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만에 찾아간 요양병원, 할머니가 날 못 알아봤다

오디션 전날 밤, 걸려온 전화
서울 변두리, 열 평도 채 안 되는 지하 연습실에서 정진은 밤 열한 시가 넘도록 첼로를 내려놓지 못했다. 내일 오후면 시립교향악단 수석 오디션이었고, 삼 년을 기다려온 자리였기에 활을 쥔 손끝이 자꾸만 땀으로 축축하게 젖어왔다. 좁은 방 안에는 악보 뭉치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고, 창문 하나 없는 벽을 타고 울리는 첼로 소리만이 자정을 향해 가는 시간을 대신 알려주고 있었다. 어릴 때 그를 키운 건 부모가 아니라 시골 할머니였고, 할머니는 밤마다 머리를 쓰다듬으며 낮은 목소리로 자장가를 불러주곤 했다.
그 노래를 들으며 새근새근 잠들던 밤들이 분명 있었는데, 지금은 할머니와 10년째 제대로 말 한 번 섞어본 적이 없다는 생각이 문득 가슴을 쿡 찔렀다. 활을 내려놓고 잠시 눈을 감았다가 다시 눈을 뜨는 순간, 테이블 위에 놓아둔 휴대폰이 부르르 울렸다. 액정에는 고향 이웃 미란 이모의 이름이 떠 있었는데, 그 이름을 보는 순간 왠지 가슴이 서늘해져서 벨소리가 세 번쯤 울릴 때까지 전화를 받지 못했다.
정진아, 큰일 났어. 할머니가 갑자기 많이 안 좋아지셨대.
의사가 며칠 못 가실 수도 있다고 하더라. 폐에 물이 찼다고, 숨 쉬는 것도 힘들어하신다고. 내려와 봐야 할 것 같아서 전화했어.

10년 전 그 사고, 되돌릴 수 없던 선택
정진은 숨이 턱 막혀서 아무 대답도 못 하고 한참을 가만히 서 있었다. 전화를 끊고 나서도 손이 부들부들 떨렸고, 쥐고 있던 활이 철퍼덕 바닥으로 떨어지는 소리조차 한참 뒤에야 들렸다. 고등학교 3학년 겨울, 할머니 몰래 마당에서 트럭 운전을 연습하다 브레이크를 놓쳐 담장 옆에 서 있던 할머니를 치고 말았던 그날이 눈앞에 선명하게 떠올랐고, 다행히 크게 다치진 않았지만 그 뒤로 할머니는 왼쪽 다리를 절게 되었다. 정진은 그 죄책감을 견디지 못해 졸업과 동시에 도시로 도망치듯 떠나버렸고, 전화를 걸 때마다 들려오는 할머니의 괜찮다는 말이 오히려 가슴을 쿡쿡 찔러서 어느 순간부터는 전화마저 피하게 되었다. 명절에도 공연 연습을 핑계로 내려가지 않았고, 할머니 생일엔 선물만 택배로 부쳤으니, 그렇게 조용히 10년이라는 시간이 쌓여간 것이었다.
교수님, 저... 할머니가 위독하신데요. 잠깐 내려가 봐야 할 것 같아요.
지금 빠지면 다음 기회는 기약 없어. 신중하게 생각해, 정진아. 네 실력을 보여줄 자리가 또 쉽게 온다는 보장은 없잖아.

병실 문 앞에서 만난 음악치료사
교수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기에 정진은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지만, 수화기를 내려놓는 순간 오디션을 놓치는 것과 할머니를 마지막으로 보지 못하는 것 중 어느 쪽이 평생 더 아프게 남을지는 더 고민할 필요가 없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다음 날 새벽 첫 기차표를 끊었고, 세 시간 사십 분을 창밖만 바라보다 자정이 가까운 시각 요양병원에 도착했는데, 콘서트홀에 가려고 챙겨둔 단정한 셔츠와 구두 차림이 어두운 로비에서 유난히 겉돌았다. 밤새 당직을 서던 간호사가 그런 그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장난스레 눈을 찡긋하고는 병실 쪽을 가리켰고, 정진은 심호흡을 한 번 하고 서둘러 병실 문을 열었다. 침대에 누워 있던 할머니가 그를 보자마자 눈을 크게 뜨며 몸을 움찔 뒤로 뺐는데, 10년의 세월과 치매라는 병이 겹쳐 할머니 눈에는 눈앞에 선 남자가 전혀 낯선 사람으로만 보이는 모양이었다.
누, 누구요! 저리 가, 저리 가요!
몇 번이나 저예요, 정진이에요 되뇌어도 할머니는 더 겁먹은 얼굴로 베개를 끌어안을 뿐이었다. 정진은 뒷걸음질 치다 복도 벽에 쿵 하고 등을 기댄 채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10년을 각오하고 내려왔는데 돌아온 건 비명 같은 거절뿐이었으니, 가슴이 먹먹해서 숨조차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고 복도 형광등 불빛만 유난히 하얗고 서늘하게 느껴졌다. 그때 작은 기타 케이스를 멘 젊은 여자가 복도를 지나다 걸음을 멈추고, 아무 말 없이 조심스레 그의 옆에 쭈그려 앉았다.
괜찮아요. 처음 오신 가족분들은 다 그래요. 저는 윤이든이에요, 이 병동 음악치료사예요.

