택시기사 아버지와 재회한 밤, 첫 딸이 태어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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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시기사 아버지와 재회한 밤, 첫 딸이 태어나다

자정에 터진 양수

자정 열두 시 사십 분, 서연이 정훈의 팔을 붙잡았다.
손끝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이불 위로 번진 물기가 달빛에 어슴푸레 비쳤다.

"자기야, 나 물 터진 것 같아."

그 말에 정훈은 쥐고 있던 태블릿 펜을 떨어뜨렸다.
화면엔 마감 사흘 남은 웹툰 47화 배경이 그대로 떠 있었다.
펜 끝이 침대 밑으로 굴러 들어가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결혼 삼 년 차, 첫 아이였다.
예정일은 나흘 뒤, 다음 주 월요일이었는데 아이는 그 계획을 기다려주지 않았다.
산부인과에서 받아온 출산 체크리스트는 서랍 안에서 아직 반도 지워지지 않은 채였다.

정훈은 침대 옆에 쪼그려 앉아 서연의 눈을 봤다.
얼굴이 평소보다 창백했고, 이마엔 식은땀이 한 줄 흘러내려 있었다.

"병원 가방, 어디 뒀더라.
분명 현관 옆에 뒀는데."

정훈이 중얼거리며 신발장 밑을 뒤졌다.
손이 자기 것 같지 않게 허둥댔다.
슬리퍼 한 짝이 발에 걸려 넘어질 뻔했다.

"진정해.
나보다 더 당황하면 어떡해."

서연이 숨을 고르며 웃으려 애썼다.
입꼬리는 올라갔지만 눈은 웃지 못했다.
그 웃음이 그래도 정훈의 손을 조금 진정시켰다.

정훈은 겨우 찾은 병원 가방을 들고 거실로 나왔다.
가방 안엔 서연이 석 달 전부터 하나씩 채워둔 신생아 손싸개와 배냇저고리가 들어 있었다.

잡히지 않는 택시

새벽 한 시, 아파트 주차장엔 정훈의 차가 없었다.
두 달 전 접촉사고로 카센터에 맡겨둔 채였다.
보험 처리가 늦어져 렌터카도 아직 못 받은 상태였다.

"콜택시 불러, 빨리."

서연이 허리를 짚고 현관 벽에 기댔다.
숨을 짧게 끊어 쉬고 있었다.
벽에 걸린 결혼사진이 그녀의 그림자 위로 흔들렸다.

정훈은 앱을 열었다.
화면엔 배차 지연 중이라는 문구만 돌고 또 돌았다.
로딩 바퀴가 세 바퀴째 돌아가는 걸 보며 심장이 같이 뛰는 것 같았다.

삼 분, 오 분, 칠 분.
숫자가 늘어날수록 서연의 숨소리도 가빠졌다.
정훈은 다른 앱을 세 개나 더 깔았지만 어느 것도 기사를 잡지 못했다.

"이러다 집에서 낳겠어, 진짜."

서연이 농담처럼 말했지만 웃지는 않았다.
정훈은 손가락으로 화면을 몇 번이나 눌렀다 뗐다.
손바닥에 땀이 차 화면이 몇 번이나 잘못 눌렸다.

그때 화면 하나가 배차 완료로 바뀌었다.
도착 예정 시간 십일 분.
그 숫자가 구원처럼 보였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는 삼십 초가 삼십 분처럼 느껴졌다.
로비 유리문 너머로 가로등만 깜빡였다.
서연은 엘리베이터 벽에 어깨를 기대고 눈을 감았다.

"조금만 참아.
택시 왔대, 거의 다 왔대."

정훈이 서연의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
자신도 그 말을 믿고 싶었던 것뿐이었다.

낯선 택시, 낯익은 얼굴

배차 완료 알림이 뜬 건 십일 분 만이었다.
기사 이름 박성구, 차량 번호 끝자리 사칠일이.
정훈은 그 이름을 소리 내어 읽지 않았다.

흔한 이름이라고 생각했다.
흔한 이름이어야 했다.
박씨 성에 성구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서울에 몇만 명은 될 거라고 속으로 되뇌었다.

단지 입구에 주황색 택시가 멈춰 섰다.
기사가 내려 조수석 쪽으로 돌아오는데 정훈의 걸음이 멎었다.
걸음걸이부터 알아봤다.
왼쪽으로 살짝 기우는 걸음이었다.

"...정훈이냐."

가로등 아래 선 남자가 먼저 입을 열었다.
십 년 만에 듣는 목소리였다.
목소리는 더 낮아졌고 더 느려졌다.

정훈은 대답하지 못했다.
열아홉 살 겨울, 빚 문서 몇 장을 남기고 사라졌던 등이 떠올랐다.
그날 식탁 위에 놓인 쪽지의 글씨체까지 선명하게 되살아났다.

