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급실 간호사가 건넨 커피 한 잔, 합격 발표가 오던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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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급실 간호사가 건넨 커피 한 잔, 합격 발표가 오던 밤

발표를 열두 시간 앞두고

도윤은 휴대폰 화면을 열두 번째로 켰다. 시계는 밤 열한 시 사 분을 가리켰다. 정규직 전환 합격자 발표는 내일 아침 여섯 시, 정확히 열아홉 시간 뒤였다. 그는 화면 밝기를 최소로 낮췄지만 눈은 자꾸 그 숫자를 따라갔다.

사회복지사 계약직으로 일한 지 삼 년째였다. 서류 심사와 실무 평가, 면접까지 세 단계를 거치는 이번 전환 심사가 그에게는 마지막 기회였다. 정원은 단 두 자리, 지원자는 열한 명이었다.

떨어지면 다시 일 년짜리 계약을 연장해야 했고, 그마저 장담할 수 없었다. 서른두 살,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생각이 그를 짓눌렀다.

그는 여섯 평 남짓한 원룸에 이불을 깔고 누웠지만 잠은 오지 않았다. 천장에 번진 누런 얼룩이 자꾸 숫자로 보였다. 6, 그리고 다시 6.

옆방에서 할머니 옥희의 기침 소리가 들렸다. 요즘 부쩍 잦아진 기침이었지만, 환절기마다 늘 그랬던 터라 도윤은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괜찮으세요, 그가 벽 너머로 물었다.

괜찮다, 얼른 자거라. 할머니의 목소리가 얇게 대답했다.

도윤은 눈을 감았다. 여섯 시간만 버티면 되는 밤이라고, 그렇게만 생각했다. 하지만 몸은 자꾸 뒤척였고, 발표 화면을 상상하는 것만으로 손끝이 차가워졌다.

전화벨이 울린 밤

자정을 넘긴 시각, 쿵 하는 소리가 났다. 도윤이 뛰어가 보니 할머니가 화장실 문턱 앞에 쓰러져 있었다. 슬리퍼 한 짝은 저만치 벗겨져 있었다.

할머니, 할머니! 그가 어깨를 흔들며 소리쳤다.

할머니의 입술이 파랗게 질려 있었다. 숨소리는 이상하게 짧고 거칠었고, 가슴이 위태롭게 들썩였다.

119에 신고하는 손이 떨렸다. 주소를 말하다 두 번이나 더듬었고, 번호도 두 번이나 잘못 눌렀다. 겨우 연결된 상담원의 목소리가 그를 진정시켰다.

구급차 사이렌 소리가 골목을 채웠다. 도윤은 담요만 챙겨 든 채 맨발로 계단을 세 층이나 뛰어 내려갔다.

응급실 자동문이 열리자 소독약 냄새가 훅 끼쳤다. 형광등은 지나치게 밝았고, 들것을 미는 사람들의 발소리만 다급하게 울렸다.

보호자분은 여기서 기다려주세요. 젊은 의료진이 그를 플라스틱 대기 의자로 안내했다.

도윤은 의자에 앉아 휴대폰을 봤다. 새벽 한 시 십칠 분. 다섯 시간도 안 남은 발표 시간이 지금은 아무 의미가 없어 보였다.

응급실 구석에서 만난 사람

삼십 분쯤 지났을 때, 종이컵에 담긴 커피 한 잔이 그의 손에 쥐어졌다. 명찰에는 한소진이라는 이름과 응급간호팀이라는 글자가 적혀 있었다.

손이 얼음장이시네요. 그녀가 짧게 웃으며 말했다.

할머니는요, 도윤이 다급하게 물었다.

폐렴 초기 증상에 탈수까지 겹치셨어요. 체온 38도 2부, 산소포화도는 94퍼센트로 올라왔고요. 지금 수액 맞고 계시고 활력징후는 안정적이에요. 그녀가 차트를 보며 담담히 답했다.

십오 년 차 야간 전담 간호사라고 했다. 이 병원 응급실에서만 십 년을 넘게 밤을 지켰다는 그녀는, 하루에도 여러 번 낯선 사람의 불안을 마주하는 데 익숙해 보였다.

보호자님 표정이 할머니보다 더 안 좋으신데요. 그녀가 의자 옆에 걸터앉으며 물었다.

도윤은 얼떨결에 사정을 털어놨다. 내일 아침 여섯 시 발표, 삼 년의 계약직, 마지막 기회라는 말까지. 그리고 어머니 대신 자신을 업어 키운 할머니 이야기도 덧붙였다.

간호사가 건넨 말 한마디

그거, 지금 여기서 걱정한다고 결과가 바뀌나요. 한소진이 물었다.

아니요, 도윤이 작게 대답했다.

저는 밤마다 그런 얼굴을 봐요. 결과를 못 바꾸는 걸 알면서도 온몸으로 걱정하는 얼굴이요. 하루에 몇 명씩 그런 얼굴을 마주쳐요. 그녀가 말을 이었다.

제가 신입 때 배운 게 하나 있어요. 지금 내 손으로 할 수 있는 일과, 손을 떠난 일을 나누는 것. 그때 저를 가르친 선배가 해준 말이에요. 그녀가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발표는 손을 떠난 일이에요. 근데 할머니 옆에 있어드리는 건, 지금 보호자님이 할 수 있는 일이잖아요.

