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겨진 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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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모르게 가꾼 마음이, 서로에게 닿기까지

그 정원의 존재를 아는 사람은, 이 건물 전체에서 딱 한 명뿐이었다.

그런데 8월의 어느 밤, 그 숫자가 둘로 늘어났다.

잠들지 못하는 밤

이수아는 요즘 잠을 자지 않는 게 아니라, 잠들지 못했다.

성북동 언덕길, 5층짜리 낡은 상가주택 '미래빌'의 3평짜리 옥탑 원룸.

다니던 디자인 스튜디오를 그만두고 다음 자리를 찾는 동안만 머물기로 한 곳이었다.

원래 살던 오피스텔보다 월세가 절반이었고, 무엇보다 아무도 수아를 몰랐다. 그게 지금은 제일 필요한 조건이었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지 여섯 달이 지났다.

초등학생 때부터 방학마다 할머니 집 옥상 화단에서 봉숭아 물을 들이고 상추를 땄던 기억이, 장례식장에서는 이상하게 하나도 떠오르지 않았다.

사람들은 수아를 보며 "씩씩하다"고 했다.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삼일장을 치러낸 손녀.

하지만 씩씩한 게 아니었다.

그냥,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슬픔이 와야 할 자리에 커다란 무감각이 대신 들어앉아 있었다.

 

그날 밤도 수아는 좁은 옥탑방 침대에 누워 천장만 보고 있었다.

새벽 한 시, 창밖으로 옥상 계단 쪽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조심스러운, 남의 눈을 피하는 듯한 발걸음. 수아는 몸을 일으켰다.

옥상의 문

계단 끝, 늘 잠겨 있던 옥상 철문이 살짝 열려 있었다.

문틈으로 노란 불빛이 새어 나왔다.

수아는 숨을 죽이고 문을 밀었다.

 

거기, 아무것도 없어야 할 낡은 건물 옥상에 작은 정원이 있었다.

방울토마토가 열린 화분들이 줄지어 있고, 허브 화분에서 옅은 향이 났다.

한쪽에는 손수 짠 듯한 나무 벤치와, 지금 막 하얗게 벌어지기 시작한 박꽃 넝쿨이 낡은 물탱크를 타고 올라가 있었다.

낮은 조명 아래, 한 남자가 물뿌리개를 들고 서 있다가 수아를 보고 그대로 굳었다.

 

"...누구세요."

 

낮고 경계하는 목소리였다.

30대 초중반쯤 되어 보이는 남자는 흙 묻은 목장갑을 낀 채, 마치 도둑질하다 걸린 사람처럼 정원 앞을 몸으로 가리고 있었다.

 

"저 아래층 살아요. 옥탑에. 문이 열려 있길래..."

"여기, 관리실에 얘기 안 하셨으면 좋겠는데요."

 

강한결이라는 이름을 알게 된 건 한참 뒤였다.

그날 밤 그는 딱 그 말만 하고, 수아를 서둘러 돌려보냈다.

하지만 수아는 문을 나서기 직전, 그의 어깨너머로 벤치 위에 가지런히 놓인 작은 스케치북과 낡은 사진 한 장을 보고 말았다.

젊은 여자가 활짝 웃고 있는 사진이었다.

그가 가꾸는 것

다음 날 밤, 수아는 다시 옥상으로 올라갔다.

이번엔 빈손이 아니라, 할머니가 쓰던 낡은 모종삽을 들고서였다.

한결은 처음엔 그녀를 쫓아내려는 얼굴이었지만, 수아가 방울토마토 곁순을 능숙하게 따내는 걸 보고는 아무 말 없이 옆에서 지켜만 봤다.

 

"이런 거, 어디서 배웠어요?"

"할머니가 정원을 가꾸셨어요. 저 초등학교 때부터."

 

그 말을 하다가, 수아는 스스로도 놀랐다.

장례식장에서도, 그 뒤로도 누구에게 먼저 할머니 얘기를 꺼낸 적이 없었다.

그런데 흙을 만지고 있으니, 말이 저절로 나왔다.

 

한결은 그제야 조금 마음을 풀었다.

이 옥상 정원은 3년 전, 그의 동생 세은이 사고로 세상을 떠난 뒤부터 그가 혼자 가꾸기 시작한 것이었다.

 

원래 관리사무소 창고로 쓰던 방치된 옥상을, 아무도 모르게 조금씩 흙을 나르고 씨앗을 심어 지금의 정원으로 만들었다.

