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조약돌 하나

반응형

 

도시의 잿빛 소음은 민준의 영혼을 갉아먹고 있었다. 몇 번의 낙방 끝에 겨우 들어간 회사는 그에게 성취감 대신 무력감만을 안겨주었고, 텅 빈 자취방에 홀로 돌아오면 세상에 오직 자기 혼자만 남겨진 듯한 고독이 습기처럼 스며들었다. 그는 도망치듯 휴가를 내고 고향으로 내려왔다. 특별한 계획은 없었다. 그저 어린 시절의 공기가 그리웠을 뿐이다.

 

오랜만에 찾은 강가는 여전했다. 나른한 오후의 햇살이 윤슬이 되어 강물 위에서 부서지고, 갈대숲은 바람의 결을 따라 부드럽게 몸을 눕혔다. 민준은 의미 없이 강변을 따라 걸었다.

 

그러다 문득, 발치에 놓인 유난히 희고 매끄러운 조약돌 하나에 시선이 멎었다. 손에 쥐자 기분 좋은 무게감과 함께 서늘한 감촉이 전해졌다. 그런데 돌의 표면에는 무언가 새겨져 있었다. 먹물로 쓴 듯, 단정하면서도 힘 있는 필체의 한자 하나.

 

'緣(연)'.

 

인연. 운명. 만남. 수많은 의미를 품은 글자였다. 누가 이런 걸 여기에 두었을까. 장난이라기엔 글씨에 담긴 정성이 너무나 깊었다. 민준은 홀린 듯 조약돌을 주머니에 넣었다. 그 차가운 돌멩이가 이상하게도 꽁꽁 얼어붙었던 마음 한구석을 녹여주는 것 같았다.

 

그날 이후, 민준의 일상엔 작은 습관이 생겼다. 매일 같은 시간, 강가를 찾는 것이었다. ‘緣’자가 새겨진 돌멩이를 만지작거리며, 그는 혹시나 또 다른 돌멩이가 있진 않을까, 혹은 이 돌의 주인을 만날 수 있지 않을까 막연한 기대를 품었다.

 

며칠이 지나고, 그는 용기를 내어 근처에서 비슷한 조약돌을 주워 답장을 남기기 시작했다. ‘안녕’, ‘기다림’, ‘오늘도’. 서툰 글씨로 한 자 한 자 눌러쓰는 동안, 잊고 있던 설렘이 가슴속에서 피어올랐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저만치에서 한 여자가 강가에 무언가를 조심스럽게 내려놓는 모습이 보였다. 민준은 저도 모르게 걸음을 멈추고 숨을 죽였다. 긴 생머리를 하나로 묶은, 맑고 슬픈 눈을 가진 여자였다.

 

그녀는 돌을 내려놓고 한참 동안 강물을 바라보다가, 이내 조용히 자리를 떴다. 민준은 심장이 세차게 뛰는 것을 느끼며 그녀가 있던 자리로 다가갔다. 그곳에는 ‘숨’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조약돌이 놓여 있었다.

 

그 후로도 민준은 몇 번이나 그녀를 보았지만, 차마 말을 걸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저 멀리서 그녀가 남기고 간 돌멩이를 확인하고, 자신의 돌멩이를 그 옆에 나란히 놓아두는 것이 전부였다. ‘그리움’, ‘바람’, ‘기억’. 그녀가 남긴 글자들은 어딘지 모르게 아련한 슬픔을 담고 있었다.

 

민준의 휴가가 끝나갈 무렵, 장마가 시작된다는 예보가 들려왔다. 굵은 빗줄기가 강물을 불리고, 그들이 쌓아온 작은 세상은 속절없이 휩쓸려갈 터였다. 민준은 초조해졌다. 이대로 모든 것이 사라지게 둘 수는 없었다. 그는 비가 쏟아지기 시작한 저녁, 우산도 잊은 채 강가로 달려갔다.

 

아니나 다를까, 강가에는 이미 그녀가 와 있었다. 쏟아지는 비를 온몸으로 맞으며, 불어난 물에 잠겨가는 조약돌들을 허망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어깨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저기요!”

 

민준은 자기도 모르게 소리쳤다. 그녀가 놀란 눈으로 돌아보았다.

 

“이러다 큰일 나요! 일단 피해야…!”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민준은 그녀의 눈에서 흐르는 것이 빗물만이 아님을 알았다. 그녀는 울고 있었다.

 

“안 돼요… 사라지면 안 돼요. 이건… 이건 우리 아빠인데…”

 

그녀의 작은 속삭임은 빗소리에 묻혔지만 민준의 가슴에는 천둥처럼 울렸다. 그는 더 이상 아무것도 묻지 않고 강물로 뛰어들었다. 차가운 물살이 다리를 휘감았지만, 그는 손을 뻗어 하나라도 더 건져내려 애썼다. 그녀도 그런 민준을 보며 함께 돌을 건지기 시작했다. 한참 동안 두 사람은 비에 젖은 생쥐 꼴이 되어, 말없이 돌멩이만 건져 올렸다.

