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디를 세 번 틀린 남자, 손자의 얼굴을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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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지 리어카 옆에 세워둔 낡은 휴대폰

박정만은 예순셋이다. 30년 동안 프레스 기계 앞에 서서 철판을 눌렀다. 퇴직하고 두 해가 지났고, 요즘은 새벽마다 동네를 돌며 폐지를 줍는다. 리어카 손잡이에는 딸이 사준 스마트폰이 노끈으로 묶여 늘 걸려 있다.
그 휴대폰으로 그가 할 줄 아는 건 딱 하나, 전화 받기다. 문자메시지가 오면 딸에게 전화를 걸어 읽어달라고 한다. 화면 속 자잘한 글씨와 아이콘들은 그에게 늘 낯선 외국어처럼 보인다.
손자 이준이는 3년 전 부모를 따라 캐나다로 떠났다.
그날 이후 정만이 손자 얼굴을 본 건 명절마다 딸이 보내주는 사진 몇 장이 전부다
.
다음 달이면 이준이 여덟 살이 된다. 딸은 생일에 영상통화를 해보자고 했다. 정만은 알았다고 답했지만, 속으로는 덜컥 겁이 났다.
키보드 앞에서 굳어버린 손

딸이 알려준 대로 정만은 혼자 스마트폰 화면을 눌러봤다. 초록색 아이콘을 누르니 낯선 화면이 떴다. 몇 번을 눌러도 손자의 얼굴은 나오지 않고 이상한 메시지만 떴다.
“아버지, 그거 아니고 이거요.”
딸이 전화로 설명했지만 정만의 귀에는 절반도 들어오지 않았다. 그는 결국 전화기를 내려놓고 한참을 앉아 있었다.
부끄러웠다. 30년 동안 기계를 다뤘던 손인데, 손가락 하나로 하는 이 작은 일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는 그날 밤 휴대폰을 서랍에 넣어버렸다.
복지관 문을 두드린 이유

일주일 뒤, 폐지를 팔러 간 고물상 옆 게시판에서 종이 한 장을 봤다. 동네 복지관에서 어르신 디지털배움터를 연다는 안내문이었다. 정만은 그 앞에 한참을 서 있다가 전화번호를 적어 왔다.
복지관 3층, 작은 강의실에는 정만 또래의 어르신 여섯 명이 앉아 있었다. 강사는 김서연이라는 이름의 젊은 여성이었다. 서른이 채 안 되어 보이는데, 목소리는 서두르지 않고 또박또박했다.
“오늘 처음 오신 분, 손 들어주세요.”
정만은 슬며시 손을 반쯤 들었다. 서연은 그를 보고 웃으며 다가왔다.
“전화 받으실 줄 아시죠? 그럼 절반은 이미 하고 계신 거예요.”
그 한마디에 정만의 어깨가 조금 내려갔다. 누구도 그에게 이렇게 말해준 적이 없었다.
다섯 개의 낱말이면 충분해요

서연은 화면 가득한 메뉴 대신 종이 한 장을 꺼냈다. 거기에는 큼직한 글씨로 다섯 단어만 적혀 있었다. 초록 버튼, 이준이 이름, 통화 버튼, 빨간 버튼, 그리고 확인.
- 초록 버튼을 찾는다
- 이준이 이름을 누른다
- 통화 버튼을 누른다
- 화면에 얼굴이 보이면 끝까지 기다린다
- 끝나면 빨간 버튼을 누른다
“다섯 걸음이에요. 여섯도 일곱도 아니고, 딱 다섯 걸음.”
서연은 정만의 휴대폰을 손에 쥐고 한 단계씩 같이 눌러보게 했다. 틀려도 괜찮다고, 다시 누르면 된다고 계속 말해주었다. 정만은 세 번을 틀렸고, 네 번째에 처음으로 화면에 초록 불이 들어왔다.
그날 그는 복지관을 나서며 종이를 셔츠 안주머니에 고이 접어 넣었다. 그 다섯 단어가 마치 부적처럼 느껴졌다.
화요일 저녁 7시, 3번 자리

