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한마디 때문에, 나는 20년 동안 글을 못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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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한마디 때문에, 나는 20년 동안 글을 못 썼다

마감 사흘 전, 도서관에서 마주친 낯익은 뒷모습

유리문을 밀고 들어서던 소율의 발걸음이 복도 한가운데서 뚝 멈췄다. 안내 데스크 옆 작은 무대에서 아이들에게 그림책을 읽어주고 있는 백발의 여자, 그 뒷모습이 낯설지 않아서였다.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저 목소리, 저 말투, 설마.

소율은 서른두 살, 작은 출판사에서 오 년째 편집보조로 일하고 있었다. 퇴근 후 작업실 대신 쓰는 좁은 방 책상 위에는 반쯤 완성된 그림책 더미북이 늘 펼쳐져 있었지만, 누구에게도 보여준 적이 없었다. 꿈은 또렷한데 그 꿈을 세상에 내놓을 용기만 자꾸 바닥을 긁었다.

그 용기 없음의 뿌리는 스무 해도 더 지난 초등학교 5학년 교실에 있었다. 전교 글쓰기 대회에서 소율의 동화가 뽑혔던 그날, 담임 박인숙 선생님이 교탁 앞에서 던진 한마디가 지금도 귓가에 쟁쟁했다. "

이 글, 정말 네가 혼자 쓴 거 맞니?

" 그날 이후로 소율은 글을 쓸 때마다 그 목소리가 어깨 위에 올라앉는 기분이었다.

사흘 뒤면 출판사 사내 신인작가 공모전 마감이었다. 편집장 영우는 어제도 퇴근길에 소율을 붙잡고 다그쳤다.

"소율씨, 이번에도 안 내면 그냥 편집 일만 쭉 하는 거야. 올해 아니면 내년엔 공모전 자체가 없어진다잖아."

영우는 서류 더미를 옆구리에 낀 채 어깨를 툭 치고 지나갔고, 소율은 그 뒷모습을 보며 입술을 꾹 깨물었다. 원고는 반도 못 썼는데 마감은 코앞이었고, 하필 오늘은 도서관 독서행사 진행을 도와야 하는 날이었다. 그런데 그 행사 무대 위에, 이십 년 동안 피해 다니던 얼굴이 떡하니 앉아 있을 줄은 몰랐다.

피할 수 없는 재회, 함께 행사를 준비하라는 지시

당황한 소율이 슬그머니 몸을 돌려 나가려는 순간, 도서관장 현정이 반갑게 손을 흔들며 다가왔다. "소율씨 왔구나! 마침 잘됐다, 이번 주 '글쓰기와 만나는 밤' 행사 박인숙 선생님하고 같이 좀 챙겨줘요." 소율의 심장이 다시 철렁 내려앉았다.

"저... 제가요? 저는 오늘 다른 일이 많아서—"

현정은 소율의 말을 끝까지 듣지도 않고 벌써 저만치 걸어가며 손을 흔들었다. 박인숙 선생님이 올해부터 도서관 어린이 독서 봉사를 맡게 됐다는 설명만 등 뒤로 툭 던지고 사라졌다. 소율은 어쩔 수 없이 무대 쪽으로 걸어갔고, 가까워질수록 심장이 두근두근 요동쳤다.

가까이서 본 선생님은 많이 늙어 있었다. 허리가 조금 굽었고 안경 너머 눈가에는 주름이 자글자글했지만, 아이들을 보며 짓는 웃음만은 이십 년 전 그대로였다. 선생님이 먼저 소율을 알아보고 눈을 크게 떴다.

"어머, 소율이? 너 소율이 맞지?"

소율은 애써 표정을 굳히며 짧게 고개만 숙였다. 반가움보다 먼저 올라온 건 이십 년 묵은 서운함이었고, 그 서운함이 목소리를 딱딱하게 만들었다.

"네, 오랜만이에요, 선생님."