틀린 음, 그리고 비명으로 끝난 첫 연주
첼로 하신다면서요, 할머니한테 들었어요. 입원하시기 전에 손자가 첼로를 켠다고 동네방네 자랑하셨대요. 익숙한 곡을 들려드리면 가끔 반응하실 때가 있거든요.
그 말을 듣는 순간 정진의 가슴이 울컥했다.
할머니가 자신을 원망만 한 게 아니라 자랑도 했었다는 사실
이 믹서기처럼 마음을 뒤섞어놓았다. 윤이든은 복도 바닥에 함께 앉은 채로 두 가지를 제안했는데, 하나는 할머니가 평소 좋아하던 곡을 짧게 여러 번 들려줄 것, 다른 하나는 한 번에 큰 반응을 바라지 말고 조급해하지 말 것이었다.
어릴 때 할머니가 자주 불러주신 노래 같은 게 있으면 그걸 들려드려보세요. 그게 제일 빠를 거예요.
정진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속으로는 이미 오디션을 위해 몇 달을 매달린 화려한 클래식 곡을 떠올리고 있었다. 익숙한 곡이라는 말을 듣고도 그는 할머니보다는 자기 손에 가장 익은 음을 먼저 생각했던 것인데, 세련된 그 선율을 들으면 할머니도 자랑스러워할 거라는 다소 자기중심적인 기대도 섞여 있었다. 10년이라는 세월이 어릴 적 자장가의 가락을 희미하게 지워버린 뒤였으니, 그는 결국 수백 번 연습한 그 곡을 먼저 꺼내 들기로 마음먹었다.
지금이에요. 너무 늦기 전에 해보세요.
정진은 병실로 들어가 조심스레 첼로 케이스를 열고 활에 송진을 바른 뒤 자신 있게 차이콥스키의 선율을 켜기 시작했다. 하지만 활이 현을 가르는 순간 할머니는 양손으로 귀를 막으며 몸을 바들바들 떨었고, 평소 조용하던 병실에 터져 나온 묵직한 저음이 할머니에게는 음악이 아니라 알 수 없는 소음으로만 들렸던 모양이었다.
그만해! 시끄러워! 누가 또 울리는 거야!
정진은 첼로를 철퍼덕 내려놓고 복도로 뛰쳐나갔다. 가슴속에서 뭔가가 와르르 무너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10년 만에 찾아와서도 결국 할머니를 울리고야 말았다는 생각에 눈앞이 캄캄했고, 다리에 힘이 풀려 그 자리에 쪼그려 앉고 말았다.