 

가까스로 열댓 개의 조약돌을 건져 강둑에 올려놓고 나서야,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 보았다. 빗물과 눈물로 범벅이 된 그녀의 얼굴은 위태로워 보였다.

 

“고마워요… 정말…”

“아니에요. 소중한 것 같아서…”

 

민준이 멋쩍게 웃으며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처음 그가 발견했던, ‘緣’자가 새겨진 조약돌이었다.

 

“이것도… 당신 거죠?”

 

그것을 본 그녀의 눈이 세차게 흔들렸다.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조약돌을 받아 들었다.

 

“이건… 제가 제일 처음 놓았던 돌이에요. 1년 전, 아빠가 돌아가시고 나서… 아빠는 서예가셨거든요. 늘 강가에서 글씨에 대한 영감을 얻으셨죠. 아빠가 가장 사랑했던 이곳에, 아빠가 즐겨 쓰시던 글자를 하나씩 남겨두면, 아빠를 기억하는 저만의 방식이 될 거라고 생각했어요.”

 

민준은 그제야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녀의 슬픔과, 돌멩이에 담긴 글자들의 의미를.

 

“아버님께서… 늘 말씀하셨어요. 

아주 작은 인연 하나가 한 사람의 인생을 통째로 바꾸기도 한단다.

 

그녀가 조약돌을 쥔 민준의 손을 가만히 감쌌다. 빗속에서, 두 사람의 젖은 손이 맞닿은 온기는 이상하리만치 따뜻했다. 잿빛이던 민준의 세상에, 그 순간 비로소 맑고 선명한 색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그 작은 조약돌 하나가, 그저 스쳐 지나갈 수도 있었던 두 사람을 ‘인연’이라는 이름으로 단단히 묶어주고 있었다. 강물에 휩쓸려간 수많은 돌멩이처럼 사라질 뻔했던 그의 삶이, 이 작은 인연의 돌멩이 하나로 새로운 물길을 찾은 것이다.


소설에 대한 심리학적 분석

  1. 과도기적 대상 (Transitional Object): 민준에게 ‘緣’자가 새겨진 조약돌은 심리학에서 말하는 ‘과도기적 대상’의 역할을 합니다. 이는 어린아이가 부모와 분리될 때 겪는 불안을 줄이기 위해 담요나 인형 같은 특정 사물에 애착을 형성하는 것과 유사합니다. 도시 생활에 지쳐 정서적 고립감과 무력감을 느끼던 민준은 이 조약돌을 통해 위안과 안정감을 얻습니다. 조약돌은 그의 텅 빈 내면과 외부 세계를 연결하는 매개체이자, 희망과 인연에 대한 기대를 상징하며 그가 현실의 어려움을 견디고 새로운 관계를 향해 나아갈 수 있는 심리적 지지대 역할을 합니다.
  2. 애도 과정과 상징적 행위 (Grieving Process and Symbolic Action): 서연이 강가에 조약돌을 남기는 행위는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애도 과정의 일부입니다. 심리학자 윌리엄 워든이 제시한 애도의 4단계 과업 중, 그녀의 행동은 ‘고인과의 지속적인 유대감을 유지하며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것’에 해당합니다. 그녀는 아버지를 물리적으로 잃었지만, 그의 유산(서예)과 그가 사랑했던 공간(강가)에서 상징적인 행위(조약돌에 글자 새기기)를 반복함으로써 아버지와의 정서적 연결을 이어갑니다. 이는 슬픔을 억누르거나 회피하는 것이 아니라, 능동적이고 창의적인 방식으로 재구성하여 상실감을 극복해나가는 건강한 애도 과정으로 볼 수 있습니다.
  3. 상호적 자기 노출 (Reciprocal Self-Disclosure): 민준과 서연의 관계가 급속도로 깊어지는 계기는 폭풍우 속에서의 만남입니다. 이 극적인 상황에서 서연은 “이건 우리 아빠인데…”라며 자신의 가장 깊은 슬픔과 취약함을 드러냅니다(자기 노출). 이에 민준은 판단이나 질문 대신 즉각적인 행동(돌을 함께 줍는 행위)으로 공감과 지지를 보여주며, 그 역시 자신이 간직해온 ‘緣’ 조약돌을 꺼내 보임으로써 자신의 기다림과 관심을 간접적으로 노출합니다. 이처럼 한 사람의 깊은 자기 노출이 상대방의 공감적 반응과 또 다른 자기 노출을 이끌어내는 ‘상호성’의 원리는 두 사람 사이에 강력한 신뢰와 친밀감을 형성하는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합니다.
728x90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