보다 반 사이즈 작았던, 그러니까 처음부터 서연에게 맞지 않았던 신발.

 

허리를 숙여 구두를 벗었다.

뒤꿈치에 물집이 잡혀 있었다.

그 붉게 부풀어 오른 살을 보는 순간, 서연은 왈칵 눈물이 났다.

신발이 아파서가 아니었다.

자신이 지금껏 맞지도 않는 것을 신고, 맞지도 않는 표정을 짓고, 맞지도 않는 삶을 그럭저럭 견뎌왔다는 사실을 그제야 깨달아버린 탓이었다.

서연은 구두를 양손에 쥔 채, 맨발로 걷기 시작했다.

완벽이라는 이름의 신발

서연이 처음 구두를 신은 건 스물세 살, 첫 면접날이었다.

 

"여자는 첫인상이 반이야. 흐트러진 모습 보이면 절대 안 돼."

 

취업 준비를 하던 서연에게 엄마가 사준 첫 정장 구두였다.

그날 이후 서연은 단 하루도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 애썼다.

실수해도 웃었고, 화가 나도 삼켰고, 지쳐도 지치지 않은 척했다.

사람들은 그런 서연을 두고 "역시 프로답다", "감정 기복이 없어서 편하다"고 말했다.

 

칭찬이었지만, 서연은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조금씩 자신이 지워지는 기분이었다.

이상적인 자신과 실제의 자신 사이에는 늘 좁혀지지 않는 틈이 있었다.

완벽하게 웃는 서연과, 뒤꿈치에 물집이 잡히도록 걸으면서도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서연. 그 틈을 서연은 늘 '구두'로 메꿔왔다.

조금 아파도, 조금 안 맞아도, 일단 신고 걸으면 사람들 눈엔 그럴듯해 보였으니까.

 

그런데 오늘, 그 틈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벌어져 버렸다.

맨발로 걷는 건 태어나서 몇 번 안 되는 경험이었다.

어릴 적 바닷가에서, 그리고 지금. 서늘하고 거친 아스팔트의 감촉이 발바닥을 타고 정직하게 올라왔다.

아프면 아픈 대로, 차가우면 차가운 대로. 처음으로 서연은 무언가를 꾸미지 않고 그대로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저 앞에서 걸어오는 한 사람을 보았다.

맨발로 걷는 남자

남자도 맨발이었다.

와이셔츠 소매를 걷어 올리고, 구두는 대체 어디에 두고 왔는지 신발조차 들고 있지 않은 채로, 그는 젖은 보도블록 위를 천천히 걷고 있었다.

서연과 그는 거리를 사이에 두고 서로를 발견했고, 잠시 서로의 맨발을 번갈아 쳐다보다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웃음이 새어 나왔다.

 

"이 시간에, 이 꼴로 걷는 사람이 저 말고 또 있네요."

 

남자, 도윤이 먼저 말을 걸었다. 서연은 뭐라 답해야 할지 몰라 그냥 들고 있던 구두를 살짝 들어 보였다.

 

"발이 너무 아파서요."

"저도요."

 

도윤이 무심하게 자기 발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가로등 빛 아래, 서연은 그의 발등 옆에 오래된 흉터 하나를 보았다. 물어보고 싶었지만 묻지 않았다.

대신 두 사람은, 약속한 것도 아닌데 나란히 같은 방향으로 걷기 시작했다.

 

낯선 사람과 나란히 걷는 게 이상하게 불편하지 않았다.

오히려 처음 보는 사람이라서 더 편했는지도 몰랐다.

회사 사람들 앞에서는 한 번도 보이지 않았던 얼굴로, 서연은 그 밤 아무 표정도 짓지 않은 채 걸었다.

 

"울고 계셨죠, 아까."

 

한참 말없이 걷던 도윤이 물었다.

서연은 부정하려다, 이상하게 그러고 싶지 않았다.

 

"네. 근데 왜 안 물어보세요, 왜 우냐고."

"안 궁금해서가 아니라... 굳이 아무렇지 않은 척 안 하셔도 된다는 걸, 알려드리고 싶어서요. 아픈 건, 아픈 거니까."

 

그 말이, 서연의 가슴 어딘가를 툭 건드렸다. 5년 만에 처음 듣는 말이었다.

 

한 걸음마다, 진짜 하나씩

두 사람은 잠수교 아래 벤치에 나란히 앉았다. 도윤이 먼저 입을 열었다.

 

"저 사실, 오늘이 1주기예요. 여자친구가 하늘로 간 지 1년 됐거든요. 교통사고였어요."

 

서연은 숨을 삼켰다. 도윤은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저희 둘 다 되게 반듯하게 살던 사람들이었어요. 걔는 은행원이었고 저는... 아무튼 매일 각 잡힌 구두 신고 다니는 사람들이었죠. 근데 힘든 날엔 둘이 몰래 여기 와서 신발을 벗었어요. 그게 저희만의 규칙이었어요. '오늘 하루, 진짜 있었던 일 딱 한 가지만 말하기.' 잘 지내는 척 안 해도 되는 유일한 시간이었거든요."

