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의 심장 수술 전날, 10년 전 그 간호사를 다시 만났다

공사장 소장 태민, 딸의 심장소리에 멈춰선 밤
"삑, 삑, 삑—" 모니터 소리가 대기실 밖까지 새어 나왔다. 유리문 너머로 딸 하늘이의 가슴에 붙은 패드가 가늘게 흔들리는 게 보였고, 강태민은 복도 의자에서 일어났다 앉았다를 몇 번이나 반복했다. 사실 그는 병원이라는 공간을 극도로 꺼려온 사람이었다. 발목이 접질려도 파스 한 장으로 넘기고, 아내 수진이 정기검진을 받으라고 성화를 부려도 "일이 밀렸다"는 핑계로 늘 미뤄왔으니까.
그 시작은 10년 전, 아버지 강태수가 지방의 작은 병원 응급실에서 숨을 거둔 그날이었다. 형이 보호자 동의서에 서명하러 오는 게 늦어지면서 처치가 지체됐다고, 태민은 그렇게 10년을 믿어왔다. 당직을 섰던 신입 간호사의 얼굴도 10년째 지우지 못했는데, 공교롭게도 아버지가 평생 차고 다니던 손목시계만은 유품함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여보, 하늘이 괜찮대. 부정맥인데... 그래도 수술은 해야 한다나 봐."
태민은 숨을 들이켰다. 선천성 심장질환이라는 말을 들은 지 겨우 반년, 약으로 버틸 수 있다고 했는데 갑자기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 아내의 손을 꼭 잡으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속으로는 아버지의 마지막 순간이 스멀스멀 떠올라 뒷목이 서늘했다.
"아빠... 나 지금 로봇 침대에 누운 거야? 삑삑 소리가 나."
태민은 피식 웃음이 터졌다. 이 상황에도 장난기를 잃지 않는 딸 덕분에 잠시 숨통이 트였고, 그는 하늘이의 작은 손을 쓰다듬으며 "그래, 우리 공주님 타는 특별한 침대야" 하고 받아줬다. 하지만 돌아서는 순간 다시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수술을 받아야 한다는 말이 귓가에서 떠나지 않았다.

하필, 10년 전 그 병원이었다
담당 의사는 하늘이의 부정맥이 생각보다 빠르게 진행되고 있어 바로 수술 날짜를 잡아야 한다고 했다. 서울의 대형병원으로 옮기려면 최소 열흘은 대기해야 한다는 말에 태민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고, 결국 담당 교수는 "지금 이 병원, 해동병원 소아흉부외과팀이 가장 빠르게 수술을 잡을 수 있다"고 못 박았다.
해동병원. 그 이름을 듣는 순간 태민의 등줄기로 서늘한 기운이 훑고 지나갔다. 10년 전 아버지가 숨을 거둔 바로 그 병원이었고, 그는 그 후로 단 한 번도 이 건물에 발을 들인 적이 없었다. 그런데 하필 딸의 목숨이 걸린 수술을 이곳에서 받아야 한다니.
수술 동의서를 받으러 병동으로 올라간 태민은 간호사실 앞에서 걸음을 뚝 멈췄다. 명찰에 적힌 이름이 눈에 익었다. "수간호사 오은주." 10년 전 그날, 아버지 손을 놓지 않으려 안간힘 쓰던 자신을 막아섰던 그 얼굴이, 세월이 흘러 조금 둥글어진 채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혹시... 강태수 환자님 아들분 아니세요?"
"맞아요, 내가 강태수 아들입니다. 그날 형이 올 때까지 처치를 미뤘잖아요! 당신 때문에 우리 아버지가... 그런데 당신이 왜 또 여기 있는 겁니까."
은주는 입술을 깨물며 말을 잇지 못했다. 복도를 지나던 사람들이 흠칫 돌아보았고, 태민은 그제야 자신이 소리를 질렀다는 걸 깨닫고 숨을 몰아쉬었다. 하지만 사과할 마음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10년간 삭이지 못한 원망이 이렇게 터져 나올 줄은 그 자신도 몰랐다.