그 짧은 인사 뒤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선생님은 뭔가 더 말하고 싶은 얼굴이었지만, 마침 아이들이 몰려들어 대화는 거기서 끊겼다. 소율은 속으로 안도하면서도 어딘가 불편한 마음을 떨치지 못한 채 행사 준비를 거들기 시작했다.

행사 준비 중 한 꼬마 지호가 선생님 치맛자락을 붙잡고 큰 소리로 외쳤다. "할머니 선생님, 이 책 다 읽어주세요!" 둘레에 있던 아이들이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고, 선생님도 허허 웃으며 지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 웃음소리 속에서도 소율의 얼굴만은 좀처럼 풀리지 않았다.

행사가 끝나갈 무렵 선생님이 소율에게 다가와 조용히 말을 걸었다. "얘기 좀 할 수 있을까? 잠깐이면 돼." 소율은 시계를 보는 척하며 발걸음을 돌렸다.

"죄송해요 선생님, 저 지금 마감 때문에 너무 바빠서요. 다음에 뵐게요."

거짓말은 아니었지만 온전히 사실도 아니었다. 소율은 도망치듯 가방을 챙겨 나오다 서가 모서리에 발이 걸려 하마터면 책더미를 와르르 무너뜨릴 뻔했다. 뒤에서 들려온 선생님의 작은 웃음소리에 귀까지 빨개진 채 로비를 빠져나왔다.

낡은 노트를 꺼내 든 선생님

이틀 뒤 퇴근길, 회사 앞 버스 정류장 의자에 낯익은 사람이 앉아 있었다. 박인숙 선생님이었다. 무릎 위에는 색이 바랜 공책 한 권이 가방끈에 묶인 채 얹혀 있었고, 소율은 그 낡은 표지를 보는 순간 발이 바닥에 붙은 듯 멈춰 섰다.

"잠깐만 앉아줄래? 오래 안 걸려." 선생님이 옆자리를 손바닥으로 탁탁 두드리며 말했다.

소율은 거절할 말을 고르다가 결국 아무 말도 못 하고 엉거주춤 옆에 앉았다. 선생님은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지 않고 한참 동안 손끝으로 공책 표지를 쓸었다. 소율의 눈길이 자꾸 그 공책으로 쏠렸다. 익숙한 필체, 낡은 얼룩, 분명 자기 것이었다.

"이거… 그때 네가 두고 간 거야. 돌려줘야 하는데, 네가 전학 가버려서 못 줬어."

소율의 손이 저도 모르게 공책 쪽으로 뻗다가 멈췄다. 받고 싶으면서도 받기 싫은, 설명할 수 없는 마음이 동시에 울컥 올라왔다. 이십 년 동안 다잡아 놓은 담담함이 순식간에 흔들렸다.

"그때 왜 그러셨어요? 왜 제 글을 의심하셨어요. 그 한마디 때문에 저... 그 뒤로 한 번도 제대로 글을 못 썼어요."

말을 뱉고 나니 목이 메어 더 말을 잇지 못했다. 버스가 한 대 지나가며 경적을 울렸고, 그 소리에 묻혀 둘 사이엔 잠깐 무거운 정적이 내려앉았다. 선생님의 얼굴에 당황스러움과 미안함이 뒤섞여 스쳤다.

"그래, 그 얘기… 이제라도 해야겠지. 그런데 여기서 다 말하긴 어렵겠다. 토요일 저녁에 도서관 세미나실에서 보자. 공책도 그때 제대로 다시 줄게."

노트 속 사정과 세 가지 약속

토요일 저녁, 세미나실엔 낡은 스탠드 조명 하나만 켜져 있었다. 선생님은 테이블에 공책을 내려놓고 그날의 이야기를 천천히 풀어놓기 시작했다.

"그 대회 끝나고 바로, 같은 반 정연이 어머니가 교장실로 찾아왔어. 네 글이 정연이 글을 베꼈다고, 상을 취소하라고 난리를 쳤지."

"교장선생님은 조용히 덮으려고 나한테 그러시더라, 그냥 상을 취소하자고. 나는 그럴 수 없었어. 네가 쓴 글이라는 걸 증명할 방법이 필요했던 거야."