 

그가 서연을 돌아봤다.

 

"우리도 그거 한번 해볼래요? 오늘 있었던 일 중에, 진짜 하나만요. 괜찮은 척 뺀 진짜요."

 

서연은 잠시 망설였다. 그리고 처음으로, 회의실에서 삼켰던 말을 소리 내어 뱉었다.

 

"저 오늘, 제 잘못도 아닌 일로 사람들 앞에서 사과했어요. 근데 사실은... 억울하다고, 제 잘못 아니라고 소리치고 싶었어요."

 

말하고 나니 눈물이 났다.

도윤은 아무 말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비난도, 위로도, 조언도 하지 않았다.

그저 옆에서 같이 발끝으로 물웅덩이를 툭툭 건드릴 뿐이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 침묵이 서연에게는 그 어떤 위로의 말보다 크게 다가왔다.

 

그날 밤, 두 사람은 각자의 진짜 이야기를 하나씩 주고받으며 잠수교에서 반포대교까지 맨발로 걸었다.

걸음마다 조금씩, 서연을 겹겹이 감싸고 있던 '괜찮은 척'이라는 신발이 벗겨지고 있었다.

다시 신을 것인가, 말 것인가

헤어질 시간이 다가오자 도윤이 말했다.

 

"내일 아침에, 그 사람들 앞에서 또 그 표정 지을 거예요? 아무 일도 없었다는 얼굴로."

 

서연은 대답하지 못했다.

 

"저는 강요 못 해요. 다시 그 구두 신고, 그 표정 짓고, 그렇게 사는 것도 서연 씨 선택이니까. 근데 오늘 여기서 맨발로 걸어본 사람은, 그 전의 자신으로 완전히 돌아가긴 좀 힘들 거예요. 저도 그랬거든요."

 

도윤은 자신의 오래된 흉터를 내려다보며 덧붙였다.

 

"이거, 민지랑 사고 나던 날 생긴 상처예요. 유리 조각을 밟았는데, 그땐 하나도 안 아팠어요. 너무 큰 일 앞에서는 작은 상처는 아픈 줄도 모르거든요. 근데 나중에, 진짜 아프기 시작하더라고요. 그게 오히려 다행이었어요. 아프다는 건, 아직 살아있다는 뜻이었으니까."

 

그가 서연에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

 

"내일, 진짜 하고 싶었던 말을 해요. 그리고 이 거리, 또 오세요. 신발 신고 와도 되고, 안 신고 와도 되고. 그냥 진짜인 채로만 오면 돼요."

 

서연은 그 손을 잡지 않았다.

대신 고개를 끄덕이며, 마음속에 그 말을 꾹꾹 눌러 담았다.

서명을 앞두고

다음 날 아침, 서연의 책상 위에는 시말서 양식이 놓여 있었다. 팀장이 조용히 다가와 말했다.

 

"그냥 서명해. 어차피 다들 알아. 서연 씨 잘못 아닌 거. 근데 위에서 누군가는 책임져야 끝나는 일이잖아."

 

익숙한 패턴이었다.

서명하고, 웃고, 넘어가고. 그렇게 5년을 살아왔다.

펜을 든 서연의 손이 서류 위에서 멈췄다.

뒤꿈치의 물집이 다시 욱신거렸다.

신발 때문이 아니라, 지난밤 맨발로 걸었던 그 감각이 몸에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픈 건, 아픈 거니까.'

'괜찮은 척 안 해도 돼요.'

'내일, 진짜 하고 싶었던 말을 해요.'

 

도윤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서연은 펜을 내려놓았다.

손끝이 떨렸지만, 처음으로 그 떨림을 숨기지 않기로 했다.

그가 남긴 말

"본부장님, 죄송하지만 이 시말서, 서명 못 하겠습니다."

 

회의실이 조용해졌다. 서연은 목소리가 떨리는 걸 느끼면서도 말을 이었다.

 

"컨펌이 두 번 미뤄진 건 제 책임이 아니고, 시안을 뒤집은 것도 클라이언트 요청이었습니다. 제가 부족했던 부분은 인정하고 개선하겠지만, 제 잘못이 아닌 일까지 제 이름으로 덮을 순 없습니다."

 

떨리는 목소리였지만, 5년 만에 처음으로 진짜 서연의 목소리였다.

본부장의 얼굴이 붉어졌고, 잠시 정적이 흘렀다.

그 몇 초가 서연에게는 32킬로미터 지점의 벽처럼 아득하게 느껴졌다.

여기서 물러나면, 다시는 이 목소리를 낼 수 없을 것 같았다.

 

"...일단, 사실관계부터 다시 확인해봅시다."

 

팀장이 조심스레 끼어들며 상황을 정리했다.

완벽한 승리는 아니었다.

본부장은 여전히 못마땅한 얼굴이었고, 서연의 평판에 흠집이 갈지도 몰랐다.

하지만 회의실을 나서는 서연의 걸음은, 그 어느 때보다 자기 발에 꼭 맞는 신발을 신은 것처럼 편안했다.