동생이 살아있을 때 "언젠가 옥상에 작은 정원 만들어서 삼겹살 파티 하자"고 노래를 부르던 약속이었다.

 

"근데 왜 아무한테도 안 알리셨어요? 이렇게 예쁜데."

"알리면... 관리실에서 뭐라고 하겠죠. 무단 사용이니, 안전 문제니. 그리고..."

 

한결은 잠시 말을 멈췄다가, 처음 보는 사람 앞에서 왜인지 솔직해졌다.

 

"누가 알면, 설명해야 하잖아요. 왜 이걸 만들었는지. 근데 저는 아직, 그 얘기를 남한테 할 준비가 안 됐어요."

 

그날 이후 수아는 매일 밤 옥상에 올라갔다.

한결은 정원 가꾸는 법을 하나씩 알려줬다.

물은 아침저녁으로 조금씩, 꽃이 시들었다고 바로 뽑지 말고 며칠은 더 기다려볼 것, 그리고 무엇보다,

 

"매일 조금씩 들여다보는 것. 그게 다예요. 빨리 키우는 방법 같은 건 없어요. 그냥 매일, 죽었나 살았나 들여다보는 것뿐이에요."

 

어느 날 밤, 한결은 수아의 가방에서 삐죽 나온 스케치북을 발견했다.

예전에 디자인 스튜디오에서 쓰던, 이제는 표지가 낡은 스케치북이었다.

 

"그림 그리는 사람이었어요?"

"...예전엔요."

"그럼 이거, 한번 그려봐요. 매일 조금씩. 저 박꽃, 오늘이랑 내일이랑 모양이 달라요. 그거 놓치면 아까워요."

 

수아는 그날 밤 처음으로, 여섯 달 만에 연필을 쥐고 무언가를 그렸다.

삐뚤빼뚤한 박꽃 스케치 한 장이었지만, 그리는 내내 이상하게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재개발 통보

9월 초, 미래빌 1층 게시판에 낯선 공고문이 붙었다.

'정비구역 지정 및 재개발조합 임시총회 개최 안내'.

두 달 뒤, 이 일대 노후 건물들이 모두 철거되고 새 아파트 단지가 들어선다는 내용이었다.

 

수아는 그 종이를 옥상까지 들고 올라갔다. 한결은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담담한 얼굴이었다.

 

"어차피 예정돼 있던 거예요. 여기 오래된 동네니까."

"근데 이 정원은요? 이거, 다 없어지는 거잖아요."

"없어지겠죠. 원래 없었던 것처럼."

 

한결의 목소리에는 체념이 짙게 배어 있었다.

그는 이미 마음을 정한 사람 같았다.

철거되기 전에 화분 몇 개만 챙겨서 조용히 옮기고, 나머지는 그냥 두고 떠날 생각이라고 했다.

 

"싸워볼 생각은 안 해봤어요? 여기 조합에 얘기해서, 새 건물에 정원 자리 하나 남겨달라고..."

"수아 씨."

 

한결이 처음으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저는 이거, 계속 비밀로 하고 싶었어요. 세은이 얘기를 사람들 앞에서 하고 싶지 않아서요. 근데 정원을 지키려면, 이제 이걸 사람들한테 다 보여줘야 하잖아요. 왜 만들었는지, 누구를 위한 건지. 저는 그럴 자신이 없어요."

 

수아는 그 말 앞에서 순간 멈칫했다.

낯설지 않은 말이었다.

자신도 늘 그랬으니까.

할머니 얘기를, 진짜 슬픔을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않으려고 여섯 달을 무감각 속에 숨어 지냈다.

정원을 세상 밖으로

그날 밤 수아는 옥탑방에 돌아와 오래 뒤척였다.

그리고 문득, 한결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매일 들여다보는 것만이, 안 죽게 하는 방법이에요."

 

수아는 자리에서 일어나 스케치북을 펼쳤다.

그동안 그려온 박꽃, 방울토마토, 벤치, 그리고 한결의 뒷모습까지, 한 달 넘게 채워온 그림들이 거기 있었다.

이건 이미 충분히 아름다운 기록이었다.

 

다음 날, 수아는 정원으로 올라가 한결에게 스케치북을 내밀었다.

 

"이거 봐요. 여기 세은 씨 이야기도, 안 해도 돼요. 그냥 이 정원이 얼마나 오래, 얼마나 정성으로 가꿔졌는지만 보여줘요. 조합 임시총회에서, 새 단지 설계에 작은 커뮤니티 정원 하나 넣어달라고 제안해봐요. 제가 발표 자료 만들게요. 저 원래 이런 거, 만들던 사람이잖아요."