10년 묵은 원망 앞에 다시 선 간호사
그날 밤, 보호자 대기실에 멍하니 앉아 있던 태민에게 은주가 조심스레 다가와 종이컵에 담긴 믹스커피를 내밀었다. 태민은 거절하려 했지만, 그녀의 눈빛에 담긴 어떤 간절함 때문에 차마 손을 뻗지도, 고개를 돌리지도 못한 채 그대로 앉아 있었다.
"강 선생님, 저... 드릴 말씀이 있어요. 하늘이 수술 때문에라도 한 번은 들어주셨으면 해서요."
태민은 팔짱을 낀 채 고개도 돌리지 않았다. 그래도 은주는 포기하지 않고 간이 의자를 끌어와 그 옆에 앉았다. 두 사람 사이로 병원 특유의 알코올 냄새와 묵직한 침묵이 흘렀다.
"그날 제가 신입이었던 거, 선생님도 기억하시죠. 전 그때 최선을 다했어요. 그런데 왜 그렇게 오해하고 계신지, 꼭 한 번은 말씀드리고 싶었어요."
"지금 그 얘기 할 때가 아니잖아요. 우리 딸 수술이 먼저니까... 일단 그것부터 제대로 해주세요."
은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눈가가 살짝 붉어졌지만 금세 수간호사의 얼굴로 돌아와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이 순간부터 그녀는 태민에게 적이 아니라, 반드시 함께 넘어야 할 산을 지나갈 길잡이가 되어야 했다.

은주가 내민 두 가지 약속
"선생님, 하늘이 상태로 봐서는 큰 병원으로 옮기는 것보다 여기서 바로 수술받는 게 훨씬 안전해요. 제가 두 가지는 꼭 지킬게요. 첫째, 소아흉부외과 최 교수님께 바로 연락해서 오늘 안에 정밀검사 순서를 당겨드릴게요. 둘째, 보호자 서류 때문에 시간 끄는 일 없게 제가 직접 뛰어다니면서 처리할게요."
태민은 그 말을 들으면서도 선뜻 믿음이 가지 않았다. 10년 전에도 처치를 서두르겠다던 말이 결국 늦어졌다고 믿어온 그였으니, 이번에도 똑같은 변명으로 들릴 뿐이었다. 그래도 지금은 달리 선택할 수 있는 길이 없다는 걸 그도 알고 있었다.
"...알겠습니다. 일단 그렇게 해주세요. 대신, 조금이라도 늦어지면 저는 바로 서울로 옮길 겁니다."
은주는 그 말에 반박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곧바로 휴대폰을 들어 최 교수에게 전화를 걸었고, 그 와중에도 태민을 향해 짧게 한마디를 남겼다.
"믿지 않으셔도 돼요. 그냥 제가 하는 걸 지켜봐 주세요."

믿지 못해 돌린 구급차, 되돌아온 길
그날 늦은 밤, 태민은 몰래 예전 공사판 동료에게 전화를 걸어 서울의 큰 병원 응급 라인을 알아봐 달라고 부탁했다. 마음 한구석엔 여전히 은주를, 아니 이 병원 전체를 믿지 못하는 마음이 남아 있었던 탓이었다. 자정이 넘어 겨우 구급차 한 대를 수배했다는 연락이 왔고, 그는 곧장 아내를 깨워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여보, 지금 이 밤에? 하늘이 상태도 안 좋은데 갑자기 옮긴다고?"
"여기 못 믿어. 그 사람도 못 믿고. 서울 가면 더 큰 병원에 더 좋은 의사가 있을 거야."
하지만 구급차는 강변북로 공사 통제 구간에서 오도 가도 못하고 꽉 막혀 버렸다. 빗길에 사고까지 겹쳐 도로는 주차장이나 다름없었고, 그 사이 하늘이의 모니터에서 다시 삑삑거리는 경고음이 울렸다. 식은땀이 태민의 등을 타고 주르륵 흘러내렸다.
결국 그는 구급차를 돌려 다시 해동병원으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도착했을 때 은주는 이미 응급 카트를 끌고 로비까지 나와 기다리고 있었고, 태민은 그 모습을 보며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고개를 숙였다. 자신의 고집이 딸을 더 위험하게 만들 수도 있었다는 사실에 손끝이 떨렸다.