자장가 한 소절, 10년의 벽이 무너지다
윤이든이 뒤따라 나와 그의 옆에 다시 쭈그려 앉았다. 품에서 낡은 생활기록지를 꺼내 보여주었는데, 간호사들이 날마다 적어둔 메모가 빼곡했다. 클래식 틀면 불안해하심, 옛 자장가 흥얼거리면 편안해하심이라는 문장 옆에 누군가 삐뚤빼뚤한 글씨로 은자동아 금자동아라고 적혀 있었고, 그 아래로는 할머님, 저녁마다 창밖을 보시며 흥얼거림, 아마 손자 기다리시는 듯이라는 다른 간호사의 손글씨가 이어져 있었다. 정진은 그 한 줄을 읽는 순간 숨이 턱 막혔다. 10년 동안 할머니가 자신을 원망하며 등을 돌렸을 거라고만 생각했는데,
사실은 매일 창밖을 보며 그를 기다려온 거였다
.
여기 봐요, 정진 씨. 이 노래, 혹시 아세요?
그거... 할머니가 저 어릴 때 밤마다 불러주시던 노래예요. 저를 재우려고, 품에 안고 토닥토닥 두드리면서 부르셨어요.
정진은 눈물을 쓱 닦고 다시 병실로 들어가 첼로를 잡았다. 화려한 기교는 다 내려놓고, 할머니가 불러주던 느린 가락을 한 음 한 음 더듬더듬 옮겨 켜기 시작했다. 손끝이 기억을 더듬느라 몇 번이나 엇나갔지만, 그는 멈추지 않고 처음부터 다시, 또 다시 가락을 이어갔다.
침대 위에서 몸을 떨던 할머니의 손끝이 서서히 멈추더니, 이불을 쥔 손가락이 음에 맞춰 까딱까딱 움직였고, 눈가에는 어느새 눈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병실 안의 공기가 조금 전과는 완전히 다르게 느껴졌다.
정아... 우리 정아 왔구나...
정진은 결국 첼로를 내려놓고 할머니의 마른 손을 두 손으로 꼭 감싸 잡았다. 목이 메어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고, 그저 고개만 끄덕이며 눈물을 뚝뚝 떨어뜨렸다. 10년 동안 쌓인 미안함과 혼자 짐작만 해온 원망이 그 손 안에서 조금씩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다시 울린 첼로 소리
핸드폰으로 찍어서 보내 보세요. 사정 설명하고, 지금이라도 해보는 거예요. 아직 접수 마감 전이잖아요.
정진은 허둥지둥 휴대폰을 꺼내 영상 모드를 켰다. 손이 떨려 자꾸 세로로 찍히는 바람에 윤이든이 옆에서 풋 웃음을 터뜨리며 휴대폰을 가로로 돌려 잡아주었고, 몇 번의 실수 끝에 겨우 제대로 된 영상을 찍어 교수님에게 사정을 적은 메시지와 함께 전송했는데 마감 시간을 겨우 몇 분 남기고서였다. 전송 버튼을 누른 손가락이 부들부들 떨렸고, 혹시 영상 하나로는 부족하다는 답이 올까 봐 심장이 쿵쿵 뛰었다.
혹시 이걸로 부족하다고 하면 어쩌지.
정진이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화면만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래도 할머니 손을 잡고 있는 이 순간만큼은 그 어떤 결과보다 소중하다는 걸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 사흘 뒤, 정진은 영상 심사를 거쳐 다음 단계 오디션 기회를 다시 얻었다는 소식을 받았고, 메시지를 확인하자마자 복도로 뛰어나가 미란 이모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모! 저 다음 단계 올라갔어요! 오디션 다시 볼 수 있대요!
수화기 너머로 이모의 웃음소리가 아이고 소리와 함께 터져 나왔다. 그는 다시 할머니 손을 가만히 잡고, 낮은 목소리로 어릴 적 들었던 그 가락을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할머니도 작게 입을 벌려 따라 부르며, 주름진 손으로 그의 손을 토닥토닥 두드렸다. 창밖으로는 어느새 희미하게 아침빛이 번지고 있었다.

이 이야기 속 마음 읽기
죄책감 회피
정진은 사고로 할머니를 다치게 한 죄책감을 마주하기 싫어서 전화조차 피했어요.
괜찮다는 할머니 말을 들을 때마다 오히려 더 미안해져서 연락을 끊어버린 모습이, 죄책감이 클수록 그 대상을 피하게 되는 전형적인 회피 반응을 보여줘요.
자기중심적 조언 해석
치료사가 익숙한 곡을 들려주라고 했을 때, 정진은 할머니 입장이 아니라 자신에게 가장 익숙한 연주곡을 먼저 떠올렸어요.
상대를 위한 조언도 결국 자기 경험의 틀 안에서 해석하게 되는 모습이 드러나요.
오래된 기억의 정서적 보존
치매로 최근 기억은 희미해졌지만, 어릴 적부터 반복해 들었던 자장가에는 할머니가 또렷하게 반응했어요.
오래되고 정서적으로 강하게 새겨진 기억은 다른 기억보다 더 늦게까지 남는다는 걸 보여주는 장면이에요.
일방적 원망의 오해
정진은 10년 동안 할머니가 자신을 원망할 거라고만 짐작했지만, 생활기록지에는 할머니가 매일 창밖을 보며 손자를 기다렸다는 기록이 남아 있었어요.
연락이 끊긴 채로 혼자 상상한 상대의 마음이, 실제와 전혀 다를 수 있다는 걸 보여줘요.
비언어적 정서 재연결
말 한마디 없이 손을 꼭 잡는 행동만으로 10년의 미안함이 전해졌던 장면처럼, 큰 감정은 말보다 접촉 같은 비언어적 신호로 더 깊이 전달될 때가 많아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