 

한결은 한참 스케치북을 넘겨봤다.

자신도 모르게 3년을 쏟은 정원이, 낯선 사람의 그림 속에서 이렇게 다정하게 담겨 있었다는 걸 그제야 실감하는 얼굴이었다.

 

"...실패하면요?"

"실패해도, 적어도 이 정원이 있었다는 건 기록으로 남아요. 아무도 몰랐던 것보다는 나아요."

 

한결은 오래 침묵하다가,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다.

 

"해봐요. 대신, 총회 날 저도 같이 가는 거예요. 세은이 얘기, 필요하면 할게요."

 

두 사람은 남은 2주 동안 매일 밤 옥상에 남아 자료를 만들었다.

수아는 정원의 사계절 스케치와 함께, "이 작은 정원이 한 사람의 슬픔을 어떻게 버티게 했는지"를 담은 짧은 소책자를 완성해갔다.

 

한결은 처음으로 세은에 대한 기억을 하나씩 꺼내 수아에게 들려줬다.

동생이 좋아했던 나팔꽃 색깔, 마지막으로 함께 먹었던 삼겹살, 그리고 사고가 나던 날의 이야기까지.

총회 전날

총회를 하루 앞둔 밤, 수아는 소책자의 마지막 페이지를 인쇄해 옥상으로 올라갔다.

그런데 정원엔 아무도 없었다.

전화도 받지 않았다.

수아는 불안한 마음으로 벤치에 앉아 기다렸다.

한 시간쯤 지나 한결에게서 짧은 문자가 왔다.

 

"저 내일 총회 못 갈 것 같아요. 죄송해요."

 

내일이 마침 세은의 기일이라는 걸, 수아는 그제야 알았다.

한결은 매년 이맘때가 되면 아무도 모르게 사라져, 동생이 묻힌 곳에 혼자 다녀오곤 했다.

 

수아는 그 문자를 한참 들여다봤다.

화가 나지는 않았다.

다만, 한결이 여전히 가장 힘든 순간엔 혼자 숨는 사람이라는 게, 그리고 자신도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게 마음을 무겁게 했다.

나도 지금, 그냥 여기서 포기하고 싶어졌으니까.

 

수아는 소책자를 가방에 넣고 잠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할머니를 떠올렸다.

옥상 화단에서 늘 하시던 말씀이 있었다.

 

"식물은 안 보이는 데서도 자란다. 뿌리가 먼저 자라고, 꽃은 젤 나중에 피는 거야. 안 보인다고 안 자라는 거 아니다."

 

수아는 눈을 떴다. 그리고 결심했다.

한결이 못 오면, 오늘은 자신이 먼저 그 뿌리가 되어보기로.

총회, 그리고 돌아온 사람

다음 날 저녁, 조합 임시총회가 열리는 주민센터 강당은 어수선했다.

수아는 안건 발언 순서를 기다리며 소책자를 꼭 쥐고 있었다. 이름이 불렸다.

 

"미래빌 옥상 관련해서, 발언하실 분이 계시다고요."

 

수아는 단상에 서서 스케치북 그림을 화면에 띄웠다.

처음엔 목소리가 떨렸다.

 

"이건, 저희 건물 옥상에서 3년 동안 아무도 모르게 가꿔져 온 정원입니다. 이걸 만든 분은, 소중한 사람을 떠나보내고, 이 정원 하나로 하루하루를 버텨오셨습니다. 저는 새 단지 설계에, 이런 작은 정원 자리 하나를 남겨주실 수 있는지 여쭙고 싶어서 나왔습니다."

 

몇몇 조합원들이 웅성거렸다.

"그게 우리 사업성이랑 무슨 상관이냐"는 목소리도 들렸다.

수아의 목소리가 다시 흔들리려는 순간, 강당 뒤쪽 문이 열렸다.

 

한결이었다.

눈이 붉게 부어 있었지만, 그는 곧장 앞으로 걸어 나왔다.

 

"제가 그 정원 만든 사람입니다."

 

강당이 조용해졌다.

한결은 수아 옆에 서서, 처음으로 낯선 사람들 앞에서 세은의 이야기를 꺼냈다.

 

"3년 전에 동생을 잃었습니다. 언젠가 옥상에서 같이 삼겹살 파티 하자던 약속을, 저 혼자 지키려고 정원을 만들었어요. 아무한테도 말 안 하고 숨겨온 이유는, 이 얘기를 하는 게 무서워서였습니다. 근데 이제는 알겠어요. 계속 숨기기만 하면, 이 정원도, 저도, 결국 혼자 죽는 거더라고요."