책상에 앉아 핸드폰을 보니, 낯선 번호로 짧은 문자가 하나 와 있었다.

 

"어제 그 거리에서 만난 사람입니다. 명함을 못 받아서 이렇게 무작정 보내요. 잘 잤어요? 오늘, 진짜 하고 싶은 말 하셨어요?"

 

서연은 픽 웃음이 났다.

어젯밤 헤어지기 직전, 도윤에게 자신도 모르게 회사 번호가 적힌 명함을 건넸던 게 그제야 기억났다.

맨발의 거리, 다시

그날 밤, 서연은 다시 잠수교 아래로 향했다. 이번에는 처음부터 구두를 벗은 채였다.

도윤이 벤치에 먼저 앉아 있다가, 서연을 보고 일어섰다.

 

"오늘은 진짜 하고 싶은 말, 하셨어요?"

"네. 서명 안 했어요. 아마 좀 시끄러워지겠지만."

 

도윤이 활짝 웃었다. 1년 만에 처음 웃는 것 같은 얼굴이었다.

 

"잘하셨어요. 진짜 잘하셨어요."

 

두 사람은 다시 나란히 걷기 시작했다.

이번엔 서로의 상처를 굳이 감추지 않았다.

서연은 도윤에게 다섯 살 때 넘어져 생긴 무릎의 흉터를 보여주며 시시한 이야기를 했고, 도윤은 민지가 좋아했던 노래를 흥얼거렸다.

슬픔도, 부끄러움도, 어색함도 있는 그대로 그 거리 위에 내려놓았다.

 

동네 사람들은 언제부턴가 그 길을 '맨발의 거리'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비 오는 밤이면 종종 신발을 벗고 걷는 사람들이 하나둘 늘었다는 소문과 함께였다.

그중 가장 자주 보이는 두 사람이, 서연과 도윤이라는 것도.

 

구두는 우리를 남들 눈에 그럴듯하게 만들어줄지 몰라도, 맨발이 되어야만 비로소 우리는 서로의 진짜 무게를, 진짜 상처를, 진짜 온도를 나눌 수 있다.

서연은 그 밤 이후로도 여전히 아침이면 구두를 신고 출근했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언제든, 필요하면 그 구두를 벗어도 된다는 것을.

그리고 그 순간, 자신과 같은 속도로 맨발이 되어줄 사람이 있다는 것을.

 

가로등이 하나둘 켜지는 저녁, 두 사람은 오늘도 그 거리에서 나란히 신발을 벗는다.

 


 

소설 속 심리학적 현상 분석 — 한 단어로 정의하기

 

감정노동 서연이 회의실에서 억울함을 삼키고 정확히 15도 웃는 표정을 짓는 장면 혹실드(Hochschild)의 감정노동 개념은, 실제 감정과 무관하게 조직이 요구하는 표정과 태도를 연기해야 하는 상태를 가리킨다. 서연의 '완벽한 미소'는 능력이 아니라 오랜 시간 훈련된 감정노동의 결과이기에, 이 단어가 그녀의 초반 상태를 가장 정확히 설명한다.
자기불일치 "이상적 자아(완벽한 직장인)"와 "실제 자아(지치고 억울한 자신)" 사이에서 서연이 느끼는 만성적인 불안과 눈물 히긴스(Higgins)의 자기불일치 이론에서, 이상적 자아와 실제 자아의 간극이 클수록 슬픔과 낙담이 커진다. 서연이 구두를 벗어 던지는 행위는 이 간극을 처음으로 자각하고 좁히려는 시도로 읽을 수 있다.
유사성-매력 효과 낯선 남자 도윤을 처음 봤을 때, 그가 '같은 맨발'이라는 이유만으로 경계심 없이 곁을 내주는 장면 사회심리학의 유사성-매력 효과는, 자신과 비슷한 처지나 상태에 있는 사람에게 더 빠르고 강하게 마음을 여는 현상을 설명한다. 두 사람의 신뢰가 대화가 아니라 '같은 맨발'이라는 시각적 동질감에서 먼저 시작된 이유다.
자기노출 "오늘 있었던 일 중 진짜 하나만 말하기"라는 도윤의 제안과, 그로 인해 급속히 가까워지는 두 사람 사회적 침투 이론(Social Penetration Theory)은, 자신의 진짜 이야기를 조금씩 주고받는 과정이 관계의 친밀도를 단계적으로 깊게 만든다고 설명한다. 이 소설의 '가이드의 계획'이 대사가 아니라 하나의 '규칙'으로 제시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체화된 인지(그라운딩) 맨발로 젖은 아스팔트를 딛는 감각이 실제로 서연의 감정을 가라앉히고 현실감을 되찾아주는 장면들 체화된 인지 이론과 임상심리에서 쓰이는 그라운딩 기법은, 신체 감각에 의도적으로 집중하는 것이 불안과 해리된 감정을 가라앉히는 데 효과적이라고 본다. '맨발'이라는 이 소설의 제목이자 핵심 장치를, 실제 심리학적 근거로 뒷받침해주는 개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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