낡은 수첩과 멈춰버린 손목시계
응급 처치 후 하늘이는 다행히 안정을 되찾았고, 최 교수가 다음 날 아침 바로 수술실을 비워 집도하기로 했다. 밤새 뜬눈으로 대기실을 지키던 태민은 새벽녘 복도 구석 사물함 위에서 낡은 수첩 하나를 발견했다. 표지에는 손글씨로 "2016년 응급실 근무일지"라고 적혀 있었고, 그는 떨리는 손으로 그 수첩을 펼쳤다.
거기엔 10년 전 그날의 기록이 또렷하게 남아 있었다. '강태수 님, 보호자 서명 지연—장남 전화 연결 불가, 차남 도착까지 대기.' 순간 태민의 머릿속이 하얘졌다. 그날 지연된 건 은주가 꾀를 부려서가 아니라, 당시 장남이던 형이 전화를 받지 않아 동의서 서명이 늦어진 거였다.
수첩 다음 장에는 더 떨리는 글씨가 이어졌다. '
환자분이 마지막에 둘째 아들 손 한 번만 잡게 해달라고 하셨다. 아들이 도착하지 못해, 대신 내가 손을 잡아드렸다. 평온하게 가셨다.
' 태민은 그 문장을 읽는 순간 울컥 숨이 막혀왔고, 10년간 묻어뒀던 죄책감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아, 그거... 보시면 안 되는데."
"그때... 우리 아버지 손, 당신이 잡아줬어요?"
은주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가방에서 작은 비닐팩을 꺼냈다. 그 안에는 멈춰버린 낡은 손목시계 하나가 들어 있었다.
"아버님이 차고 계시던 시계예요. 그날 너무 급해서 벗겨놓았었는데 돌려드릴 틈이 없었어요. 그날 선생님이 저한테 그러셨잖아요, 언젠가 제대로 설명할 날 있을 거라고. 그 말, 한순간도 잊은 적 없어요."
은주는 10년 가까이 그 시계를 수선해 서랍 속에 보관해왔다고 했다. 언젠가 돌려줄 날이 올 거라 믿으며, 근무지를 옮기면서도 늘 챙겨 다녔다는 것이다. 태민은 그 시계를 받아 든 순간 손끝이 저려왔고, 눈앞이 뜨겁게 번져왔다.

멈춰 있던 시계가 다시 걸음을 뗀 아침
수술은 아침 일찍 시작되어 꽉 찬 네 시간 만에 끝났다. 수술실 문이 열리고 최 교수가 "성공적으로 잘 끝났습니다"라고 말하는 순간, 태민은 다리에 힘이 풀려 그 자리에 철퍼덕 주저앉고 말았다.
"여보, 하늘이 괜찮대. 진짜 괜찮대."
회복실로 옮겨진 하늘이는 마취가 덜 풀린 채로도 눈을 뜨고 "아빠..." 하며 작은 손을 뻗었다. 태민은 그 손을 꼭 쥐며 눈물을 쏟았고, 10년 전 아버지의 손을 놓쳤던 순간이 비로소 조금은 가벼워지는 걸 느꼈다.
며칠 뒤 퇴원하는 날, 태민은 병동 앞에서 은주를 기다렸다. 손에는 작은 상자가 있었는데, 공사판에서 쓰는 튼튼한 작업용 손목시계였다. 멈춰 있던 아버지의 시계 대신, 이번엔 제대로 잘 가는 새 시계를 그녀에게 건넸다.
"이건... 저 대신 시간 맞춰서 잘 가라고요. 그동안 늦게 알아봐서, 미안했습니다."
"이거 너무 과분한데요? 그래도... 고맙습니다, 선생님."
태민은 아버지의 낡은 시계를 손목에 찼다. 바늘은 여전히 멈춰 있었지만,
이제 그 시계는 원망이 아니라 그리움의 증표가 되어 있었다
. 그는 하늘이의 손을 잡고 병원 로비를 천천히 걸어 나가며 뒤돌아 은주에게 짧게 고개를 숙였고, 은주도 활짝 웃으며 손을 흔들어 보였다. 가을 햇살이 두 사람 사이로 환하게 쏟아지고 있었다.

이 이야기 속 마음 읽기
책임 전가(희생양 삼기)
실제로는 형의 늦은 연락 때문에 생긴 처치 지연을 태민은 10년 동안 당시 신입이었던 은주 한 사람에게만 분노를 쏟아냈어요.
눈앞에서 가장 또렷하게 기억나는 대상에게 책임을 몰아주는 모습이에요.
기억의 왜곡과 선택적 회상
극심한 슬픔 속에서 형의 실수는 흐릿해지고, 간호사의 얼굴과 '처치가 늦었다'는 사실만 또렷하게 남아 비난의 중심이 되어버렸어요.
수첩을 읽기 전까지 태민은 자기 기억을 사실이라 믿고 있었죠.
회피 행동
태민이 10년 동안 병원을 아예 피하고 자신의 건강검진마저 미뤄온 모습은, 고통스러운 기억이 있는 장소·대상을 멀리함으로써 상처를 덮어두려는 전형적인 회피예요.
과거 상처의 현재 투사
은주의 구체적인 계획을 받고도 몰래 서울 구급차를 수배한 장면이 그래요.
과거에 느낀 불신을 지금 상황에도 똑같이 덧씌워, 눈앞의 다른 가능성을 보지 못하게 만든 거예요.
부채감에서 비롯된 보상 행동
은주가 10년 가까이 멈춘 시계를 고쳐 보관하고 '언젠가 설명하겠다'던 약속을 지키려 한 건, 자신이 다 전하지 못한 책임을 스스로 끌어안고 보상하려 한 마음이 쌓인 결과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