서연이 허리를 짚은 채 두 사람을 번갈아 봤다.
상황을 짐작하지 못한 얼굴이었다.
진통 사이사이로 둘의 표정을 살피느라 눈동자가 빠르게 움직였다.

"누구야, 자기 아는 사람이야?"

정훈은 고개를 저었다가, 다시 끄덕였다.
설명할 시간이 없었다.
성구도 더 캐묻지 않고 서연의 상태부터 살폈다.

"일단 타요.
얘기는 나중에 해도 되니까."

성구가 짧게 말하며 뒷좌석 문을 열었다.
그 한마디가 두 사람의 십 년을 잠시 접어두게 만들었다.

아버지의 지도

성구가 먼저 움직였다.
서연을 부축해 뒷좌석에 태우고 담요를 깔아주었다.
손놀림이 익숙했다.
담요 모서리를 양 무릎 사이로 끼워 넣는 동작까지 자연스러웠다.

"몇 분 간격이에요, 지금?"

성구가 백미러로 묻자 서연이 숫자를 더듬더듬 댔다.
삼 분, 가끔 이 분.
말하는 중간에도 숨을 한 번씩 몰아쉬었다.

성구는 고개를 끄덕이고 내비게이션 대신 자기 머릿속 지도를 썼다.
삼십 년 가까이 이 도시를 돈 사람의 지도였다.
손은 핸들을, 눈은 거울과 전방을 번갈아 오갔다.

"큰길로 가면 신호에 걸려요.
뒷골목으로 돌아가면 이 분은 당길 수 있어요."

정훈은 조수석에 앉아 아버지의 옆얼굴을 봤다.
주름이 늘어 있었고 손등엔 검버섯도 보였다.
십 년 전보다 어깨가 눈에 띄게 좁아져 있었다.

차는 곧바로 출발했다.
가로등 불빛만 어두운 창을 스쳐 지나갔다.
라디오는 꺼진 채였고, 대신 미터기 숫자만 조용히 올라갔다.

"운전 오래 하셨어요?"

정훈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질문의 뒷면에 더 많은 질문들이 쌓여 있다는 걸 둘 다 알고 있었다.

"그냥, 적당히."

성구는 더 말을 잇지 않았다.
대신 깜빡이를 넣고 좁은 골목 쪽으로 핸들을 꺾었다.

다시 걸어보는 말

침묵이 길었다.
엔진 소리와 서연의 숨소리만 차 안을 채웠다.
신호 대기 중에도 성구는 백미러로 뒷좌석을 자꾸 확인했다.

"아버지는…
여태 택시 하셨어요?"

정훈이 겨우 입을 뗐다.
묻고 나서야 스스로도 놀랐다.
아버지라는 단어를 입에 올린 게 몇 년 만인지 세어보지도 못했다.

"칠 년 됐다.
개인택시로."

성구가 짧게 답했다.
더 묻지 않았고 더 말하지도 않았다.
그게 둘 사이의 거리만큼 적당했다.

뒷좌석에서 서연이 짧은 신음을 냈다.
정훈이 뒤돌아 손을 꼭 잡아주었다.
손끝이 차가웠다가 다시 땀으로 미끈거렸다.

"조금만 참아, 거의 다 왔어."

성구가 속도를 살짝 올렸다.
급하지 않게, 그러나 머뭇거림 없이.
깜빡이 없이 차선을 바꿀 땐 손목이 먼저 움직였다.

정훈은 그 손목에서 예전엔 못 봤던 시계를 발견했다.
싸구려 전자시계였다.
줄이 낡아서 두 번 꿰맨 자국이 보였다.

"엄마는…
연락하세요?"

말이 나오고서야 정훈은 후회했다.
성구는 대답 없이 운전만 계속했다.
침묵이 아까보다 조금 더 무거워졌지만, 그 무게를 억지로 치우려 하지 않았다.

막힌 다리 위에서

한강 다리 진입로에서 브레이크등이 줄지어 켜졌다.
사고인지 공사인지 차들이 꼼짝하지 않았다.
멀리서 사이렌 소리가 희미하게 섞여 들렸다.

"이거 큰일인데…"

정훈이 내비게이션 화면을 보며 중얼거렸다.
빨간 선이 다리 전체를 덮고 있었다.
예상 지연 시간이 이십 분으로 떠 있었다.

성구는

당황하지 않았다

.
핸들을 꺾어 다음 출구 직전 샛길로 빠졌다.

"여기로 내려가면 구 다리로 돌아갈 수 있어요.
옛날에 공사장 다닐 때 많이 다니던 길이에요."

