냄비 앞에서 운 남자, 딸의 젓가락이 멈췄다
냄비 뚜껑을 열자 탄내가 훅 끼쳤다.
준영은 가스불도 끄지 못한 채 그대로 서 있었다.
오늘로 벌써 세 번째 실패였다.
딸의 생일은 사흘 뒤였다.
탄내가 난 세 번의 시도
아내가 떠난 지 일 년하고도 두 달이 지났다.
그 후로 준영의 부엌은 거의 닫혀 있었다.
열일곱 살 하은과는 요즘 말을 섞는 일도 드물었다.
그나마 좋아하던 음식이
엄마가 끓여주던 된장찌개
였다는 걸, 준영은 최근에야 냉장고에 붙은 메모지에서 알았다.
문제는 레시피가 없다는 거였다.
아내는 계량 없이, 손짐작으로만 요리하던 사람이었다.
준영이 아는 거라곤 된장과 두부, 호박이 들어간다는 것뿐. 사흘 동안 세 번을 끓였지만 첫 번째는 너무 짰고, 두 번째는 밍밍했고, 오늘은 바닥이 눌어붙어 탄내가 났다.
시장 골목, 순자 할머니
답답한 마음에 준영은 동네 재래시장으로 향했다.
아내가 십 년 넘게 반찬을 사 오던 골목이었다.
낯익은 간판들 사이,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된장 좌판 하나가 보였다.
'된장 좀 볼까요' 하고 들여다보다가, 준영은 자기도 모르게 사정을 털어놓고 있었다.
좌판 주인 순자는 일흔둘, 삼십 년째 그 자리에서 장을 담그고 반찬을 팔아온 사람이었다.
이야기를 듣던 순자가 국자를 내려놓았다.
'그 집 아저씨구나. 민정 씨가 된장 가져갈 때마다 옆에서 기다리던 사람.'
매주 화요일마다 된장 두 스푼을 사 가던 손님
이었다고, 순자는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 말 한마디에 준영은 십 년 만에 처음 보는 사람 앞에서 눈시울이 붉어졌다.
순자는 못 본 척 좌판 정리를 계속했다.
그리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내일 아침 열 시에 와요. 가르쳐 줄 테니.'
손으로 적은 레시피 노트
다음 날 아침, 순자는 준영을 좌판 뒤 작은 부엌으로 불렀다.
냄비도 도마도 삼십 년은 써온 것들이었다.
순자는 종이 한 장을 꺼내더니 볼펜으로 또박또박 적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 멸치육수는 반드시 찬물에서부터 끓인다 — 끓는 물에 넣으면 비린내가 남는다
- 된장은 두 숟가락 반, 마지막 한 숟가락은 불 끄기 직전에 풀어야 향이 산다
- 호박은 마지막 3분, 두부는 마지막 1분 — 순서를 지켜야 으스러지지 않는다
맛은 손이 아니라 순서에서 나와요
순자가 말했다.
'민정 씨도 처음엔 나한테 배웠어요.'
준영은 놀라 국자를 놓칠 뻔했다.
메모를 다 적은 순자가 종이를 건넸다.
'이제 직접 끓여봐요. 막히면 전화해요, 내가 받을 테니.'
네 번째 냄비, 그리고 한 통의 전화
생일 전날 저녁, 준영은 순자의 메모를 옆에 펴놓고 네 번째 냄비를 올렸다.
손이 떨렸다. 멸치를 찬물에 넣고, 된장 두 숟가락 반을 풀고, 시계를 몇 번이나 확인했다.
그런데 호박을 너무 일찍 넣어버렸다.
국물이 순식간에 걸쭉해졌다.
당황한 준영은 그대로 순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괜찮아요, 아직 안 늦었어요.' 순자는 침착했다.
'불을 약하게 줄이고, 물 반 컵만 더 넣어요.
두부는 지금 말고 2분 뒤에.' 전화기 너머 그 목소리 하나로, 준영은 냄비 앞에서 버틸 수 있었다.
십 분 뒤, 국물이 다시 맑아졌고, 부엌에는 처음으로 탄내도 짠맛도 아닌 냄새가 채워졌다.
생일상 위에서 멈춘 젓가락
다음 날 저녁, 식탁 위에 된장찌개가 올라왔다.
하은은 평소처럼 무심하게 젓가락을 들었다가, 한 입을 뜨고는 그대로 멈췄다.
“아빠, 이거... 엄마 맛이야.”
하은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준영도 더는 참지 못했다.
열일곱 살 딸과 마흔여덟 살 아빠가, 식어가는 찌개를 사이에 두고 처음으로 오래 마주 앉아 있었다.
그날 이후 두 사람은
화요일마다 함께 시장에 간다.
순자의 좌판에서 된장을 사고, 나란히 부엌에 선다. 레시피 노트는 이제 하은의 손글씨로 한 줄씩 늘어가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