소율의 눈이 흔들렸다. 그 질문이 의심이 아니라 방패였다는 말을 받아들이기엔 이십 년의 서운함이 너무 단단했다. 그래도 귀를 닫지 않고 끝까지 들었다.

"네가 그 공책 가져왔을 때, 초고와 수정한 흔적이 다 있었잖아. 그걸로 교장선생님한테 들이댔어. 네 상, 그래서 지켜진 거야."

"그러면... 그때 왜 그 말을 그렇게밖에 못 하셨어요. 애한테 그게 얼마나 상처였는지..."

선생님은 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고개를 떨궜다. 그 침묵이 오히려 미안함의 크기를 보여주는 듯했다. 한참 뒤에야 작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러게. 그땐 그 말이 널 지키는 거라고만 생각했어. 네 마음까지는 헤아리지 못했지. 미안하다, 소율아."

"공책, 집에 가서 꼭 펼쳐봐. 그 안에 네가 못 본 게 있을 거야. 그리고 수요일 행사 전날 밤에 나한테 원고 가져와, 같이 읽어보자. 발표도 네가 한 꼭지 아이들한테 읽어주고."

소율은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공책을 받아 가방에 넣으면서도 펼쳐볼 용기는 쉽사리 나지 않았다. 그래도 수요일 약속만은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폭우 치던 수요일 밤, 어긋난 약속

"소율씨, 내일 아침까지 최종본 메일로 넘겨야 해. 잊지 마."

퇴근 무렵 하늘이 갑자기 어두워지더니 장대 같은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소율은 원고 파일을 품에 안 듯 챙겨 들고 도서관으로 뛰었지만, 약속 시간보다 사십 분이나 늦어버렸다. 세미나실 문을 열었을 때 그 자리엔 아무도 없었다.

테이블 위엔 쪽지 한 장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선생님 손녀가 갑자기 열이 올라 급히 병원에 가야 했다는 내용과, 미안하다는 말, 그리고 전화번호가 적혀 있었다. 소율은 그 자리에 선 채 울컥 서러움이 밀려왔다.

"선생님, 저 기다렸는데... 또 이렇게 가버리시면 저는..."

"소율아, 미안해. 애가 너무 아파서. 내일 아침에 꼭 전화할게, 조금만 기다려줘."

전화가 끊긴 뒤 세미나실엔 빗소리만 가득했다. 소율은 그대로 의자에 주저앉아 원고 파일을 끌어안았다. 또 혼자 남겨진 기분, 스무 해 전 그날처럼 아무도 자기 말을 끝까지 들어주지 않는 기분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여백에 남겨둔 한 문장

소율은 멍하니 가방을 뒤적이다 그 낡은 공책을 꺼냈다. 처음으로, 정말 처음으로 표지를 열었다. 바스락 소리를 내며 넘어가는 낡은 종이 사이로 열한 살 자신의 삐뚤빼뚤한 글씨가 쏟아져 나왔다.

동화 초고 여기저기엔 빨간 펜으로 고쳐 쓴 흔적이 가득했다. 그런데 마지막 장을 넘기는 순간, 소율의 손끝이 뚝 멈췄다. 맨 뒷장 여백에 선생님의 작은 글씨가 남아 있었다.

소율아, 네 이야기는 네가 끝까지 지켜야 해. 선생님이 못 해준 몫까지, 언젠가 네가 다 써주렴.

그 한 줄을 읽는 순간 눈앞이 뜨겁게 번졌다. 이십 년 동안 가슴에 얹혀 있던 돌덩이 하나가 스르르 녹아내리는 기분이었다. 선생님은 그날 이후로도 줄곧 소율의 이야기를 지켜주고 있었던 거였다, 전학 간 아이가 다시 나타나기를 기다리며.