 

그는 씨앗 봉투 몇 개를 꺼내 앞줄 조합원들에게 건넸다.

 

"거창한 걸 바라는 게 아닙니다. 그냥, 이 동네에 이런 정원 하나 있었다는 걸 기억해주실 자리 하나만, 새 단지 어디든 부탁드립니다."

 

정적 끝에, 나이 지긋한 조합장이 입을 열었다.

 

"...일단, 설계 안건으로 정식 상정해서 검토해봅시다. 공동체 공간 조성 항목에 포함시키는 걸로."

 

만장일치의 완벽한 승리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했다.

강당을 나서는 두 사람의 걸음은, 그 어느 때보다 가벼웠다.

숨겨진 정원, 그 후

두 달 뒤, 미래빌 철거가 시작되던 날 아침.

수아와 한결은 마지막으로 옥상에 올라가 화분들을 하나씩 정리했다.

튼튼하게 자란 것들은 새 단지 조감도에 표시된 '커뮤니티 정원' 예정 부지 근처, 임시로 마련된 공용 화단으로 옮겨졌다.

 

그해 봄, 수아는 마침내 할머니의 산소 앞에서 울었다.

여섯 달 늦은 눈물이었지만, 늦은 만큼 오래 울었다.

그리고 그 곁에는, 말없이 어깨를 빌려준 한결이 있었다.

 

새 단지 완공까지는 아직 몇 년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임시 화단은 그새 동네 사람들 사이에서 입소문이 났다.

"누가 이렇게 예쁘게 가꿨대?" 묻는 이웃들에게, 한결은 이제 더는 숨기지 않고 담담히 대답했다.

 

"제 동생이 심고 싶어 했던 거예요. 그리고 이 사람이, 그걸 그림으로 남겨줬고요."

 

숨겨진 정원이라는 이름이 무색해질 만큼, 이제 그 정원은 모두의 것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 여전히 매일 밤 나란히 물뿌리개를 든 두 사람이 있었다.

(끝)

 

소설 속 심리학적 현상 분석 — 한 단어로 정의하기


정서적 마비 할머니의 장례식에서도, 그 뒤 여섯 달 동안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못하는 수아의 초반 상태 상실 직후 감정이 압도적일 때, 뇌는 오히려 감정을 차단해 기능을 유지하려 한다. 이 정서적 마비 상태는 무감각을 '씩씩함'으로 오해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수아의 초기 심리를 가장 정확히 설명하는 단어다.
회피애착(회피성 대처) 한결이 3년 동안 정원의 존재를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동생 이야기를 피해온 태도 볼비(Bowlby)의 애착이론에서 파생된 회피성 대처는, 상실의 고통을 직면하는 대신 그 대상 자체를 숨기거나 거리를 둠으로써 통제감을 유지하려는 전략을 가리킨다. 한결이 "설명해야 하는 게 무섭다"고 말하는 대목이 이 개념의 핵심을 그대로 보여준다.
안전기지 수아가 매일 밤 옥상 정원에 올라가 처음으로 할머니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꺼내는 장면 애착이론의 '안전기지(secure base)' 개념은, 위협 없이 자신을 그대로 드러낼 수 있는 공간이나 관계가 정서적 탐색과 회복을 가능하게 한다고 설명한다. 옥상 정원이라는 물리적 공간 자체가 이 소설에서 심리적 안전기지 역할을 한다.
원예치료 효과 흙을 만지고 식물을 돌보는 행위를 통해 수아가 조금씩 감정을 되찾아가는 과정 전반 원예치료 연구는 식물을 가꾸는 반복적 신체 활동이 코르티솔 수치를 낮추고 정서적 개방성을 높인다고 보고한다. 말보다 손이 먼저 슬픔을 풀어내는 이 소설의 전개 방식은, 대화가 아닌 '가꾸는 행위' 자체를 치유의 도구로 설계한 결과다.
목격 효과 한결이 낯선 조합원들 앞에서 처음으로 세은의 이야기를 공개적으로 꺼내는 총회 장면 심리학에서 트라우마나 상실의 이야기를 공동체 앞에서 증언하듯 나눌 때, 그 경험이 사적인 고통에서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기억으로 전환되는 현상을 목격 효과라 부른다. 정원이 '비밀'에서 '모두의 것'으로 바뀌는 결말이 이 개념 위에서 완성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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