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2년 차, 지혜는 남편 민준과의 가정을 소중히 여기며 살아가고 있었다.
그녀에게 결혼은 단순히 두 사람의 결합이 아니라, 새로운 가족 공동체를 만들고 함께 성장해나가는 의미 깊은 여정이었다. 민준 역시 그런 지혜의 가치관을 존중하고 사랑했지만, 그의 어머니 박 여사와의 관계는 늘 조심스러운 숙제처럼 남아 있었다.
토요일 저녁, 지혜와 민준은 시댁을 찾았다. 현관문을 열자마자 박 여사는 아들 민준에게 달려가 팔과 등을 두드리며 반겼다.
"아이고, 내 아들! 얼굴이 반쪽이 됐네. 지혜야, 우리 민준이 밥은 잘 챙겨 먹이니?"
지혜는 애써 미소를 지으며 준비해 간 과일 바구니를 내밀었다.
"어머니, 저녁 준비하시는 데 보태시라고 좀 사 왔어요."
"어머, 뭘 이런 걸. 너희 먹을 것도 없을 텐데."
박 여사는 과일 바구니를 건성으로 받아 식탁 위에 두었다. 그녀의 눈길은 오로지 민준에게 향해 있었다.
"민준아, 얼른 와서 앉아. 네가 좋아하는 갈비찜 잔뜩 해놨다."
저녁 식탁은 산해진미로 가득했지만, 분위기는 어딘가 불편했다. 박 여사는 식사 내내 민준의 어린 시절 이야기, 민준의 건강 걱정, 민준의 회사 이야기만 늘어놓았다. 마치 지혜는 투명 인간이라도 된 듯했다.
"어머니, 저희 이번 여름휴가 때 제주도 다녀왔는데, 여기 정말 좋더라고요. 나중에 어머니도 모시고 같이 가면…"
지혜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지만, 박 여사는 금세 말을 잘랐다.
"제주도? 우리 민준이 어릴 때 거기 수학여행 갔다가 길 잃어서 얼마나 울었는지 아니? 그때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철렁한다. 넌 어쩜 그렇게 겁이 많았니?"
박 여사는 지혜가 아닌 민준을 보며 웃었다. 민준은 멋쩍은 듯 헛기침을 했다.
지혜는 숟가락을 내려놓고 싶은 충동을 억눌렀다. 그녀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결혼'과 '가족'이라는 가치는 이 식탁 위에서 길을 잃은 듯했다. 박 여사에게 '가족'이란 오직 아들 민준뿐인 것 같았다.
며느리는 그저 아들의 식사를 챙기고 건강을 돌보는 보조적인 존재, 혹은 아들과 자신 사이의 연결고리일 뿐, 독립적인 인격체나 새로운 가족의 구성원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느낌이었다.
"참, 지혜야. 너희 아직 애 생각은 없는 거니? 우리 민준이 닮은 예쁜 손주 빨리 보고 싶은데. 민준이도 이제 나이가 있는데…"
박 여사의 관심사가 마침내 지혜에게 향했지만, 그것 역시 '민준의 대를 이을 손주'라는, 아들 중심적 사고의 연장선이었다.
지혜는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어머니, 그건 저희가 상의해서 결정할 문제인 것 같아요. 저희 둘 다 아직은 서로에게 좀 더 집중하고, 저희 가정을 단단하게 만드는 게 우선이라고 생각해요."
그녀는 '저희'라는 단어에 힘을 주어 말했다. 결혼은 민준과 자신이 함께 만들어가는 것이라는 점을, 그리고 그 결정의 주체는 두 사람이라는 점을 분명히 하고 싶었다.
박 여사의 표정이 순간 굳어졌다.
"네 가정? 여기가 네 가정이지, 뭐가 또 네 가정이야? 우리 민준이가 네 남편인데, 당연히 이 집안사람이지."
"어머니, 제 말씀은…"
지혜가 설명을 덧붙이려 했지만, 민준이 나섰다.
"엄마, 지혜 말은 우리 둘이서 잘 계획하고 있다는 뜻이에요. 너무 걱정 마세요."
민준은 어색하게 웃으며 상황을 무마하려 했다.
그날 밤,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지혜는 창밖을 보며 조용히 말했다.
"민준 씨, 나는 당신과의 결혼 생활, 우리 둘이 만든 가정이 정말 소중해요. 그런데 어머님은 아직… 우리를 하나의 독립된 가정으로 보지 않으시는 것 같아요. 언제나 모든 게 당신 중심으로만 돌아가니까… 가끔은 내가 당신 옆에 있는 사람이라는 걸 잊으시는 것 같아 속상해요."
민준은 아내의 손을 꼭 잡았다.
"미안해, 지혜야. 엄마가 아직 예전 생각을 다 버리지 못하셔서 그래. 내가 중간에서 더 노력할게. 당신 마음 상하지 않게."
