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을 품은 우체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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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끝자락의 바람이 스산하게 불던 날, 작은 마을의 오래된 우체통 하나가 조용히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우체통은 붉은색이었지만, 세월이 흐르며 군데군데 녹이 슬고 빛이 바래 있었다.

 

이 우체통은 50년이 넘도록 마을 사람들의 편지를 받아왔다. 사랑을 속삭이던 연인의 편지, 군대에 간 아들을 향한 어머니의 기도, 바닷가에서 자란 소년이 먼 도시로 떠나면서 남긴 마지막 인사까지. 이 작은 우체통은 수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가슴에 품어 왔다.

 

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편지가 오지 않았다. 휴대전화와 이메일이 모든 걸 대신하는 세상이 되었고, 사람들은 손편지를 잊었다. 결국, 마을의 행정청은 이 우체통을 철거하기로 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사람 중 한 명이 있었다. 마을에서 작은 책방을 운영하는 ‘은서’였다.

책방 ‘기억의 서재’를 운영하는 은서는 언제나 손편지를 사랑했다. 어릴 적, 돌아가신 할머니에게서 받은 손편지를 아직도 간직하고 있을 만큼. 그래서 마을의 우체통이 사라진다는 소식을 듣고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이 우체통은 단순한 철덩어리가 아니야. 사람들의 기억이 담겨 있잖아.”

 

은서는 마을 사람들에게 우체통을 지키자고 호소했다. 하지만 모두들 그저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편지 같은 건 이제 아무도 안 쓰잖아.”
“그래도 이제는 시대가 바뀌었어. 우체통이 없어진다고 해도 아무도 신경 안 쓸걸?”

 

그들의 말이 틀린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은서는 포기하지 않았다.

어느 날, 은서는 조용히 우체통 앞에 앉아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안녕? 이 편지를 받을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나는 이 우체통을 사랑하는 사람 중 한 명이야. 이곳에는 너무나 소중한 기억들이 담겨 있어. 혹시 너도 그런 기억을 갖고 있다면, 이 우체통에 편지를 넣어줄래?”

 

편지를 쓴 후, 은서는 그것을 우체통에 넣었다. 물론 아무도 답장을 해주지 않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단 한 명이라도 응답해준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틀 뒤, 믿기 어려운 일이 벌어졌다.

우체통 안에는 한 통의 편지가 들어 있었다.

 

 

은서는 손을 떨며 편지를 꺼냈다. 낡은 종이에 꾹꾹 눌러쓴 글씨가 보였다.

 

"안녕하세요. 저는 이 마을에서 태어나 자란 사람입니다. 어린 시절, 이 우체통에 편지를 넣었던 기억이 나네요. 아버지가 먼 바다로 일을 나가셨을 때, 편지를 쓰면 꼭 답장이 올 거라 믿었어요. 그 시절, 이곳은 내게 희망이었죠. 그런데 이제 철거된다니 아쉽네요. 당신의 편지를 읽고, 저도 이렇게 글을 씁니다. 혹시, 이 우체통을 다시 되살릴 방법이 있을까요?"

 

편지는 익명의 사람이 보냈지만, 분명히 그도 이 우체통을 사랑하는 누군가였다. 은서는 가슴이 뛰었다. 적어도 한 사람은 이곳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날 이후, 은서는 매일 밤 우체통을 확인했다. 신기하게도 며칠이 지나자 한두 통씩 편지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 우체통에서 첫사랑과 주고받은 편지가 생각나요.”
“군대에서 받은 어머니의 편지를 여기 넣어뒀었죠.”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 제게 써주신 마지막 편지가 이곳을 통해 왔어요.”

 

이야기는 마을 사람들에게 퍼졌고, 우체통은 점점 다시 활기를 찾았다. 사람들은 자신의 기억을 편지로 써 내려갔다. 그리고 그 편지들은 우체통을 통해 서로에게 전해졌다.

마을회관에서도 이 움직임을 알게 되었고, 철거 결정을 잠시 보류했다. 대신 마을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우체통을 새롭게 단장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하기로 했다.

 

은서는 아이들과 함께 붉게 바랜 우체통을 닦고, 새로운 페인트를 칠했다. 사람들은 그곳에 작은 벤치를 만들었고, ‘기억의 우체통’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누구나 이곳에서 편지를 쓸 수 있고, 읽을 수 있도록 했다.

 

 

그리고 어느 날, 은서는 다시 한 통의 편지를 발견했다. 이번에는 봉투에 이름이 적혀 있었다.

 

“은서 씨께.”

그녀는 조심스럽게 편지를 열었다.

 

“은서 씨, 우체통을 지켜줘서 고맙습니다. 덕분에 우리는 다시 마음을 전하는 법을 배웠어요. 저는 이제 먼 곳으로 떠나지만, 이곳이 다시 사람들의 이야기로 채워지는 걸 보고 마음이 따뜻해졌어요. 언젠가 다시 이 마을에 돌아오면, 꼭 편지를 남길게요.”

 

편지의 끝에는 익숙한 이름이 적혀 있었다.

어릴 적, 은서가 이 우체통을 통해 친구가 된 ‘지운’이었다. 오랜 시간이 지나 연락이 끊겼지만, 그도 이곳을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은서는 눈물을 머금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편지는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다리가 된다. 그리고 이제 이곳, 기억의 우체통은 또 다른 누군가의 이야기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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