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년 만에 만난 군대 동기, 내 졸업식을 지켜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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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년 만에 만난 군대 동기, 내 졸업식을 지켜주다

경비실 야간 순찰, 7년 미뤄온 졸업식

쿵, 철문이 닫히는 소리에 강태윤은 흠칫 어깨를 움츠렸다. 새벽 세 시, 열한 해째 지키고 있는 아파트 경비실에서 나와 야간 순찰을 돌던 그의 손전등 불빛이 주차장 바닥을 천천히 훑고 지나갔다. 올해로 쉰셋, 틈틈이 다닌 사이버대학 사회복지학과도 어느새 7년 만에 졸업을 앞두고 있었는데, 졸업식 날짜가 적힌 문자 한 통이 휴대폰 화면에 떠 있었지만 그는 선뜻 그것을 열어보지 못하고 한참을 들여다보기만 했다. 가을바람이 목덜미를 스칠 때마다 괜히 가슴 한쪽이 서늘해지는 밤이었다.

상업고등학교 2학년 봄, 공사장에서 아버지가 쓰러졌다는 전화를 받은 뒤로 태윤은 그대로 책가방을 내려놓고 생활비를 벌러 나섰다. 그날의 선택이 평생의 그림자가 되어 공부 못한 사람이라는 말이 꼬리표처럼 따라붙었고, 이혼한 뒤로는 하나뿐인 딸 하윤과도 해가 갈수록 점점 멀어졌다. 여섯 살 하윤이 불이 난 집에서 낯모르는 소방관 품에 안겨 나오던 그날, 공장 라인을 떠날 수 없어 전화기 너머로 딸의 울음소리만 듣고도 아무것도 하지 못했던 자신을 지금도 떠올리면 가슴이 철렁했다. 졸업식에 딸이 와주기만 하면 아빠도 뭔가 해냈다는 걸 보여줄 수 있을 것 같아서, 그 바람 하나로 꼬박 7년을 버텨왔다.

축사 지명 받던 날, 딸에게 돌아온 거절

다음 날 오후, 학과 사무실에서 걸려온 전화를 받은 태윤은 수화기를 든 손이 후들후들 떨렸다. 이번 학기 졸업생 삼백스물 명 중 최고령이니 전체 대표로 축사를 맡아달라는 요청이었는데, 수락하면 수백 명 앞에서 자신의 자퇴와 부끄러움까지 꺼내놓아야 할지 몰랐고 거절하면 7년 내내 과제를 봐주고 격려해준 지도교수의 얼굴을 볼 면목이 없었다. 수화기를 내려놓고도 한참을 멍하니 앉아 있던 그는, 결국 알겠다고 대답하며 전화를 끊었지만 속으로는 이미 후회가 밀려오고 있었다.

“딸, 아빠 이번에 졸업한다. 축사도 하게 됐어. 올 수 있냐?”

“아빠는… 내 고등학교 졸업식엔 안 왔잖아. 그날 나 혼자 사진 찍었어. 늘 사정이지, 아빠는. 끊어.”

뚝 끊어진 전화기를 한참 내려다보던 태윤은 괜히 목이 메었다. 그날 일은 사실이었다. 공장 라인이 멈춰 서면 밀린 주문을 다 놓친다고 사정하던 반장의 얼굴이 아직도 눈에 선했지만, 피할 수 없던 사정이었다 해도

그 말이 지금 와서 변명처럼 들릴 거라는 걸 그도 잘 알고 있었다

. 전화를 다시 걸어 사과하고 싶었지만, 이번에도 또 말로만 그치고 말 것 같아 선뜻 버튼을 누르지 못했다.

낡은 수첩 속 전화번호, 문구점 문을 열다

그날 밤, 창고를 정리하다가 낡은 종이상자 속에서 손바닥만 한 군대 수첩이 툭 떨어졌다. 색이 바래 누렇게 변한 겉장을 넘기자 삐뚤빼뚤한 글씨로 적힌 전화번호 하나가 눈에 들어왔는데, 윤성배, 1998년 겨울 훈련소에서 함께 뒹굴던 동기의 이름이었다. 글씨가 서툴러 집에 편지 한 장 못 쓰던 성배를 대신해 태윤이 몇 번이나 펜을 들어줬던 기억이 부스럭부스럭 되살아났다. 그때 성배가 눈물 뚝뚝 흘리며 하던 말, 네가 쓴 거 우리 엄마가 읽고 또 읽었다고, 너는 글 잘 쓰는 놈이라던 그 한마디가 수첩 귀퉁이에서 되살아나자 괜히 코끝이 시큰했다.