지혜는 남편의 따뜻한 손길에 작은 위안을 얻었지만, 마음 한구석의 씁쓸함은 쉽게 가시지 않았다. 그녀는 결혼과 가족의 가치를 굳건히 지키며 살아가고 싶었다. 하지만 시어머니의 변하지 않는 자식 중심적 사고는 앞으로도 계속 넘어야 할 큰 산처럼 느껴졌다. 그 경계선 위에서, 지혜는 자신의 가정을 지키기 위해 때로는 단호해져야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상담심리학적 분석
이 소설은 **가족 시스템 이론(Family Systems Theory)**과 분화(Differentiation of Self) 개념, 그리고 세대 간 갈등의 관점에서 분석할 수 있습니다.
- 가족 시스템 이론 관점:
- 삼각관계(Triangulation): 민준은 아내 지혜와 어머니 박 여사 사이에서 삼각관계를 형성하는 중심인물입니다. 어머니의 과도한 관심과 아내의 정서적 요구 사이에서 균형을 잡으려 하지만, 이는 종종 갈등을 완화하기보다는 문제를 회피하거나 일시적으로 봉합하는 결과를 낳습니다.
- 경계(Boundaries): 지혜는 자신과 민준으로 이루어진 '핵가족'과 시어머니(확대가족) 사이에 건강한 경계를 설정하려고 노력합니다.("저희 가정을 단단하게 만드는 게 우선…") 반면, 박 여사는 아들 부부의 경계를 침범하며('네 가정? 여기가 네 가정이지…'), 모자 관계의 경계가 불분명하고 지나치게 밀착된(enmeshed) 모습을 보입니다. 이는 아들 부부의 독립성을 저해하고 갈등을 유발합니다.
- 가족 규칙(Family Rules): 박 여사의 집에는 '아들(민준)이 가장 중요하다', '며느리는 아들을 보조하는 역할이다'라는 암묵적인 규칙이 존재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지혜는 이러한 규칙에 도전하며 '부부는 동등한 파트너이며, 새로운 가정의 중심이다'라는 새로운 규칙을 세우려 합니다.
- 분화(Differentiation of Self) 관점:
- 지혜: 비교적 높은 수준의 분화를 보여줍니다. 시어머니의 압력 속에서도 자신의 가치관(결혼과 가족의 중요성)을 인지하고 표현하며('저희'라는 단어 강조), 남편과의 관계를 중요시하고 독립적인 가정을 이루려는 의지를 보입니다. 정서적으로 시어머니에게 휘둘리지 않고 자신의 입장을 견지하려 노력합니다.
- 박 여사: 낮은 수준의 분화를 보입니다. 자신의 정체성이 아들에게 강하게 융합되어 있으며, 아들의 삶과 자신의 삶을 분리하지 못합니다. ('내 아들', 손주를 통해 자신과 아들의 연결 확인). 변화하는 가족 관계(아들의 결혼)에 적응하지 못하고 과거의 역할(아들의 주 양육자)에 머물러 있으려는 경향이 강합니다. 이는 불안감이나 정서적 공허함에서 비롯될 수 있습니다.
- 민준: 분화 수준이 중간 정도로 보입니다. 아내의 입장을 이해하고 지지하려 하지만('내가 중간에서 더 노력할게'), 어머니의 기대와 정서적 요구로부터 완전히 독립되지 못해 명확한 경계를 설정하는 데 어려움을 겪습니다. 어머니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은 마음과 아내와의 건강한 관계를 유지하고 싶은 마음 사이에서 갈등합니다.
- 세대 간 갈등:
- 이 소설은 전통적인 가부장적 가치관(아들 중심, 시어머니의 권위)과 현대적인 부부 중심 가치관 사이의 충돌을 보여줍니다. 박 여사는 과거 자신이 경험했거나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가족 모델(자식에게 헌신하는 어머니)을 고수하는 반면, 지혜는 평등하고 독립적인 부부 관계를 기반으로 한 새로운 가족 형태를 추구합니다. 이러한 가치관의 차이가 갈등의 핵심 원인입니다.
결론:
이 이야기는 건강한 가족 관계 형성을 위해 각 구성원의 '분화' 수준과 명확한 '경계 설정'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줍니다. 특히 결혼을 통해 새로운 가정이 탄생했을 때, 원가족(family of origin)과의 관계를 재정립하는 과정은 필수적입니다.
박 여사의 변화가 어렵다면, 민준이 어머니와 아내 사이에서 명확한 경계를 설정하고 아내와의 부부 관계를 우선시하는 태도를 보이는 것이 중요합니다.
지혜 역시 자신의 가치를 지키면서도 시어머니와의 관계를 관리하기 위한 지속적인 노력과 지혜로운 소통 방식이 요구될 것입니다. 필요하다면 부부 상담이나 가족 상담을 통해 전문가의 도움을 받는 것도 고려해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