그날 이후 정만은 화요일 저녁마다 복지관 3층, 늘 앉던 세 번째 자리로 갔다. 비가 와도 갔고, 무릎이 시린 날도 갔다. 리어카를 끌던 길에 문득 다섯 단어를 입속으로 되뇌기도 했다.
집에 돌아오면 종이에 적힌 순서를 손으로 따라 눌러보며 연습했다. 처음엔 손이 떨렸지만, 세 주가 지나자 순서가 몸에 붙기 시작했다. 서연은 매번 “지난주보다 훨씬 빨라지셨어요”라고 말해주었다.
그 말이 정만에게는 월급명세서보다 더 귀하게 들렸다. 젊은 시절 기계를 처음 배우던 때가 떠올랐다. 그때도 누군가 옆에서 이렇게 기다려줬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생각했다.
화면이 까매지던 밤
이준이 생일 전날 밤이었다. 정만은 연습 삼아 딸에게 영상통화를 걸어보려 했다. 그런데 버튼을 누르자 화면이 그대로 까매지더니 아무 반응이 없었다.
손이 다시 떨리기 시작했다. 그는 서랍 속 종이를 꺼내 다섯 단어를 다시 읽었지만 소용없었다. 하마터면 내일 통화를 포기하겠다고 딸에게 전화할 뻔했다.
그때 문득 서연이 준 명함이 떠올랐다. 늦은 시간이라 망설였지만, 그는 용기를 내어 문자를 보냈다. 몇 분 뒤 답이 왔다.
“전원 버튼을 5초만 꾹 누르고 계셔보세요. 제가 전화로 같이 해드릴게요.”
서연은 밤 열 시가 넘은 시간에 전화를 걸어와 차분히 순서를 다시 짚어주었다. 꺼졌던 화면에 불이 들어오자 정만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날 밤 그는 다섯 단어 아래에 여섯 번째 문장을 하나 더 적었다. 안 되면 선생님께 물어본다.
이 이야기 속 마음 읽기
학습된 무기력
첫 수업에서 절반도 알아듣지 못한 채 휴대폰을 서랍에 넣어버린 장면은, 반복된 실패 경험이 시도 자체를 포기하게 만드는 전형적인 모습이다. 정만은 기계를 다루던 손조차 소용없다고 느끼며 스스로 물러난다.
사회적 비교로 인한 위축
강의실에서 손을 슬며시 반쯤 든 행동은 또래 앞에서도 뒤처진다고 느끼는 마음을 보여준다. 젊은 강사 앞이 아니라 오히려 같은 처지의 어르신들 앞에서 더 움츠러드는 모습이 이를 뒷받침한다.
청킹을 통한 인지 부담 완화
서연이 복잡한 화면 대신 다섯 단어로 순서를 쪼개 종이에 적어준 것은 정보를 작은 단위로 나눠 기억 부담을 줄이는 방법이다. 정만이 그 종이를 부적처럼 접어 간직한 것은 이 단순화가 실제로 효과가 있었음을 보여준다.
자기효능감의 점진적 회복
“지난주보다 빨라지셨어요”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정만의 태도가 조금씩 달라진다. 작은 성공이 반복되며 스스로 할 수 있다는 믿음이 서서히 쌓이는 과정이 뚜렷하게 드러난다.
도움 요청에 대한 심리적 장벽의 해소
화면이 꺼진 밤, 처음엔 포기하려다 결국 문자를 보내는 장면은 도움을 청하는 것을 부끄러워하던 마음이 무너지는 순간이다. 이후 그가 종이에 ‘안 되면 물어본다’는 문장을 스스로 추가한 것은 이 변화가 하나의 태도로 자리 잡았음을 보여준다.
화면 너머로 “할아버지!” 하고 웃는 이준이의 얼굴이 나타났을 때, 정만은 다섯 단어가 적힌 종이를 조용히 접어 다시 안주머니에 넣었다.
오늘 누군가 새로운 것 앞에서 손을 반쯤만 들고 있다면, 필요한 건 열 개의 설명이 아니라 다섯 개의 걸음일지도 모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