수소문 끝에 성배가 아파트 단지에서 버스로 두 정거장 떨어진 동네 어귀에서 작은 문구점을 꾸리고 있다는 걸 알아냈고, 소방공무원으로 스물다섯 해를 일하다 몇 해 전 퇴직했다는 얘기도 함께 들려왔다. 다음 날 퇴근길, 태윤은 가게 앞을 세 번이나 서성이다 반쯤 망설이며 문을 열고 들어섰다. 그러다 태윤이 축사 얘기와 하윤과의 다툼을 하나씩 풀어놓다가 하윤이 어릴 적 살던 동네와 그 집에 불이 났던 이야기까지 꺼내자, 성배의 얼굴이 순간 묘하게 굳으며 들고 있던 종이컵을 테이블 위에 조금 세게 내려놓았지만 왜 그러냐고 묻자 대수롭지 않다는 듯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태윤은 그 손끝이 평소와 조금 달랐다는 걸 끝내 눈치채지 못했다.

“어이, 아저씨. 머리가 그게 뭐야, 나보다 더 허옇네.”

“야 강태윤, 너는 배가 아주 북처럼 나왔다, 인마!”

성배가 내놓은 세 가지 계획

“축사, 어렵게 쓰지 말고 네 얘기 그대로 써봐. 자퇴한 거, 부끄러워했던 거, 그거부터.”

“그런 걸 사람들 앞에서 어떻게… 쪽팔려서 안 돼. 그리고 하윤이는, 내가 가서 얘기 좀 해볼까?”

“아니야, 됐어. 네가 나설 일 아니다, 성배야. 내 딸 일이야.”

성배는 어깨를 한 번 으쓱하고는 더 말을 보태지 않았다. 다만 가게 서랍을 열어 낡은 종이 한 장을 꺼내더니 가만히 태윤 앞에 밀어 놓았는데, 그건 바로 27년 전 태윤이 성배를 대신해 써줬던 그 편지였다. 접힌 자국이 닳고 닳아 네 귀퉁이가 거의 떨어질 지경이었는데도 성배는 누렇게 변한 그 종이를 서랍 맨 안쪽에 고이 간직하고 있었다. 먹먹한 마음에 태윤의 눈이 뜨거워졌고, 성배는 괜히 딴청을 부리며 코를 훌쩍였다.

“이게 네가 잘하는 거야. 이대로만 써.”

밤새 쓴 편지, 하지만 돌아온 건 침묵

그날 밤 태윤은 꼴딱 밤을 새워 축사 원고를 고쳐 썼다. 자퇴하던 날의 부끄러움과 하윤에게 못해준 미안함을 꾸밈없이 적어 내려가다 몇 번이나 울컥 목이 메어 펜을 놓았고, 새벽 네 시가 넘도록 원고지 열두 장을 세 번이나 다시 썼다. 다음 날 아침에는 하윤에게 보낼 짧은 편지도 써서 우체통에 넣었는데, 연습을 해볼 때마다 자퇴 얘기를 꺼내는 대목에서 매번 목이 턱 막혀 더는 말을 잇지 못했다. 졸업식까지 꼬박 일주일이 지나도록 하윤에게서는 답장도 전화도 끝내 오지 않았고, 그 침묵이 길어질수록 태윤의 마음속 자신감도 조금씩 바닥을 드러냈다.

“나 안 할란다, 축사. 하윤이한테서도 답이 없어. 다 그만두고 싶어.”

“야, 강태윤. 너 그때 내 편지 써주면서 한 번도 그만둔 적 없었잖아. 손편지 보낸 건 하윤이가 아니라 너한테 보낸 거야. 네가 아직도 쓸 줄 안다는 거, 그거 하나면 돼. 내일 와. 내가 맨 앞에 앉아 있을 테니까.”