좁은 골목이었다.
가로등도 드문드문했지만 성구의 핸들은 흔들리지 않았다.
재개발 전부터 있었을 낡은 벽돌 담장이 양옆으로 스쳐 지나갔다.

서연의 숨소리가 더 가빠졌다.
정훈의 손을 쥔 힘도 세졌다.
손톱이 살짝 파고드는 느낌이 났지만 정훈은 손을 빼지 않았다.

"조금만 더요, 다 왔어요."

성구가 백미러 너머로 말했다.
목소리는 낮았지만 흔들림이 없었다.
골목을 빠져나오자 구 다리가 보였다.
차량은 눈에 띄게 줄어 있었다.

울음소리가 터진 새벽

병원 응급실 앞에 차가 멈춘 건 새벽 두 시 사십 분이었다.
성구가 차에서 내려 휠체어를 직접 끌고 왔다.
로비 안쪽 자동문이 열리는 소리가 조용한 새벽 공기를 갈랐다.

접수대 간호사가 서연의 상태를 확인하다 잠시 멈췄다.
분만 대기실이 한 자리 비었다가 막 찼다는 소식이었다.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자리 확인해볼게요."

그 몇 분이 길게 느껴졌다.
서연은 휠체어 손잡이를 꽉 쥔 채 눈을 감고 숨을 세고 있었다.

마침 다른 산모 한 명이 분만실로 옮겨졌고, 자리가 바로 생겼다.
간호사가 손짓으로 길을 안내했다.

서연이 휠체어에 앉는 동안 정훈은 지갑을 꺼냈다.
손이 떨려 카드를 두 번 떨어뜨렸다.

"됐다, 그런 거."

성구가 손을 저었다.
정훈은 카드를 든 채 멈춰 섰다.

"그래도…"

말을 잇지 못했다.
성구가 먼저 몸을 돌려 휠체어 손잡이를 정훈에게 넘겨주었다.

"가봐, 애 나올 시간이다."

정훈은 휠체어를 밀며 응급실 문 안으로 들어갔다.
뒤돌아봤을 때 성구는 차에 기대 서 있었다.

가지 않고

.

세 시간 뒤, 분만실 복도에 아기 울음소리가 울렸다.
정훈은 그 소리를 듣고서야 다리에 힘이 풀려 의자에 주저앉았다.
간호사가 나와 체중을 알려줄 때까지 손바닥이 땀으로 젖어 있었다.

복도 끝 자동문 밖, 주차장 쪽을 봤다.
택시는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성구가 운전석에 앉아 신문을 접었다 폈다 하고 있었다.

정훈이 다가가 창을 두드렸다.
성구가 천천히 창을 내렸다.
접고 있던 신문이 무릎 위로 흘러내렸다.

"딸이에요.
삼 점 이 킬로."

성구는 아무 말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눈가가 조금 젖어 있었다.

"이름은…
지었냐."

"아직요.
생각해둔 거 있으면 하나 말씀해보세요."

성구는 대답 대신 잠깐 창밖을 봤다.
동이 트기 시작한 하늘이 주차장 유리창에 번지고 있었다.

"다음에 들를게.
애 보러."

택시가 천천히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정훈은 그 자리에 서서 미등이 멀어지는 걸 끝까지 지켜봤다.

이 이야기 속 마음 읽기

🧠

회피형 거리두기

정훈은 10년간 아버지에게 연락하지 않았고, 재회한 뒤에도 "운전 오래 하셨어요?"처럼 짧고 안전한 질문만 던진다.
감정을 직접 묻는 대신 사실 확인으로 거리를 유지하려는 태도다.

🧠

위기 상황에서의 역할 전환

평소라면 어색했을 부자 관계가, 응급 상황에서는 '기사와 손님'이라는 역할로 재편된다.
성구가 담요를 깔고 길을 안내하는 장면은 관계의 어색함을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메우는 방식을 보여준다.

🧠

침묵을 통한 화해

두 사람 모두 지난 10년을 설명하지 않는다.
"칠 년 됐다, 개인택시로" 같은 짧은 대답만 오가는데, 이 침묵이 오히려 서로를 몰아세우지 않는 거리 조절로 작동한다.

🧠

감정보다 앞서는 신체적 행동

성구가 휠체어를 직접 끌고, 정훈이 서연의 손을 잡는 장면처럼, 두 사람은 감정을 말로 표현하기 전에 몸을 먼저 움직인다.
위기 상황에서 행동이 말을 대신하는 전형적인 모습이다.

🧠

미완의 재회, 열린 결말

성구는 "다음에 들를게"라는 말만 남기고 떠난다.
완전한 사과나 화해 선언 없이 여지를 남기는 이 마무리는, 오래 끊어졌던 관계가 한순간에 회복되지 않는 현실적인 속도를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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