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살이 부드럽게 스며드는 아침, 나무 창틀 사이로 따뜻한 빛이 방 안을 감싸고 있었다. 침대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는 할아버지는 조용히 숨을 들이마셨다. 오랜 세월을 살아온 얼굴에는 깊은 주름이 자리 잡고 있었지만, 그의 눈빛은 마치 세상을 처음 보는 아이처럼 맑고 투명했다.
"할아버지, 좋은 아침이에요!"
익숙한 목소리에 할아버지는 고개를 돌렸다. 문 앞에는 열일곱 살의 손자, 윤호가 서 있었다. 환한 미소를 짓고 있는 아이의 얼굴을 바라보며 할아버지는 한참을 머뭇거렸다.
"너는… 누구니?"
순간, 윤호의 미소가 흔들렸다. 하지만 곧 다시 환하게 웃으며 천천히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저는 윤호예요. 할아버지의 손자예요. 오늘 하루, 저랑 특별한 시간을 보내보실래요?"
할아버지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윤호의 손을 잡았다. 따뜻한 온기가 손끝에서 전해졌다. 낯설지만 어딘가 익숙한 느낌이었다.
윤호는 할아버지를 부축하며 천천히 밖으로 나섰다. 정원에는 한때 할아버지가 손수 가꾸던 꽃들이 가득 피어 있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꽃잎이 살랑이며 춤을 추듯 흔들렸다.
"이 꽃들, 할아버지가 좋아하시던 거예요."
윤호가 말했다.
"할머니랑 같이 키우셨다고 했어요. 기억나세요?"
할아버지는 가만히 꽃들을 바라보았다. 어렴풋이, 아주 희미하게 어디선가 본 것 같은 장면들이 머릿속을 스쳤다. 하지만 그것이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아름답구나."
할아버지는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윤호는 할아버지의 손을 꼭 잡고 정원을 천천히 거닐었다. 그리고 두 사람이 향한 곳은 집 앞의 작은 연못이었다. 연못 위에는 나뭇잎이 둥둥 떠 있었고, 그 사이로 작은 물고기들이 헤엄치고 있었다.
"할아버지, 여기 기억하세요? 예전에 저한테 낚시를 가르쳐 주셨잖아요."
할아버지는 다시 한 번 기억을 더듬었지만, 선명한 장면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럼에도 윤호의 말 속에는 사랑과 애정이 가득 담겨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따뜻한 기분이 들었다.
윤호는 가방에서 작은 낚싯대를 꺼내며 활짝 웃었다.
"오늘은 제가 할아버지께 가르쳐 드릴게요. 같이 해봐요."
할아버지는 조심스럽게 낚싯대를 잡았다. 줄을 던지는 방법을 배우는 동안, 두 사람의 얼굴에는 자연스럽게 미소가 번졌다. 손끝에 작은 진동이 느껴지자, 할아버지는 아이처럼 놀란 표정을 지었다.
"물고기가 잡힌 걸까?"
"네! 천천히 감아 보세요."
할아버지는 조심스럽게 릴을 감았다. 그리고 잠시 후, 작은 붕어 한 마리가 물 밖으로 튀어 올랐다. 윤호는 신이 나서 박수를 쳤다.
"와! 성공이에요, 할아버지! 대단해요!"
할아버지는 멍하니 손에 들린 물고기를 바라보았다. 어쩐지 가슴 한쪽이 따뜻해지는 기분이었다. 비록 기억나지 않더라도, 이 순간이 아름답다는 것은 느낄 수 있었다.
"너와 함께 있어서 좋구나."
할아버지는 작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윤호는 그런 할아버지를 바라보며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기억을 잃어도 괜찮다고. 중요한 것은 함께하는 이 순간들이라고.
그렇게 두 사람의 특별한 하루는 시작되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 오후가 되었다. 따스한 햇살이 조금씩 기울며 붉은 빛을 머금고 있었다. 윤호는 할아버지의 손을 잡고 마을 한가운데 있는 작은 카페로 향했다.
"여기, 할아버지가 아주 좋아하시던 곳이에요."
윤호는 문을 열며 말했다.
할아버지는 문턱을 넘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카페 내부는 따뜻한 나무 향과 커피 향으로 가득 차 있었다. 벽에는 오래된 사진들과 익숙한 풍경화들이 걸려 있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낯설게 느껴졌다.
"앉으시죠, 할아버지. 제가 할아버지께 가장 좋아하시던 음료를 주문할게요."
윤호는 카운터로 가서 주인에게 주문을 했다. 잠시 후, 한잔의 따뜻한 아메리카노와 윤호가 좋아하는 초코라떼가 나왔다. 할아버지는 앞에 놓인 커피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이거… 좋아했었나?"
윤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할아버지는 항상 이 커피를 마시면서 저한테 이야기를 들려주셨죠."
할아버지는 조심스럽게 커피를 한 모금 머금었다. 입안에 퍼지는 쌉싸름한 맛. 어쩐지 가슴 한쪽이 따뜻해졌다.
그때, 카페 안의 오래된 오르골에서 잔잔한 멜로디가 흘러나왔다. 할아버지는 갑자기 눈을 감고 음악을 음미하듯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리고 아주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이 노래… 어디선가… 들었던 것 같구나."
윤호의 눈이 반짝 빛났다.
"네! 이 곡이에요. 할머니가 좋아하시던 노래였어요. 할머니랑 이 카페에서 자주 들으셨다고 했어요."
할아버지는 조용히 숨을 내쉬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해 질 녘의 붉은 노을이 마치 오래된 기억처럼 천천히 퍼지고 있었다. 그리고 아주 조그맣게,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중얼거렸다.
"…그랬었구나."
윤호는 할아버지의 손을 꼭 잡았다. 비록 모든 기억이 사라졌을지라도, 이 순간만큼은 분명히 남을 것이라고 믿으며.
이제, 둘만의 하루는 아름다운 추억이 되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