연단 위에서 터진 27년의 진실

졸업식 날 아침, 식장에 들어선 태윤의 손바닥은 땀으로 축축했다. 삼백 석이 넘는 객석이 사람들로 가득 찼고, 사회자가 그의 이름을 부르자 심장이 쿵쿵 뛰었으며 연단에 오르는 몇 걸음이 유난히 길게 느껴졌다. 마이크 앞에 서서 원고를 펼쳤지만, 첫 줄을 읽다가 목소리가 뚝 끊겼다.

“저는… 상업고등학교 2학년 때, 학교를 그만뒀습니다.”

말을 잇지 못하고 서 있던 그때, 맨 앞줄에서 성배가 작게 고개를 끄덕이는 게 보였다. 그 작은 몸짓에 태윤은 숨을 한 번 깊게 들이쉬고 다시 입을 열었다.

“제가 쉰셋인데 글씨 쓰는 손이 지금도 애들만큼 떨립니다. 그런데 오늘은 좀 떨려도 되는 날 같아서, 그냥 해보겠습니다.”

식장 여기저기서 가벼운 웃음이 피식 터졌다. 태윤은 원고를 접어 내려놓고 자신의 이야기를 이어갔다. 공부를 포기했던 날의 부끄러움과, 딸에게 좋은 아빠가 되지 못했던 미안함을 하나씩 풀어놓다가 말을 마치고 고개를 들었을 때, 그는 맨 뒷줄 구석에 조용히 앉아 있는 하윤을 발견하고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식이 끝나자마자 서둘러 다가간 그에게, 하윤이 먼저 입을 열었다.

“성배 아저씨가 찾아오셨어. 아빠 얘기 하시면서, 그날 얘기도 하시더라. 내가 여섯 살 때 불났던 날, 그때 나 구해준 소방관이 성배 아저씨였대. 아빠는 모르지?”

태윤은 그 자리에 선 채로 숨이 턱 막혔다.

27년 동안 한 번도 들은 적 없는 얘기였다

. 그는 두리번거리다 멀찍이 서서 웃고 있는 성배를 발견하고 성큼성큼 걸어가 왜 그 얘기를 한 번도 안 했냐고 물었다.

“네가 부담스러워할까봐. 괜히 내가 생색내는 것 같기도 하고.”

식이 끝난 뒤 세 사람은 식장 앞 벤치에 나란히 앉았다. 하윤은 아빠가 쓴 축사 원고를 다시 읽어보겠다며 손에 쥐고 있었고, 성배는 괜히 딴청을 부리며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가을볕이 따스하게 세 사람의 어깨 위로 내려앉는 사이, 태윤은 말없이 웃으며 목에 걸고 있던 졸업장 리본을 벗어 하윤의 목에 걸어주었다. 하윤이 어이없다는 듯 피식 웃으며 리본을 다시 바로잡아 걸어주고는 꽃다발이 촌스럽다고 흉을 보자, 태윤은 그 손길을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천천히 딸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이 이야기 속 마음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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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낙인 효과

태윤이 상고 자퇴 경력을 '공부 못한 사람'이라는 꼬리표로 스스로 규정하며 수십 년간 수치심을 안고 산 것은, 한 번의 사건을 자기 정체성 전체로 확대해 받아들이는 자기 낙인화의 전형적인 모습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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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피형 자기방어

축사를 수락할지 거절할지 고민하던 태윤이 둘 다 두려워한 것은, 성공도 실패도 아닌 상태를 유지하려는 회피 심리로, 선택 자체를 미루며 불안을 줄이려는 반응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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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운함의 누적과 투사

하윤이 아빠의 축사 요청에 고등학교 졸업식 불참을 꺼낸 건, 해결되지 않은 과거의 서운함이 현재의 다른 사건에 투사되어 터져 나온 장면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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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상적 침묵

성배가 자신이 화재 당시 하윤을 구조한 소방관이었다는 사실을 오래 숨긴 것은, 상대가 부담이나 빚진 감정을 느낄까 봐 스스로 공을 드러내지 않는 보상적 침묵의 모습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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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체화된 수행 불안

태윤이 연단에서 첫 문장을 말하다 목소리가 막힌 것은, 오래 억눌러온 수치심이 실제 발표 상황에서 신체 반응(목멤, 손떨림)으로 터져 나오는 수행 불안의 전형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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