도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 말이 몸속 어딘가에 조용히 내려앉는 느낌이었다. 밤새 붙잡고 있던 숫자가 조금 흐려졌다.

할머니 깨어나시면 손 잡고 얘기 좀 해드리세요. 이런 밤일수록 사람 목소리가 제일 좋은 약이거든요. 그녀가 덧붙였다.

도윤이 움직이기 시작하다

도윤은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새벽 발표 알림을 신경 쓰는 대신, 병상 커튼을 걷고 안으로 들어갔다. 소독약 냄새 사이로 할머니의 숨소리가 조금 편안해져 있었다.

할머니 눈이 게슴츠레 떠졌다. 도윤은 그 손을 두 손으로 감쌌다. 손가락 마디마디가 유난히 앙상하게 느껴졌다.

나 여기 있어요, 그가 조용히 말했다.

발표는, 할머니가 힘없이 물었다.

그런 거 신경 쓰지 말고 좀 더 주무세요. 그가 이불을 여며주며 답했다.

그는 어릴 적 할머니가 들려주던 옛날이야기를 거꾸로 들려주기 시작했다. 여섯 살 때 밥투정하다 마당에서 울던 이야기, 초등학교 소풍날 김밥을 두 줄이나 싸주던 이야기, 업어 키운 이야기까지.

말을 하다 보니 손이 더 이상 떨리지 않았다. 걱정을 붙잡고 있던 자리에 다른 것이 들어선 것 같았다. 새벽 두 시가 넘도록 그렇게 두 사람은 조곤조곤 말을 주고받았다.

새벽 세 시, 위기의 순간

새벽 세 시, 모니터에서 삐 소리가 울렸다. 할머니의 산소포화도가 94퍼센트에서 순식간에 88퍼센트까지 뚝 떨어졌다.

도윤의 심장이 내려앉았다. 그는 얼어붙은 채 커튼 밖으로 손을 뻗었다.

간호사님, 그가 소리쳤다.

한소진이 뛰어와 산소마스크를 조절하고 할머니의 자세를 옆으로 바꿨다. 손놀림에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고, 동시에 다른 간호사를 불러 흡인기를 가져오게 했다.

괜찮아요, 기도가 살짝 막혔던 거예요. 지금 좋아지고 있어요.

그녀가 모니터 수치를 확인하며 말했다.

몇 분 뒤 경보음이 잦아들었다. 수치는 다시 96퍼센트까지 올라왔고, 할머니의 숨이 고르게 돌아왔다.

제가 늦게 알았으면 어쩔 뻔했어요, 도윤이 겨우 물었다.

그러라고 제가 밤새 이 자리에 있는 거예요. 그녀가 웃으며 대답했다.

아침이 오고, 발표가 열리다

창밖이 서서히 밝아왔다. 여섯 시가 되자 도윤의 휴대폰에 알림이 떴다. 밤새 붙들고 있던 그 숫자가 마침내 화면 위에 떠 있었다.

그는 잠시 화면을 보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그러곤 할머니의 손을 한 번 더 꼭 쥐었다.

열어봐라, 할머니가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손가락이 화면을 눌렀다. 정규직 전환 대상자 명단, 그 안에 도윤의 이름이 있었다.

됐다, 그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할머니가 힘없는 손으로 그의 등을 두드렸다. 잘했다, 라는 말이 숨소리처럼 새어 나왔다.

한소진이 회진을 돌다 그 옆을 지나며 물었다. 좋은 소식이에요?

네, 덕분에요. 도윤이 그녀를 향해 처음으로 활짝 웃었다.

제가 한 건 커피 한 잔이랑 말 몇 마디예요. 나머지는 다 보호자님이 하신 거고요. 그녀가 손을 흔들며 다음 병상으로 향했다.

도윤은 그 뒷모습을 오래 바라봤다. 걱정으로 밤을 지새우는 대신 곁을 지키는 법을 알려준 사람이었다. 손을 떠난 일과 손안에 남은 일을 나누는 법을, 그는 그 밤에야 배웠다.

여러분은 결과를 바꿀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밤새 화면만 붙잡고 있던 적이 있나요. 그런 밤일수록, 지금 손안에 남은 사람의 손을 잡아보는 건 어떨까요.

이 이야기 속 마음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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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제 착각

도윤은 발표 결과를 바꿀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밤새 휴대폰을 열두 번 넘게 확인했다. 손을 떠난 일을 계속 붙잡으려는 마음이 오히려 초조함을 키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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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 전이

도윤의 불안이 표정으로 드러나자 한소진이 먼저 알아채고 다가왔다. 낯선 사람도 얼굴에 드러난 감정을 읽고 반응하게 되는 심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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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제 가능한 일에 집중하기

한소진은 지금 할 수 있는 일과 손을 떠난 일을 나누라고 조언했다. 도윤이 실제로 발표 대신 할머니 곁을 지키는 쪽을 택하면서 불안이 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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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동을 통한 불안 완화

도윤은 옛날이야기를 들려주며 손이 더 이상 떨리지 않는 걸 느꼈다. 걱정하는 대신 구체적인 행동을 하자 감정이 자연스럽게 정리된 사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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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위자에 대한 신뢰 회복

산소포화도 경보가 울렸을 때 도윤은 패닉에 빠졌지만, 한소진의 침착하고 숙련된 대처를 본 뒤 안도했다. 전문가의 행동이 옆 사람의 두려움을 가라앉히는 과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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