빗소리는 여전했지만 이제 그 소리가 무섭지 않았다. 소율은 노트북을 펼치고 멈춰 있던 원고의 마지막 장면부터 다시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손가락이 자판 위에서 따닥따닥 움직일 때마다 가슴 속에서 뭔가가 울컥, 울컥 올라왔다.

새벽 네 시, 창밖이 희끗희끗 밝아올 무렵 마지막 문장을 썼다. 기지개를 켜다가 팔꿈치로 머그잔을 쳐 커피가 책상 끝까지 주르륵 흘렀지만, 그 순간조차 웃음이 먼저 터져 나왔다. 허둥지둥 휴지로 닦으면서도 입꼬리는 좀처럼 내려오지 않았다.

도서관 창가에서, 다시 쓴 첫 문장

목요일 아침, 소율은 메일 전송 버튼을 누르고서야 긴 숨을 토해냈다. 영우에게 최종 원고를 넘긴 뒤 곧장 도서관으로 향했다. 로비에는 선생님이 먼저 와 창가 자리에 앉아 있었는데, 손녀 이야기를 하며 연신 미안하다고 했다.

"밤새 한숨도 못 잤지? 어제 못 가서 정말 미안해."

"아니에요, 선생님. 저 혼자서도 끝까지 썼어요. 이거 보세요."

소율이 가방에서 낡은 공책과 새로 뽑은 원고를 나란히 꺼내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선생님의 눈이 공책 뒷장에서 멈추는 걸 보며 소율은 조용히 웃었다. 그 여백의 메모를 이제는 둘 다 알고 있었다.

"선생님 덕분에 지켰어요. 이제는 제가 끝까지 써볼게요."

행사가 시작되자 아이들이 반원으로 둘러앉았고, 선생님은 소율을 무대 옆으로 슬쩍 이끌었다. 떨리는 손으로 더미북 한 꼭지를 펼친 소율은 처음으로, 자기 글을 자기 목소리로 아이들 앞에서 읽었다.

지호가 손을 번쩍 들고 큰 소리로 외쳤다. "이야기 작가님, 다음 이야기도 들려주세요!" 아이들 웃음소리가 와르르 터졌고, 소율의 눈가도 따뜻하게 물들었다.

행사가 끝난 뒤 소율은 선생님께 다가가 품에서 작은 그림책 한 권을 꺼내 조심스레 내밀었다. 표지엔 이십 년 전 그 공책 속 주인공이 다시 살아나 있었다. 선생님은 두 손으로 그 책을 받아 들고는 아이처럼 활짝 웃으며 천천히 첫 장을 넘겼다.

이 이야기 속 마음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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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증적 기억 왜곡

소율은 선생님의 질문 한마디만 20년 동안 '의심'으로 기억했어요.
실제로는 자신을 지키기 위한 질문이었는데, 상처받은 그 순간의 감정이 너무 커서 그 이후의 기억을 전부 그 틀 안에서만 해석하게 된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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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피형 자기방어

소율이 선생님을 보자마자 도망치듯 자리를 피하고 책더미에 걸려 넘어질 뻔하는 장면은, 다시 상처받을 걸 두려워하는 사람이 무의식적으로 몸부터 피하게 되는 모습을 보여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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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책감의 지연된 표현

선생님이 20년간 공책을 버리지 않고 간직해온 것, 그리고 바로 사과하지 못하고 한참 고개를 떨구는 장면은 오랫동안 묵혀둔 미안함이 쌓이면 말보다 행동으로 먼저 드러난다는 걸 보여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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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해 재발의 트리거

폭우 치던 밤 약속이 어긋나자 소율이 곧바로 '또 혼자 남겨졌다'는 20년 전 감정을 다시 떠올리는 건, 과거의 상처와 비슷한 상황이 생기면 그 감정이 그대로 되살아나는 심리를 잘 보여줘요.

🧠

자기효능감의 회복

선생님 없이도 밤새 혼자 원고를 완성해낸 경험이 소율에게 '나는 할 수 있다'는 감각을 되살려줬고, 이게 다음 날 아이들 앞에서 직접 책을 읽어주는 용기로 이어졌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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